무의식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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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원칙과 반복강박

untold 2023. 6. 9. 15:52

쾌락원칙과 반복강박 - 쾌락원칙을 너머 (2023.6.9.)

 

  우리는 대부분 긴장은 해소하고, 흥분은 가라앉히려고 한다. 지나친 긴장과 흥분상태는 우리에게 불쾌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정신은 두 가지 원칙,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에 의해 규제 된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쾌락과 불쾌를 마음속에 존재하나 어떤방식으로도 <묶이지> 않은 흥분의 양’과 연결시켰다. 즉, 쾌락은 흥분의 감소이고, 불쾌는 흥분의 증가이다. 프로이트는 페히너의 가설에 따라 우리의 신체는 완벽한 안정성에 접근해 가면 쾌감을 수반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지배하에 항상 안정된 상태로 살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전쟁 후에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이 두 원칙에 벗어나서 불쾌를 반복하고 있는 증상에 주목하면서 쾌락원칙을 넘어 불쾌를 반복할 때 그 것은 우리의 ‘조직’을 한편으로는 만족시키고 한편으로는 불쾌를 겪게 한다는 양가적인 측면을 발견하였다. 그것을 반복 강박, 운명 강박이라고 부르고 그 기능과 원인이 무엇인지 탐사하기 시작하였다. 운명신경증과 같은 반복 강박의 사례를 들면서  우리가 쾌락원칙을 초과 하여 반복적으로 이끌려 나가는 일이 실제적으로 존재함을 밝힌다. 

 

쾌락원칙의 가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이 정신과정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마음 속에 쾌락원칙의 향한 경향성이 있으나 그 경향은 다른 힘이나 환경에 의해 대치되어 최종결과를 반드시 쾌락 지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어떠한 환경에서 쾌락원칙이 억제 되는가? 다시 말해 불쾌가 드러나는가.

가.   자아의 자기 보존 본능의 영향하에서 쾌락원칙은 현실원칙에 대치 된다. 현실원칙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포기하지는 않지만 쾌락에 이르는 장구한 여정, 만족의 지연, 만족을 얻을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의 포기, 불쾌를 잠정적으로 참아 내는 일을 요구하고 실행한다. 그러나 쾌락원칙은 성적본능에 의해 구사되는 작업 방법으로서 끈질기게 지속된다. 

나.    본능 충동이 자아의 포괄적인 통일체로 결합될 수 있는 나머지 것들과 양립 불가능한 상태로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본능들은 정신발달의 낮은 차원에 묶이게 되며, 무엇보다도 만족의 가능성에서 절연된다. 이 경우 자아에 의해서 불쾌로 감지된다.  

 

쾌락원칙은 흥분의 양을 감소시키기 위해 현실원칙을 도입하는데, 현실원칙은 쾌락(안정감)과 대치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을 보호’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어떤 ‘순간적인 쾌락은 포기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통해서 나중에 더욱 확실한 쾌락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또한, 본능충동은 자아와 양립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는 자아와 통일체가 아닌 것, 즉 분열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트라우마 프로이트는 전쟁트라우마의 경험을 보고 트라우마가 기질적 장애가 아님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운동신경증적 증상이 많다는 점에서 히스테리와 비슷하나 히스테리 이상의 증상이며, 놀람과 경악, 동시에 상처나 상해가 일반적으로 신경증의 발생에 저항해서 작용한다고 보았다. 트라우마에서의 불안은 “불안에는 그 불안의 주체를 경악과 경악 신경증으로부터 보호해주는 그 무엇이 있다. “ 덧붙이자면 불안은 공백을 은폐한다. 

악몽프로이트는 트라우마 환자들의 악몽은 그 현장으로 반복적으로 데리고 가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고착현상을 보면서 그는 왜 환자들이 회상, 기억에 사로잡히는 지 의구심을 갖는다. 오히려 끔찍한 기억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악몽속에서 그 것을 재현하는 것은 꿈이 소원성취라는 기능에도 대치되기 때문이었다. 

Fort-da 프로이트는 이번에 어린아이 놀이에서 어떻게 이 문제가 구사되는지 살펴본다. 아이가 실패를 커튼 밑으로 던진다, 던질 때 Fort – 잡아당길 때 da(거기에) 말한다. 이는 포기에 대한 보상, (어머니가 떠나감은 즐겁게 돌아올 것에 대한 예비조치), 떠나간 어머니에 대한 복수심을 만족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 놀이를 통해서 아이가 불유쾌한 경험을 그의 놀이친구, 즉 실패에 전이시킨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대체된 인물에 복수하는 것이다. 반복을 통해 인상의 강도를 소산시키고 자신들이 그 상황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경험이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다른 종류의 직접적인 일정량의 쾌락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여기서 일정량의 쾌락은 상황 속에 주인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이 지배적인 상황하에서도 불쾌한 것을 마음속에서 상기해 보고 작업해 볼 주제로 만들기에 충분한 수단과 방법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보았지만, 최종적 결과로서는 쾌락을 산출하는 이러한 사례와 상황을 고려는 쾌락 원칙의 존재와 지배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경향, 즉 이 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독립되어 있는 어떤 경향의 운용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즉, 불쾌감의 반복으로 상황을 장악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식이 최악의 상황에 적응시키도록 한다. 이로 인해 일정량이 쾌락이 존재한다고 보았지만 이는 반복 강박을 설명해 줄 수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3

기존에는 정신분석학이 해석의 예술이었다. 프로이트는 해석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환자가 분석가의 해석(구성)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방향이 변경되었을 때 여기서 환자의 저항이 문제시 되었고, 이러한 저항을 버리도록 유도하는 것, 즉 전이가 정신분석의 목표가 되었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저항, 즉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억압의 본질은 아닌가 생각했다. 

“환자는 자신 속에 억압되어 있는 것의 전부를 기억해 낼 수 없으며,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바로 억압의 본질적인 부분일 수 있다. 그는 억압된 자료를 의사들이 말하듯이 과거에 속하는 것으로 기억하는 대신, 그의 동시대적 경험으로서 그것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반복을 완벽하지 않은 재생품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유아기적 성생활, 외디푸스 콤플렉스에서 파생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전이의 영역 속에서 환자와 의사의 관계 속에서 활성화된다고 보았다. 다시말해 가족로맨스가 분석상황에서 반복되는 것, 증상이 반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이가 되면 “이전의 신경증은 새로운 <전이 신경증>에 의해 대치”되었다고 프로이트는 보았다. 이 역시 분석가가 ‘새로운 증상’으로 기능하는 것과 비슷한 구조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전이 속에 증상의 반복을 “환자의 태도를 초연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의사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과거의 일이고, 과거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러한 태도는 공백을 마주함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주이상스이고,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그 가정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은가.   

 

반복강박의 이해 

프로이트는 환자의 저항을 무의식의 저항으로 보는 태도를 잘못된 개념으로 본다.

환자의 저항은 자아의 저항이지 무의식의 저항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치료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을 뚫고 의식을 밀고 올라오는 어떤 실제적 행동을 통해 그 기운을 발산시킬 뿐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치료 중 저항은 ‘원래 억압을 성취시켰던 것과 동일한 의식의 상층부 조직’ 나온다고 말한다. 즉, 자아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저항과 다른 반복강박에 존재에 대해 말한다.  

 “환자의 저항이 그의 자아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고, 동시에 반복 강박이 억압된 무의식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 강박은 치료작업이 반쯤 진척되어 억압을 느슨하게 푼 연후에야 자기표현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자아는 많은 부분이 그 자체로 무의식’이고, 그것이 ‘자아의 핵’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여기에서 작은 부분만이 전의식이다. 프로이트는 자아의 저항은 쾌락원칙 지배하에 운용되는 것으로 보았다. 억압된 것이 풀려서 생기되는 불쾌를 피하려고 현실원칙에 호소하는 저항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된 것의 위력 표시인 반복 강박이 쾌락원칙에 연결되는가? 프로이트는 불쾌를 유발하는 반복강박에 대해, 쾌락원칙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 , 조직에 대한 불쾌이면서 동시에 다른 조직에는 만족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반복 강박은 우리의 무의식의 만족을 위해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반복강박이 “과거의 경험, 본능충동에 만족을 가져올 수 없는 과거의 경험을 회상”해 낸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유아적 성생활이 개화하는 초기의 욕망이 현실과 양립불가능하고 사라질 운명에 처하며, 가장 고통스런 상황속에서 끝이 나고, 이러한 실연과 실패는 나르시시즘의 상처로 남고, 열등의식을 낳게 한다는 것이다.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 나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 같은 불만에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새아기에 등장으로 인한 어린시절의 사랑의 끝장과 같은 사례들과 같은 고통을 반복한다고 보았다. 이는 상담상황에서도 반복된다. 프로이트는 ‘환자들은 전이를 통해 이 모든 원치 않는 상황과 고통스런 감정을 반복하고 대단히 정교하게 그것들을 재생” 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서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경멸을 재현, 질투심을 느낄 대상을 찾아낸다. 선물을 계획하거나 약속한다.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 환자들의 여러 소망은 물론 만족에 이르려는 본능의 작용이다. 이러한 작용이 오직 불쾌만 낳았다는 옛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주이상스의 상실을 재현한다는 것인데, 이 재현이 불쾌만 낳았다는 것이다.   

분석상황이 아닌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떠한 반복 강박이 있는가? 프로이트가 제시한 사례를 보면

‘어떤 사람은 시간이 얼마 지나면 자신이 은혜를 베푼 상대에게 분노속에 버림받는다’ 이러한 운명은 타고난 것 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또한  < 같은 것이 영원히 되풀이 되는 문제 >을 보면 관련자의 능동적인 행위와 연결되어 있거나, 동일한 경험의 반복 속에서 (무의식의) 자기표현을 하도록 되어 있는 어떤 근본적인 성격적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그것은 주체가 수동적 경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에서도 그 특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세 남자와 결혼한 여자, 세번 다 결혼 후 병이 들이 임종시에 그 여자에게 간호를 받아야 하는 경우를 보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쾌락원칙을 넘는 반복 강박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트라우마와 어린아이의 놀이 역시 반복강박과 본능적 만족을 연결시킬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동기가 섞이지 않은 반복강박의 순수한 효과를 관찰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 것이므로, ‘운명 강박 현상을 합리적 근거’를 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즉 우리는 운명신경증에 대해 각각의 합리적 이유를 대고 그것은 반복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쾌락원칙보다 더 원시적이고, 기초적이며, 본능적인 것’으로 보이는 그 무엇이 있으며, 그것, 즉 ‘반복 강박’에 대해 프로이트는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기능이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 발생하는지, 또한 쾌락원칙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논제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반복강박 = 증상의 구조  : 실재에 이끌리는 반복

 

  반복강박과 쾌락원칙의 길트임이 항상 혼란스러웠다. 쾌락원칙의 길트임은 결여를 중심으로 반복된다는 점에서 헷갈렸던 것 같다. 쾌락원칙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안정된 상태, 불쾌감이 도래하지 않도록 우리의 정신을 규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고, 이러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이 쾌락원칙을 항상 초과하는 일을 비일비재하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 의도와는 달리,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경제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은 불쾌를 추구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이는 우리가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반복을 하고, 또한 본능적 만족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이 모순적인 상황에서 프로이트의 결론은 우리의 조직이 불쾌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분열되어 있어, 우리의 의식적 만족과 무의식적 만족은 다르게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반복강박은 운명신경증으로 일컫어 지기도 한다. 임상상황에서 증상의 구조, 혹은 욕망의 구조를 탐사할 때의 스토리텔링, 무의식의 논리가 바로 반복 강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전이속에서 대타자와의 관계양상이 반복강박을 재현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러한 반복 강박은 생겨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루겠지만,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죽음충동을 향한 이끌림으로, 실재에 대한 이끌림으로 간주한다.   

반복강박, 그것은 무의식의 '일'인 것이다. 

억압된 것을 뚫고 나가 실재에 이르려는 무의식의 '일' 말이다. 그렇게 보면 실재의 이끌림 역시 주체의 소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신체와 연루되어 더 강력하고 언어를 초과하는 이끌림이다. 자신을 초과하는 이끌림 속에서 주체는 무언가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수동적 창조성의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