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가 모호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기표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기의는 언제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차원에 포함되어 있 다. 달리 말해서, 진리의 기표는 귀속관계(∋)의 연쇄로부터 이탈해 있다. 이와 같은 진리의 구조와 관련하여 라깡은 그것이 새롭게 정립된 정신분석 의 경험을 통해 “반만-말해지는mi-dire” 과정 속에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 라고 이미 규정한바 있다. 진리는 전체가 모두 말해질 수 없다. 우선 먼저, 기표는 비-전체이기에 그러하다. Le signifiant est pas-tout. 또는, 말해진 절반의 너머에는 말해질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라깡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진리는 공백을, 죽음을 대상화하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사랑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현재-이곳에 알려진 모든 지식 의 권력에 대한 하나의 타자를, 라깡식으로 말해서 타자의 타자를 공백의 형태로 고립시키는 사건이며, 그것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역능이다. 진리는 진리가 아닌 모든 것을 빼고 난 다음 남겨진 잔여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역능이라는 것이고, 그리하여 죽음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역능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진리가 아닌 모든 것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 이기에, 진리는 바로 그러한 아무것도 없음을 그럼에도 사랑하도록 만드는 역능이고, 그것은 세속의 죽음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광기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는 타자의 담화의 폐지를 요구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 속에서 그렇게 담화는 폐지될 테지만, 그러한 폐지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발화하려는 강렬한 욕망의 사건이 또한 진리의 효과이다. 라깡의 이와 같은 진리관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도식으로 덧붙이면 다음과 같다. 외쪽은 말해진dit 것, 즉 언표의 세계다. 오른 쪽 범주는 공백이다. 그것은 말해질 것이 없는 세계, 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어의 고유한 효과이자 지식의 주이상스 효과는 잉여향유를 산출하며 그것을 a라고 표기 한다. 그것은 분명이 말해진 것들의 세계 내부에서 발견되는 무엇이다. 진 리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 잉여향유는 말해진 것과 공백 사이의 교집합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진리를 가정하는 특수한 접근을 통해서 우리는 그 렇게 말해진 세계와 말할 것이 없는 세계의 교차점을 잉여향유로서 파악할 수 있다. 또는, 잉여향유는 말해진 것의 세계 너머에 무(無)가, 공백이, 즉 ‘없음이 있다‘는 역설적 사실을 촉성forcing한다. (그런 의미에서 잉여향유 는 광기다). 여기서 언급된 촉성이라는 개념은, 잉여향유가 달라붙은 기표를 중심으로 욕망의 구조가 재편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의 욕망은 언제나 (대)타자의 욕망이므로, 욕망의 구조 재편은 대타자 질서로부터의 일탈과 재구성이라는 효과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대상a는 언어-세계의 효과, 즉 존재자 세계(하이데거) 의 효과인 동시에 그 자신을 내부로부터 공백 또는 존재를 향해 개방하는우발성의 계기이다. 대상a는 유한성의 산물이자 무한성에로의 개방 효과라 는 것이다.
(49p 라깡의 인간학)
진리의 해석학
라깡은 반만 말해지는 진리의 개념이 말할 수 없는 미지의 것, 언표 불가능한 낭만주의적 외재성의 실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무의식을 다루는 정신분석에서 라깡의 이와 같은 단호한 태도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무의식이란 인간 존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다루는 개념적 형식틀이지 실체가 아니라는 라깡의 태도는 그것을 낭만주의적 실체로서 가정하는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미지의 실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또한 해석의 한계 지점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상징계의 외부에 관하여, 그것의 낭만주의적 거대함에 관하여 경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계 자체의 균열점에서 생산되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무엇에 관하여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깡은 반만 말해지는 것으로서의 진리가 어떻게 해석과 관련을 맺는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진리에 대한 해석은 언표없는 언표화 또는 언표화가 보존된 언표의 구조가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해석의 중력축이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구조속에서만 반만 말해지는 해석의 개념이 정신분석의 진리 이론에 대한 새로운 토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깡은 언어의 외부를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언어(언표)의 내부에 보존된 균열 즉 언표행위의 차원에 주목한다. 언표행위는 그로인해 파생되는 언표세계의 간극을 구성하며 이것이 곧 충동이자 잉여향유로 간주될 수 있다. (50)
언표 없는 언표화라는 개념은 발화, 즉 말하는 행위가 팔루스의 의미화 체계의 포획으로부터 잠시 흔들리는 사태를 가리킨다. 또는 팔루스의 의미화체계에 사로잡힌 욕망의 환유적 전개 내부에 보존된 충동이 주체를 가리킨다. 그리하여 새로운 부성적 은유가 아닌 다른 은유가 일어나는 것을 촉성이라 부를 수 있다. 주체의 규정이“하나의 기표(S1)에 의해서 다른 하나의 기표(S2)에게 대리되는 것”이라면, 여기서 S1의 수준이 바로 언표없는 언표화의 차원이다. S2란 이미 언표에 의해 장악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S2는 재현의 세계이며, 의미 생산의 체계이고, 팔루스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은 언표의 세계에는 결여된 무언가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진리의 존재 결여로부터 기인하는 어떤 것입니다. 여기서 존재 결여라는 표현을 우리는 망각의 결여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66
진리에 대한 사랑, 즉 진리를 욕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의 말해지지 않은 절반 때문이다. 말해진 것의 세계 – 언표의 세계에서 가능한 것은 타자의 욕망일 뿐이므로, 그곳에서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말해진 것의 세계에 도입된 공백 또는 결여의 형식으로만 출현하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사랑 역시 언표-세계 내부에 불법적으로 거주하는 이웃prochain을 향한 몫으로 남겨진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네 이웃이자- 불법적 거주민에 다름 아닌 그들 – 타자의 타자인 그들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세미나 7의 명제로 우리를 데려간다.
나약함
한편, 진리에 대한 이러한 논점을 우리는 상징화된 세계의 거세된 나약함 때문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다. 거세라는 개념은 우리의 신체를 상징화하여 쾌락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진정한 쾌락, 또는 진리가 결여되었음을 인식하도록 강제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지 않는가? 거세는 단순히 빼앗김이 아니라 그러한 빼앗김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강제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거세의 기억하기는 진리에 대한 기억하기가 아니다. 여기서 빼앗김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팔루스의 도래를 욕망하도록 강제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거세는 우리가 상실한 것의 본질을 팔루스의 미래시제 속에서 재구성하도록 만드는 계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우리가 거세를 통한 상실한 것은 결코 팔루스적 대상이 아니다. 상실된 것은 팔루스가 구축되기 이전의 사태, 즉 실재이다. 그것은 무규정적이므로 팔루스의 일자 효과를 통해 해석될 수 없다. 만일 해석된다면 왜곡이자 팔루스를 중심으로 하는 왜상효과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촉성이다.
따라서 거세를 통해 강제되는 상실의 기억은 오히려 진정한 상실에 대한 망각이다. 거세는 그렇게 우리의 신체의 실재를 포기하도록 하면서 진리가 결여되었음을 팔루스적 환영 속에서 오인-기억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그 모든 사태의 본질을 은폐하고 망각하도록 한다. 그런데, 거세의 나약함이란 바로 이러한 망각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상실감 속에 던져지는 주체의 상태이다. (상실감을 주는 망각)
팔루스의 대한 약속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존재에 대한 텅 빈 감정. 주체의 나약함은 상실감에 소멸 불가능성을, 그로 인한 불안의 항구적 엄습을 말하는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거세가 완전히 실현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거세 자체의 나약함을 가리킨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이란 세계의 나약함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존재sein의 강렬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세의 역설적 기억이 숨기고 있는 망각을 망각하도록 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상실에 관한 가짜 기억을 믿지 못하는 나약함이자, 그러한 나약함 속에서 자신의 균열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세계의 나약함, 즉 세계의 무한성이라는 것이다.
망각의 망각
거세를 통한 상실의 기억이 빠져있는 이 같은 망각 속에서도 은폐되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곧 잉여향유 또는 대상a이다. 그것은 말해진 것의 망각 속에 잠든 세계를 떠다니는 공백의 유령이자, 온전한 망각이 불가능하도록 세계를 흔드는 증상의 사건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팔루스를 통해 상실의 대상이 재구성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에 대한 사랑은 거세가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만드는 것을 망각되도록 하면서 진정으로 망각한 것은 오히려 다시 기억하게 만든다.
따라서 그것은 망각의 결여, 즉 망각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증상의 유령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현실의 질서로부터 물러선 것, 은폐된 것, 그리하여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인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없는 것을, 무를, 공백을 사랑하는 태도, 궁정풍 사랑의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반하여 무의식을 지탱하는 파괴불가능한 욕망, 우리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특별히 욕망하지 않았음에도 떠밀려 끌려들어 가게 되는, 무의식을 형성하는 욕망의 세계는 바로 망각 그 자체의 산물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그 자체는 변하거나 누그러지지 않는 환유적 욕망이란, 존재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망각의 효과라는 것이다. 무의식의 형성물들의 차원에서 존재는 결코 충만할 수 없으며, 언제나 결여의 질서 속에 있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존재의 결여에 대한 망각으로부터 욕망의 파괴불가능한 차원이 촉발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라깡은 “존재함이 결여와 망각의 결여는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는 존재하기와 망각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미)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하기와 망각하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러한 입장은 존재의 본질이 자기 은폐 또는 현실로부터 물러섬에 있다는 하이데거의 관점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야만, 존재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지 않은가? 무언가의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것이 사실에 있어서 상실되어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는 의미이기에게 존재는 대상a와 같다. 한편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각의 결여는 존재하기의 결여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며, 존재하기는 망각하기의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지요.” 66
다시 강조하건데, 우리가 현실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세계 속에서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현실 세계이 토대에 자리한 존재(의 상실)를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존재(의 상실)를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으 사유불가능성을 사유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온통 텅 빈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온전히 현실 세계를 살아갈 수 없으며, 그곳에 존재 할 수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에의 사랑은 곧 나약함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 나약함이란 바로 거세를 말하는 것이다. 충만할 수 없는 존재, 거세된 존재, 결여를 내재한 존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결여에 대한 망각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나약함은 그러한 망각이 완전히 실현 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는 나약하기에 결여를 잊을 수 없는 것이고, 나약하기에 신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며, 그로인한 흔들림은 우리를 방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를 진리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러한 방황의 여정 속에 있는 우리의 나약함이기도 하다.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바로 나약함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약함에 대해서 우리는 진리가 감추고 있는 베일을 들쳐볼 수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거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
진리는 그렇게 자신의 근본적 상실을, 거세됨을 감추고 있다. 우리가 진리를 묻고 그것을 찾으려 할 때에 궁극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은 그와 같은 거세 또는 상실의 장소라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거세된 현실의 나약함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 자체의 규정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사랑이란 우리가 갖지 못한 것을 주려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나약함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 의심할 바 없이 그곳에 사랑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일전에 이야기한 대로, 사랑이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을 것을 주는 것, 즉 그러한 기원적 나약함을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
여기서 라깡은 진리의 개념을 사랑에 연결시키면서 결여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진리는 이처럼 진리에 대한 사랑의 차원 없이는 사유될 수 없다. 진리를 말하는 자는 진리를 사랑하는 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만드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이 진리의 도래를 가능하게 할 뿐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진리가 언제나 반만-말해진다는 라깡의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진리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차원이 아닌 결여의 차원에 존재하는 역설적 대상인 그것을 말하는 것은 진리의 생산을 촉발하는 실천이다. 고로 진리에 대한 사랑은 진리의 결여를, 그것의 없음을 사랑하며, 그것을 무언가로 채우려는 시도, 기원적 나약함을 회복시켜 주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물론 기원적 나약함을 회복시킨다는 말의 중의적 차원을 간과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나약함을 나약하지 않은 상태로 회복시킨다는 의미를 갖는 동시에,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기원적 나약함을 다시 불러내어 그처럼 나약한 상태가 되도록 만든다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속의 대타자는 스스로를 강함으로 제시하면 진리가 지금 여기에 있거나 가까운 시기에 도래할 것이라 자신하지 않는가?
그와 방식으로 진리를 사랑하는 태도를 팔루스적 사랑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라깡이 말하는 진리에 대한 사랑 또는 나약함에 대한 사랑은 증상적 사랑이다. 그것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그것 자체를, 즉 공백을 궁정풍 사랑의 형태로 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편 라깡은 이에 대해서 다음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다.
“분석가들에게서, 그러니까 우리가 타부라는 몇몇 단어의 이름들로 담화를 얼버무리게 되는 바로 그들에게서 우리가 결코 눈치채지 못했던 진리가 존재하는데요, 그것은 바로 무능력이고, 바로 그것을 토대로 모든 진리에 관한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언급되었던 “나약함에 대한 사랑”을 참조한다면 상기의 언급이 이해될 수 있다. 무능력이란 곧 거세됨이자 나약함을 말하지 않는가?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분석가는 거세되지 않은 자로써 자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전이는 그러한 절대적 권력 앞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전이 사랑이란 분석가 자신의 나약함이 내담자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석가의 나약함이란 그가 팔루스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인 동시에, 그 대신 공백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분석가는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을, 무능력을 무기로 해서만 내담자의 존재-결여를 공백의 형태로 보존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라깡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과장된 목소리로 그렇게 부르곤 하는 보편적 사랑이란, 정확히 말해서 진리를 베일을 씌우고 심지어 방해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 67
보편적 사랑은 오히려 진리를 은폐하고 방해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편적 사랑이란 모두에게 줄 수 있는 보편적 대상의 사랑이다. 그것은 보편적 대상을 중심으로 작동하며, 보편적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바로 팔루스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보편적 사랑은 진리를 베일 씌우고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존재는 은폐되어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팔루스를 가진 주체로 가정되는, 그래서 안다고 가정되는 분석가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보편적 사랑이라 해도, 그는 그것을 줄 수도 없고, 또 주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에 대해서 자주 강조했듯이, 우리(분석가)는 그리 대단한 것을 알고 있다고 가정된 것은 아닙니다. ”
사정이 그러하기에,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분석가가 준비하고 분석이 연출하여 만들려는 것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인데요, 그것은 분석ㅇ르 시작하려는 그에게 분석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 <시작하세요. 아무거나 말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아주 훌륭하게 될겁니다. > 여기서 안다고 가정된 주체로서 설정된 것은 내담자이며, 그것은 무엇보다 악의적인 가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그는 다른 사람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정신분석에 대한 조금은 우스꽝스런 면모를 강조를 담고있는 상기의 언급은 그럼에도 분석 자체의 본질이다. 내담자가 그 어떤 계획된 발화도 시도하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석에서의 발화는 의식의 표현이 아닌 무의식의 표현에 접근해야 한다. 말실수나 실착 그리고 꿈의 발화에 집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아무 말이나 하시면 됩니다”이 표현이 이해되어야 한다.
2021.10.31
(참고문헌, 백상현 미출간 강의록, 라깡의 정치학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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