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무의식이라는 해머

untold 2023. 6. 18. 21:52

무의식의 도약

2020.9.19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무의식의 문법이 있다는 이 명제가 후기로 가면서 “무의식은 간극”이라고 전환된 순간을 저자가 설명할때, 이마에 해머를 맞은 듯 했다. 나는 그 말이 가장 충격적이였던 것은 무의식이 나의 정신세계의 ‘진리의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진리가 언제나 나를 선한 장소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절벽에 등을 미는 것과 같고, 때로는 끝없는 소멸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면서 나의 무의식에 대한 불신감도 어느정도 들었다.

언제나 나의 이성보다는 무의식적 직감과 충동에 기대어 세상을 더듬거렸다. 한 번의 경험은 곧바로 징크스가 되어버리는 유아론적 믿음들로 가득차 있었다. 말보다는 행위를 보라는 세상의 말을 믿고, 행위를 보았지만 그래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결과적으로 지금 돌아보면, 무언가가 있다는 감각 자체는 상징화할 수 없는 ‘그 것’이 있다는 것이였고 그것이 대해 지배를 받았다. 그 것을 상징화하기 위해 찾아다니던 자아만 해도 수십개는 될 것이다.

고독이 두눈을 쑤실때면, 바닥에 발이 닿을 때까지 자멸하기를 반복하고, 그 끝에 닿은 반동으로 다시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했다. 문제는 삶의 반동으로만 살아가는 그 삶 역시 고약한 우물 안이다.

 

“프로이트적 무의식은 결코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주의적 무의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밤의 신령들이 지배하는 장소가 아니지요. 물론 그곳이 프로이트가 눈여겨본 곳과 전혀 무과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낭만주의적 무의식의 용어들을 이어받은 융을 파문했다는 사실은 정신분석이 그와는 전혀 다른 것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해줍니다.”

 

왜 우리는 무의식을 실체처럼 낭만주의적으로 밖에 배우지 못했을까?

이러한 오해가 불러일으킨 파장으로 몇 년간 내 고정관념과 싸우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되지 않았는가.

 

무의식이라는 고정관념에 대해, 초자아에 대해 주체가 타자임을 인정해야 되는 뼈때리는 순간들을 마주하는 투쟁의 시간들. 무의식의 역시 타자가 새겨놓은 흔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래서 무의식을 나의 본성으로 생각했기에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자주 부딪힐 수 밖에 없었다.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화 되어 있다는 문장을 돌아가보자.

사실 이 문장 자체가 이해 불가능하지만 일단 라깡은 “무의식도 의식의 수준만큼이나 정교한 방식으로 말하고 기능한다”고 설명한다.

 

이 강의에서는 무의식 역시 타자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넘어 이제는 무의식이 간극이며,

주체 역시 간극이라고 개념의 도약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개념이 실재를 구성하는 것이지 실재를 개념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문장 역시 아직까지 모호하게 남아 있다.

초기 라깡은 무의식 역시 의식의 사유처럼 무의식도 기표연쇄로 이루어진 사유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 되며, 백상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무의식이 어떠한 문법의 언어에 포획되느냐의 따라서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재해설 될 수 있다고 ” 말한다.

저자는 인간의 신체가 하드웨어라면, 언어는 소프트웨어라고 설명했다.

히스테리의 문법을 WINDOW로, 강박의 문법을 OS로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어떤 프로그램에 우리 신체에 장착되는가에 따라 우리는 서로 다른 시스템(말투)으로 말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스템을 우리에게 깔았던 자는 우리 자신이 아니다. 언어자체의 도입이 폭력적인데다가, 아버지는 지시하고 명령하기 위해 언어를 주입하게 되며, 이 무의식의 문법의 단 하나의 목표는 주이상스를 억압하기 위한 문법이라고 저자는 설명하면서 “ 주체의 무의식이 타자의 언어에 의해 이미 구조화된 것이라면 분석실천은 이것을 위반하는 언어의 도입을 통해 무의식의 재구조화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내담자 그 자신에 의해 도입될 도래할 기표들이어야 한다.” 라고 말한다.

 

라깡은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화 된 것”이라는 기존의 입장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규정을 도입하려 한다. 무의식은 언어-장치가 아니라 그러한 장치의 내부를 떠다니는 공백의 유령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이 등장하면 그것이 정교화되는 방식으로 실재가 구성되며 구체화된다. 그리하여 출현했던 것이 프로이트의 판본의 무의식이라는 현상이다. 무의식이란 다른 모든 실재의 사태들이 그러한 것처럼 사유에 대해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것을 규정하는 언어의 개념적 기능에 의해 형성되고 파악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제 개념이 실재를 만든다는 뒤집기는 또 다른 삶의 방황을 불러 일으켰다.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상징화 할 수 없는 ‘그 것’을 어쩌면 본질이라고 나는 규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본질, 진실(진리)이 따로 존재하는다는 집착이 내 인생의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진실’이라는 실체를 쫓아다니며 역겨워진 자신을 견딜 수 없어 나는 합정동에 다니기 시작했을 것이다.

하나의 현상에 갖대댄 프리즘을 통과한 것이 우리가 보는 세계라면 ‘하나의 현상’은 있다고 가정한 그 상태가 나의 상태였다. 그것이 나의 오만한 세계관이였을 것이다. 하나의 본질을 둘러싼 프리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

그래서 언어를 나는 우습게 보았다. 단지 언어는 재현의 도구이므로 무슨 말을 하던 하나의 본질을 각자의 방법으로 오독하고 있는 것이고, 실재의 실제는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것이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전혀 고정관념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고정관념들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어떠한가?

실체를 가정한 개념의 존재가 그저 공백과 맞닿아 있는 실재일 뿐, 그 어디에도 실체는 없다.

사랑이라는 실체가 있는가? 우울증이라는 실체가 있는가?

이 것 보다 세계가 환각적이라는 증거가 있을까?

내 신체가 존재하듯이, 개념들의 존재도 실재의 감각을 실제의 감각으로 파악한 것이다.

 

즉 무의식이라는 말이 없으면, 무의식도 없다. 우울증이라는 말이 없으면 우울증이 없듯이, 인간이 만든 언어게임, 대타자가 만든 언어게임 속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우리는 들끊는 타자속의 자신을 어떻게 주체라고 오인하게 된걸까. 교묘하게 은폐된 권력의 언어(상징계)때문이다. 사물과 언어가 일치할 수 없듯이 신체와 언어는 같을 수가 없다.

이 둘을 분리하여 생각해 내는 데 까지는 수없이 나의 고정관념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라깡은 이제 무의식은 간극이라고 말하고, 주체역시 간극이라고 말한다.

무의식이라는 개념 역시 무의식이라는 실재가 먼저 있는 것이니라,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면서 어떤 도약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도약을 감행하게 되었을까?

 

아무리 들여다 봐도 이것은 어떤 비약처럼 들린다.

무의식이 실재라니, 그것은 개념이 만들어낸 거짓말인가?

개념이 정교화한 환각인가?

 

여기서 라깡에 따르면 이를 설명하기 위해 원인의 참조점에 대해 얘기한다.

라깡은 무의식의 개념을 알기위해 원인기능을 참조점으로 삼으려고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참고로 칸트을 끌어 들인다. 칸트는 이성의 준칙이 어떤 비교, 등가성이라면, 이성이라는 것이 a와 b의 비교, 또는 a는 b와 같은 것이라고 할 때 원인은 알 수 없는 것이 되어 어떤 간극이 남아있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칸트가 순수이성에 말한 이성의 준칙이 비교나 등가성에 있다면 원인은 결국 분석 될 수 없는 개념이면 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 원인에 특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구멍, 틈새, 간극 속에서 그는 무엇을 발견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실현되지 않은 것의 차원에 속하는 어떤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이어 “처음 무의식은 우리에게 ’태어나지 않은 것‘의 영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 나타납니다. 억압이 그러한 영역속에 무엇인가를 쏟아붓는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이는 낙태전문 산파와 림보과 관계 같은 것입니다. ”

 

무의식이 태어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억압의 문법을 가지고 있다면, 그 태어나지 않은 영역의 구멍들에 대해, 간극들의 출현은 어설피 이해가 가기도 한다.

 

라깡은 이어 무의식이 신경증을 결정한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면서, 무의식은 우리에게 간극을 보여주며 이 간극에 실재에 연결되게 만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어 “비현실적, 탈현실적인 것이 아닌 실현되지 않은 것의 영역 속에서 환기되어야 합니다.

분석가가 누군가에게 있는 악령들을 미처 빛이 있는 곳으로 끌어내지 못한채 그들의 세계를 환기시켰다면 아마도 분석가는 그 누군가에 의해 실재적으로 괴롭힘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 문장은 모호하다.

 

내담자의 무의식에 의해 분석가는 실재적으로 괴롭힘을 당한다니 무슨 얘기인 것일까. 아마도 분석가도 미처 끌어내지 못한 내담자의 무의식이 분석가의 무의식을 괴롭힌다는 말은 아닐까.

 

이어 라깡은 주체에 관해서도 간극이라고 말하고 있다.

 

라깡의 주체이론

 

라깡은 주체를 하나의 기표체계로부터 다른 하나의 기표체계에로 도약하는 사건적 운동으로 간주하고 주체란 개념과 개념사이를 도약하는 운동 그 자체이며, 상징계의 한계점에서 극한으로의 이행이 필요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백상현 교수는 주체는 무의식과 의식이 들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주체는 그 둘 사이 즉 분열 그 자체이며, 균열 그 자체이며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주체를 사건과 대응시키다니 기발하다. 이 또한 고정관념의 빗장을 여는 행위로 보인다.

 

저자는 “주체성의 절차란 외부의 대상쪽에서 출발하여 나라는 환영적 자아를 찾아오는 순간이다.”이라고 말한다. 증상의 방문이라고 해야 할까. 정리하자며, 주체 = 타자의 타자인 증상의 영역= 큰사물= 대상a = 실재의 영역 = 사건이 곧 주체이다.

 

백상현 교수의 따르면 “ 실재에 대응하는 주체라는 개념은 바로 이와 같이 극한으로의 이행을 위한 도약이 가능한 사건적 균열의 순간을 통해 주체를 다시 파악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 그것은 선택의 순간인 동시에 망설이는 주이상스의 순간이다. ” 이라고 말하는 데 증상을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가의 문제를 지적한 것일까? 이어 그는 “경사각의 사건”이 그곳에 있다고 말한다.

간극이 무엇인가를 선택할 수는 없을 텐데, 주체가 간극을 통해 자신을 재구조화하는 주체적 선택을 암시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무의식이 간극이라면, 그리고 증상을 보존하여 그 간극을 넓히는 작업을 하는 것이 정신분석이라고 할 때, 타자를 뺀 나머지의 헛디딤이 주체가 된다. 주체가 증상 그 자체가 되어버리면 어떨까. 균열을 넓 히면 주체의 범위는 커질 수 있을까. 벌어진 균열에서 새로운 주체를 창안하지 못한다면 또 우울증이라는 실제의 죽음이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헛디딤, 실패, 균열, 말해진 문장이든 쓰인 문장이든 그 속에서 무엇인가가 발을 헛디디게 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현상에 이끌려 바로 그곳에서 무의식을 찾게 되지요. 거기서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이 실현되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이한 시간성을 갖고 있습니다.” 라깡이 말하는 이 기이한 시간성이란 무엇일까.

 

뜻밖의 것

 

라깡은 무의식에서 우리가 뜻밖의 것에 압도당함을 느끼며, 이러한 발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곧 재발견이 되어버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발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곧 재발견이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그것은 상실의 차원을 수립하면서 항상 다시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지요.”

상징화를 시도하는 동시에 물러나 버리는 실재라고 이해해보지만, 상실의 차원을 수립한다는 것이 무슨의미일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라깡의 강의 말미에 이해가 어려운 문장이 하나 더 있어 언급하고자 한다.

“무의식은 사랑속에서 일어나는 것과 정반대 사랑은 언제나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은 하나를 잃으면 열을 되찾는다. ”

이 문장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랑의 맹목성에 관해서라고 얘기한 것이라면 너무 상상계적 비약인가?

 

증상이 말을 할 때(주체-실재)

 

이제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이 말을 한다. 가볍게는 뒷골이 땡기는 증상, 필터링 없는 제스쳐.

버거운 일상이 지속되면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여기저기 신호들로 가득찬 신체가 되어버리고 만다.

마치 무질서한 신호들로 인해 체증이 난 듯 고장 나버리고 만다. 미친 기표연쇄는 머릿속에서 반복되고 신호등들은 쉼없이 깜박거린다. 여기저기 균열들이 즐비해지고 널널해진 구멍들을 채울 환각도 바닥이 나면, 나는 하루라도 빨리, 시간이 훅 가버렸으면 늙은 나를, 시체안치소에 누워있는 나를 상상하면서, 이 허공에 보이지 않는 침을 뱉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외친다. 증상의 귀환을 환대하자.

이것이 증상이 될지 불만이 될지는 주체가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매일 팔루스의 장례식을 치르지 않으면, 주체의 존재을 증명할 길이 없다.

이번 발제문도 저번과 같이 매우 쓰기 어려웠지만, 다시 한 번 절벽에서 뛰어내릴 욕망의 시발점이 되기를 무신론자로서 기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