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구성된 어떤 철자 교본
전정계 이상
나의 병명이다. 그리고 숨겨진 병명은 뇌진탕이다.
뇌가 과부하가 걸릴 정도로 내가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미디어에 노출되어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스마트폰을 보거나,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끊임없이 나는 새로운 정보 속에 잠겨있다. 어쩌면 지식을 구하는 나의 방식이 문제였던걸까? 한 번에 깊이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a와 비슷한 a'를 기억하고 연결하는 과정 안에서 a에 대한 지식을 불현듯 경험한다. a를 깊게 사유하는 것은 응시 속 자괴감이(왜 이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가!) 함께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a의 주변을 탐색하거나, 전혀 다른 b를 경험하면서 a에 대한 지식이 드러나길 바라는 얌체 같은 공부는 큰 고통없이 잉여적인 즐거움을 통해 노고없이 취할 수 있다. 그대신 언제나 제자리라는 난점이 있다. 지금도 나는 텍스트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고, 일단 꿈의 해석에서 해당 내용을 읽고 필사를 해본다. 질베러와 존스가 나오는 부분만 읽었는데, 상징, 기능적표현, 이차가공과 같은 개념들이 나온다. 이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해야 되는 개념 같다.
이번에 ‘병’을 앓으면서 죽고싶었던 심정에서, 이 병이 나으니까 마치 신의 은총을 온몸으로 받은 듯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꺅텔 선생님들을 비롯해서 주변 사람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복이 많다. 호의(선의)는 왜 사람을 변하게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이 역시 우리가 잊고 있던 무조건적인 사랑의 경험, 세상에 태어나 돌봄을 받았었던 그 사랑의 반복의 기억이 회귀한 것이 아닐까. 레비나스가 ‘타자의 환대’는 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역병처럼 퍼져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먼저 상징이란 무엇인가? 상징에 대해 한 가지고 있는 내 관념들과 라깡이 말하는 ‘상징’과의 틈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은유와 환유가 무척이나 헷갈렸다. 은유는 한 번만 일어나고 환유는 끝없이 일어난다는 명제는 마치 실재를 대체하는 주인시니피앙은 하나이고, 이 하나는 다른 하나에 의해 대체되면서 의미를 획득한다는 간단한 설명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주인 시니피앙은 고약하다. 나를 전**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전**’이라는 기표로 쓸 수는 있지만 이것을 주인기표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이름이 나의 주인기표라면 이렇게 쉬운 설명을 놔두고 왜 이렇게 복잡하게 계속해서 설명을 하겠는가?
실재와 ‘전**' 사이의 주인기표는 오늘의 나를 사로잡은 중심구조이다. 어떤 특이성, ‘단일한 특색’이라고 프로이트가 표현하기도 한다. 이러한 은유에 의한 상징성을 환유로만 대체하려는 노력에 대해서 라깡은 계속 지적한다. 상징이 재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실재인가? 실재를 재현한 것이라면 은유적인 것이고, 은유된 상징을 의미로 환원하는 것이 환유일 것이다. 질베러와 존스는 상징을 ‘해석학화’, ‘심리학화’ 로 환유하는 작업에 대해 라깡은 비판적 입장이다. 하는 듯하다.
천겹의 케이크
먼저 텍스트에 등장하는 프로이트 『꿈의 해석』 <묘사가능성의 고려> 편에서 질베러의 예시를 옮겨본다. 질베러는 상징의 역사적 영향에서 생겨나는 것을 묘사하려 했다. 질베러는 그러한 영향을 “물질적 현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그러한 영향이 심리적 상태를 규정하고, 어떤 경향을 구성하는 기능을 행하는 것으로 한정된다. 라깡은 “기능적 현상”을 “물질적인 것에서 다시 되찾는 기능”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현상이 상징하는 것은 ‘가공된 구조’로 보았다.
사례1 : 나는 논문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상징 : 내가 나무토막을 매끄럽게 대패질하는 모습이 보인다.
사례5
나는 계획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연구의 목적을 머리에 떠올리려 한다. 그 목적은 존재의 근저를 추적하면서 좀 더 높은 의식의 형태나 존재층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다.
상징
나는 한 조각을 떼어 내려는 듯 긴 칼을 케이크 밑으로 밀어 넣는다.
해석
칼을 다루는 내 움직임은 문제의 <뚫고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상징의 근거를 해명하면 이렇다. 때때로 식탁에서 케이크를 잘 나누는 일은 내 몫이다. 나는 길고 유연한 칼을 이용하는데, 적잖이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특히 잘라낸 케이크를 부스러지지 않도록 들어내는 일이 쉽지 않으며, 들어내고자 하는 케이크 조간 <밑으로 > 칼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어야 한다. 그러나 이 형상에는 그 이상의 상징이 있다. 상징인 케이크는 도보스 케이크, 즉 자르기 위해서 칼이 여러<층> 뚫고 들어가야 하는 케이크이다. (의식과 사고의 여러층)
프로이트는 이러한 겹겹을 통과하는 꿈들이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꿈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식인들의 사고생활에서 이러한 종류의 위장이 꿈-사고의 묘사에 자주 이용’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런 상징들의 대체는 전혀 독창적이지도 않으며, 검열에 벗어나는 묘사가능성의 경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꿈-작업은 무의식적 사고 속에 이미 닦여있는 길만 간다는 것이다. 또한 성적 상징 역시 평범한 것으로 숨긴다.(예를 들면 교각과 기둥같은)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히스테리 징후를 전혀 해석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또한 “꿈-작업에서 정신히 특별히 상징화하는 활동을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으며, 꿈은 무의식적 사고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상징화를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묘사 가능한 데다가 대부분 검열에서 벗어날 수 있어 꿈-형성의 요구를 더욱 잘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꿈해몽은 대타자의 담화라는 증거이다. 개인의 내밀한 꿈들이 인터넷에 다 나와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라깡은 천개의 겹의 케이크 꿈은 주체로서 존재의 품격을 유지, 즉 깨어있는 수준의 생각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케이크를 둘러싼 투쟁(잘 자르기 위한 노력)으로 대체된 것이며, 또한 현상이 매혹적인 것은 프로이트적 발견이 ‘심리학의 재정복’에 나선다는 것이다. 복잡한 사고가 단순한 형상으로 변환된다는 것으로 심리학의 재정복으로 본것인지 잘모르겠다.
한편, 라깡은 존스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융이 정신분석을 벗어나게 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것은 “사물은 언제나 거기 있고, 그로부터 사물이 꼬리표를 갖게 된다는 것” 바로 “정신분석의 해석학화”이다. 융은 정신분석을 해석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상징은 형상화된 의미에 불과한 것이 되자마자 자신이 형상화하는 것에 양보하게 된다.” 상징은 의미로 환원되자마자 자신이 형상화에 불과한 어떤 것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럼 상징이 형상화에 양보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깡은 이를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 베일을 쓰고 회귀한다는 것이다. 라깡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베일을 쓰고 나타났는데, 우리는 그 베일을 상징으로 치환함에 그치면서 즉, 실재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능적 현상
라깡은 이차가공은 불합리하고, 내밀성 속에 기입되어야 하기 때문에 모든 형태를 결여한다. 그래서 존스는 1916년에 이차 가공을 프로이트와의 “사적인 서신 교환”에 준거시키니다. 하지만 꿈의 해석 1914판에 추가된 “기능적 현상”에 관한 내용에서 이차 가공은 관계 없는 듯하면서 제시되었던 것이다.
라깡은 기능적 현상이 의심의 여지없이 “특별히 철학적이고 내성적 유형의”의 정신과 관계된다고 보는 관점에 대해, 정신들이 무의식의 효과들에서 벗어나게 해주기에 철학적 사고가 충분한지 조소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이 기능적 현상은 욕망(리비도 또는 성적인것으로서의 욕망)의 효과가 아니므로, 프로이트의 꿈 분석을 좌초시킨다.
조금 더 꿈의 해석을 살펴보자면,
프로이트는 앨리스는 꿈의 세계에서 재미있는 비유를 이용해 그 기능을 묘사한다.
< 우리는 실제로 이러한 사태를 잠자는 의식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저기 우리 주인이 오고 있다. 이성과 논리 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깨어있는 의식 말이야. 서둘러라. 어떻게 배열하든 상관없으니 빨리 정리해라. 그가 들어와 무대를 독점하기 전에>
프로이트는 수면 중 떠오르는 사고에서 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깨어있는 동안의 사고활동에 있다고 보았다. 라깡은 질베러의 섬세하게 관찰하여 꿈-작업에 기여한 새로운 내용을 이차가공에 대한 논의에 덧붙인다.
“질베러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피곤해 잠에 취한 상태에서 억지로 정신적 활동을 함으로써 사고가 형상으로 바뀌는 현장을 포착했다. 그 순간에 가공된 사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추상적 사고의 대체물로 밝혀진 환영이 나타났다. 질베러는 이를 <재료 중심의 현상>과 구별하기 위해 <기능적 현상>이라고 불렀다.”
프로이트의 사례를 살펴보자
(조건) 아침에 잠에서 깨어날 때 나는 어느정도 잠에 깊이 취한 가운데, 방금 꾼 꿈에 관해 생각하는 동시에 미진한 부분을 마저 꿈꾸려고 하면서 깨어있는 의식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장면) 나는 시냇물을 건너기 위해 한 발을 내딛는다. 그러나 이내 다시 발을 빼고 이쪽에 머물려고 한다.
이 기능적 현상을 라깡은 “물질적인 것에서 다시 되찾는 기능”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이는 ‘실재 속에 어떤 문턱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다. 낮의 잔재들이 꿈에 개입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이러한 ‘이차가공’이 재료를 자유분방하게 다루었으며, 원재료상의 관계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보았다. “이것들은 말하자면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 해석 하기 이전에 벌써 한 번 해석이 이루어진 꿈들이다.”
프로이트는 꿈-내용의 이차가공과 꿈-작업요인의 사이의 관계에서 꿈이 충족시켜야할 조건들 가운데 하나를 처음부터 제시하며, 이 조건은 압축, 저항 검열, 묘사가능성의 조건들처럼 많은 꿈-사고 재료인 동시에 영향을 미치고 선택에 개입한다고 본다.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라깡은 프로이트가 과학으로 정립하려했던 것을 라깡은 실재와의 관계에서 상징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과 구분하려고 했다. 이 구분은 실재 속에 어떤 문턱들을 설정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사실상 ‘상징적 구조화는 상상적인 것을 실재와 분리시키면서 자신의 재료를 찾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상징적 구조화는 또한 스스로를 주체에 대한 시니피앙의 관계 또는 우선적으로 상상적인 것으로 실추시키는 것으로 평가받는 도식 체계로 제시하면서, 실재 그 자체를 분해한다.
이러한 접근의 엄밀성이 또 다른 매듭에서 대상a가 드러나는 이차적 의사론에 가닿기 위해 요청된다고 할때, 존스는 거기에 가닿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라깡의 범주들이 결핍되어 있음을 정확히 알아차렸으며,
프로이트가 과학성이 관건이 될 때 자신의 장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실수 없는 확실성을 위해 그러한 범주들을 사용한다는 것을 논증해야 한다고 라깡은 말한다.
여기서 상징적 구조화란 상상적인 것으로 실추되는 도식체계이므로 실재는 분절된다. 그러한 접근이 필요는 하지만, 존스는 상상적인 도식화에 머물뿐이라는 스스로가 가지고 있었다고 라깡은 본다.
라깡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도 문턱이라는 은유를 통해 실재 속 어디서건 포착될 수 이 있는 돌출부를 상상하거나, 하물며 어떤 것이건 심리적인 장 또는 단순한 표상의 장을 층화된 것으로, 다시 말해 통일된 것으로 구성시켜주는 얇은 판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상징으로서의 문턱이, 또는 보다 제대로 말한다면 집, 성상안치소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는 지점이나 말해질 수 없는 바깥을 규정하는 시니피앙인 문턱이 물질적으로 밭에 놓여있는 납작한 돌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라깡은 실재를 넘어가는 문턱을 은유를 통해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실재를 은유하는 주인기표를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영역에 걸친 상징성으로 똑같이 무거워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느낌의 문턱들을 “기능적 현상들”로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쓸데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존스 역시 이점을 간파하고 있었으며, ‘정신분석적 사고의 절제’라는 존스의 호소를 다시 한 번 평가해 봐야한다고 말한다. 존스가 은유의 형상화를 상징성의 구체성에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러한 호소를 약화시키는 점은 존스의 한계임을 지적한다.
“결국 원시성, 의고주의, 무차별성, 게다가 신경학적 해체를 상징성의 몫으로 도리면서 오로지 종합 기능의 잠재성이 보이는 쪽으로만 모여드는 모든 허구가 힘과 노고를 취하는 것은 바로 이 구체성으로부터이다. 사람들이 구체성에 종합 기능의 잠재력을 덧붙이는 것은 신비적이라는 명목으로 오류에 모자를 씌우는 것에 불과하다. 1916년에 이 이차적 영토에서 칼을 휘두르면서 존스는 명백히 승리한다.”
그러나 라깡은 존스가 ‘심리학화’하는 위험에 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용서하자고 말한다. 당시 심리학화되고 있는 활동가들의 언어속에서 라깡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 언어에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스는 금언집과 같은 안나프로이트가 아닌 클라인을 지지했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는 여성의 남근적 단계에 대한 그가 지배했던 논쟁이 관건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라깡은 “존스를 대신해 상징들을 무의식 속에 묶어 놓은 “일차관념들”에 대한 자기 목록의 중요성에 대해 그가 침묵을 지킨 놀라운 사실을 부각시키려 하며, 결국 구체적인 진정한 상징의 기초짓는다는 그의 말에 근거해 이 목록(일차관념)을 밀고 나가면 그의 말의 허위성만 더 잘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라깡은 그런 관념들 모두가 구체성을 결여하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주인기표는 구체적인 단어로 말해질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실재 속에서 오직 시니피앙에 의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관념들이 현실을 정립하는 것은 현실을 죽음, 욕망, 아버지-의-이름 같은 비실재적인 것의 토대 위에 세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라깡은 상징적 기능이 매듭을 이루는 지점 즉, ‘자기자리의 결여’가 구성하는 ‘결여의 자리’에 상징이 도래하는 지점에 대해 결여의 자리는 상징의 모든 놀이를 구성시키는 자리바꿈의 차원의 출발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라깡은 논리적 구조를 더 멀리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은, 독자들이 그 구조의 기초적 짜임새에 대해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고, 라깡의 수사학은 교육적 효과를 위한 것임을 밝힌다.
“내가 말하는 저항은 상상적인 것 속에서 벌어진는 것이다. 나는 정신분석에 첫걸을 내딛으면서 거울 단계속에서 상상적인 것에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 후 상징성에 정확한 자리를 부여할 수 있었다.”
상징의 혼란
라깡은 상징에서 혼란이 초래되는 것은 상상적인 것이 때문이며, 상징은 하나의 관념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상징적인 것은 하나의 환상도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라깡은 ‘상상적인 것에 실재의 역할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내가 그처럼 시도하고 있듯이, 상징적 생각은 과학적 생각과의 관계속에서 주체를 정립하기 위해 상징성을 간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일상 언어에서 수학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상징성을 위치키시킬수 있는 것은 결코 생각의 과소가치의 명목으로도 또 주체의 낙후성이나 발달의 뒤쳐짐의 명목으로도 아니다. 게다가 정신적 기능의 해체라는 명목으로도 아니며, 보다 부조리하게는 자동반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은유의 명목으로도 아니다.”
“정신분석은 상징성을 진리효과를 귀착시키는 특권을 갖는다.” 라깡은 정신분석에서 상징을 진리효과로 간주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여기서의 상징은 분석상황에서 떠오르는 기표일 것이다. 이 기표는 ‘알려질 수 없는 카운터파트처럼 자신의 매듭 속에 위치’시킨다. (진리효과가 된다) 거기서 ‘매듭’이 의미하는 것은 시니피앙이 주체 속에서 만들어내는 분열이다. 라깡은 그것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진짜 매듭’이다. 이 기준에서 볼 때 ‘기능적 현상의 매듭은 가짜 매듭’이다. 존스가 이 매듭이 진짜 매듭을 되풀이 한다고 상상한 것은 괜히 그런게 아니었다. 하지만 이 가짜 매듭을 푼다고 해서 진짜 매듭을 더 잘 다루게 되는 건 아니다. 상징의 구조는 우리가 풀 수 없는 매듭이다. 이 상징의 구조는 무언가가 매듭을 자르지 않는 이상 식별할 수 없다.” (1966년)
상징의 구조는 S1이다. 상징이 S1이라고 말할 수 는 없지만, 상징의 구조는 주인기표라고 말할 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이 주인기표와 주체와의 관계가 어떤 ‘매듭’일 것이다. 이 구조는 우리가 풀 수 없는 매듭이라는 의미는 상징의 구조를 언어로 풀어낼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 구조를 변경하기도 어렵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이 매듭을 어떻게 풀어내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무언가가 매듭을 잘라내야 한다고 말한다. 위에 거론한 것처럼 매듭이 시니피앙이 주체 속에서 만들어낸 분열이라면, 그 무언가는 바로 ‘시니피앙의 거세’가 아닐까. 주체의 분열이라는 카오스의 엔트로피를 0으로 수렴하게 하는 ‘환상의 횡단’이 아닐까.
(2022.10.16.)에크리 발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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