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욕망은 상실에 대한 일종의 은유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은 상실은 의미를 빠져나가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욕망을 추구한다해도 그 욕망의 속성은 텅비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욕망의 기표는 기표일 뿐 우리의 상실을 보상할 만한 충만함은 없기 때문이다. 잉여향유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피가 식는다. 열정의 연기를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정신분석의 애초의 가정인 " 우리는 잃어버렸다!" 그 침통함이 우리의 삶의 기름이라는 아이러니.
도대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나는 끊임없이 채우려고만 할까? 주이상스라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무의식만 기억하고 있는 것, 그 것.
라깡 정신분석의 특이점인 양면성, 억압이 없으면 충동이 없다는 역설은 언어가 없으면 주이상스도 없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언어가 계속해서 문제이다.
얼마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왜 나는 모든 것을 규정하지 않고 견딜 수가 없는가. 특히 타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가 생각해 보았다. 그 의미의 쾌락을 섭취하려고 그러는 것일까? 의미로 부터 얻은 쾌락보다 불안을 감소하려는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이트의 쾌락원칙은 긴장과 흥분의 감소를 통한 안정성을 추구한다. 즉, 나는 의미라는 현실원칙으로 어떠한 안정성을 추구하려는 경향, 즉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가로지름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것을 규정하여 잠시 잠깐 안정을 찾는다고 해도, 이내 그 모든 것들은 흔들리고, 좌초된다.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이 두가지 원칙은 사실, 무의식적 주체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기능일 뿐이다. 오히려 억압으로 인해 '상실'의 기억을 소환할 뿐이 아닌가. 그 상실의 기억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우리를 죽음충동으로 이끌다. 이러한 반복강박은 '상실'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죽음충동으로 이르는 반복강박의 원인인 실재, 그리고 대상a는 과연 우리의 목숨과 바꿀 수 있는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공백이라며... ?
나는 이 '상실' 역시 타자적인 것이 아닌지 오랜시간 의심해 왔다. 주이상스 역시 환각일 뿐, 거기에 우리의 리비도가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그러나 주이상스를 거세한 언어는 더 큰 환각이자, 인간에게는 무지막지한 족쇄이다.
차라리 공백의 내기를 거는 편이 우리 인생에 도움에 된다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언어의 집에서 우리는 빠져나갈 수는 없다. 지금 이렇게 쓰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 언어의 집에서 우리는 언어의 배치, 구멍의 조절을 통해, 다시 우리자신의 상실을 다른 방식으로 발명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공백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의식을 만나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실한 것을 기억하는 방식, 즉 증상은 상실의 표지이다. 우발성에 의해 우리의 각자의 고유한 표지를 반복하면서 산다. 물론 우리는 상실된 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임상에서는 근본환상을 기억해 냄으로 우리가 어떻게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신화를 만드는지 탐색한다. 문제는 그 상실된 것이 돌아와서 우리의 현실을 망가뜨리고, 고통스럽게 할 때이다. 그때 우리는 다시 상실을 발명해야한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근본환상이 아니라, 실재이고, 공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이 기표에 의해 은유되었던 사태는 공백 속에서 다시 발명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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