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프로이트 나르시시즘

untold 2023. 6. 5. 10:37

 

나르시시스트는 흔히 ‘자기애’가 많은 사람들을 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성격장애의 일종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 같다.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외모, 능력과 같은 어떠한 이유를 들어 지나치게 자기 자신이 뛰어나다고 믿거나, 자기중심적 성격과 행동을 보이는 양상을 보인다. 우리 주변에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이기도 하지만, 이들은 항상 자기애에 빠져있는 것 같지는 않다. 상대적인 비교 속에서 자신에 대해 곤두박질 치는 경우도 있다. 또, 나르시시즘이 심한 경우는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심리적 태도는 프로이트가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르시시즘에 관한 연구는 「편집증 환자 슈레버」의 세 번째 장과 「토템과 터부」 세 번째 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인간의 성적발달에서 나르시시즘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함을 이론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이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에서는 <리비도 이론>을 살펴보면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성흥분 분야에서 일어나는 과정과 변화의 척도로 쓰일 수 있는 양적으로 가변적인 힘’으로 정의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는 정신 과정 전반의 에너지, ‘양’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냈고, 그것의 정신적 표현을 <자아리비도> 라 부르고자 했다. 그러나 자아 리비도는 성 대상에 집중할 때만 즉 <대상리비도> 될 때에만 분석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 대상에 고착되거나 또는 그것을 포기할 때, 리비도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소멸에 이른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대상에서 물러났을 때는 특이한 긴장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는 자아로 이끌리고, 그렇게 해서 다시 자아 리비도가 된다. 대상리비도와 대조적으로 자아리비도를 <자기애적인> 리비도라고 한다.” 언급한다. 여기에서 프로이트는 대상리비도가 일시적으로 소멸할 때, 자아로 리비도가 옮겨간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서도 프로이트는 융의 리비도의 개념을 비판하고 있는데 융은 리비도를 ‘실제의 본능적인 힘과 동일시’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편집증 환자 슈레버」에서 나르시시즘 연구는 다음과 같다.

슈레버는 <자기가 세상을 구원하여, 잃어버렸던 천국의 행복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우선 여자로 변형되어야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망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를 거세망상과 구원자 관념이 연결되어 자기가 거세를 감수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자가 성애적 단계에서 대상-사랑의 단계로 발달해 나가는 중에 지나가게 되는 한 단계에 특별히 주목한다. 이 단계는 ‘자기애’라는 단계이다. 이는 사람의 발달과정에는 그가 사랑-대상을 얻기 위해 자기의 성적 본능을 통합하는 시기가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몸을 사랑-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선택하는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 상태에서 보통 이상으로 길게 머물러 그 단계의 특징이 발달 단계 후반에 까지 남아 있다고 보았다. 처음의 자기애의 대상은 ‘성기’이고, 그 후 그의 성기와 비슷한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동성을 선택하고, 그 후 이성애 적으로 성이 발달한다고 보았다. 동성애는 그들이 택하는 대상이 같은 성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성애적인 대상-선정의 단계라고 동성애적 경향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성적인 목표물에서 벗어 다른 사용처로 쓰인다. 프로이트는 자아-본능의 부분들과 합쳐져서 <부착되는> 요소서 사회적인 본능을 조성하는 것을 돕는다. 3년 후에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의 서론에서 <성적본능은 처음에는 자아-본능에 부착되어 있다>고 견해를 밝혔다.

 

「토템과 터부」 에서는 프로이트는 개인의 리비도의 경향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을 기술한다. 그것은 성적 충동의 표시가 처음부터 그 주체에 의해 인식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부의 대상을 향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성욕이 지니는 개개의 충동인자가 자기육체를 통해서 쾌락을 획득하고 만족을 얻으려하는데, 이를 <자가성애> 라고 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것이 바로 대상 선택의 단계이다. 프로이트는 자가성애 단계 이후에 분리되었던 성 충동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대상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외적인 것, 개인과는 연고가 없는게 아니라 그 시기에 구성되는 자기자신의 자아이다. 프로이트는 뒤에 검토하게 될 이러한 상태의 병리적 고착을 염두해 두고 이를 <자기애> 단계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리비도를 위한 외적 대상을 찾아낸 뒤로도 어느 정도는 전과 다름없이 자기애 상태를 유지한다. <대상리비도 집중>은 말하자면 자아에 잔류하는 리비도의 방출이다.

 

프로이트는 여러 논문을 통하여 자기애의 단계에서 대상애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의 발달과정이라고 본 것 같다. 자기애는 대상애로 옮겨간다고 해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대상애의 소멸시 자신에게 다시 집중된다고 보았다. 이는 애도와 멜랑꼴리에서 상실한 대상에 대한 리비도가 자신에게 투여될 때, 우울증상이 발현된다는 입장과 나르시시즘의 자기애착은 동일한 리비도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심리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르시시즘은 성도착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가 네케가 자신의 몸을 성적 대상을 대하듯 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지칭하여 처음 사용되었으나, 이는 성도착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적 관찰을 통해 본 나르시시즘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고 보았다. 나아가 나르시시즘은 인간의 정상적인 성적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태도 일 수 있다는 추측을 가정했다.

왜냐하면 신경증 환자들이 보여주는 나르시스적 태도가 정신분석 작업을 매우 어렵게 하는 것을 보면, 이는 성도착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자기 보존 본능이라는 이기주의를 리비도가 보완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가들의 나르시시즘의 연구의 동기는 조발성치매(조기치매, 알츠하이머병)와 정신분열증을 리비도의 이론으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에서 생겨났다. 프로이트는 두 가지 특성이 이들에게서 발견했는데, 하나는 과대망상증과 또 하나는 외부세계에 대한 외면이다. 외부세계의 외면은 치료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또한 히스테리와 강박신경증 환자 역시 증상이 심하면 현실과의 관계를 포기한다. 그러나 그런 환자들은 사람이나 사물과의 성애적 관계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환상 속에서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상상의 대상으로 대체하거나, 현실적 대상을 상상의 대상과 뒤섞어 버린다.

정신병은 자신의 리비도를 외부 세계의 사람이나 사물에서 철수시킨다. 그리고 환상으로 대체하지 않는다. 그럼 철수된 리비도는 어떻게 되는가? 프로이트는 정신분열증의 ‘과대망상’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과대 망상 그 자체는 새롭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한 상태가 확대되고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 결과이다. 프로이트는 대상 리비도 집중의 후퇴로 생겨난 나르시시즘을 갖가지 영향으로 잠복해 버린 근원적인 나르시시즘 위에 첨가된 부차적인 나르시시즘으로 파악한다.

 

프로이트는 어린이와 원시인의 예를 통해 리비도 이론을 확장한다.

원시인들의 그들의 소망과 정신 작용에 대한 과대평가, 사고의 전능성, 언어에는 마술의 힘이 있다는 믿음, 마술이 있으며, 어린아이들도 이와 흡사한 태도가 있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사람에게는 자아를 향한 리비도의 집중이 존재하며, 그중 일부가 나중에 대상을 향해 발현된다’

프로이트는 ‘대상을 향했다가 되돌아오는 그런 리비도의 상태’에 주목했다. 또한 ‘자아리비도와 대상 리비도 사이를 대조’하였다.

 

“어느 한쪽의 리비도가 많이 발현되면 다른 쪽을 향한 리비도는 그만큼 부족하게 된다. 이는 사람의 성숙단계에서 사랑을 할 때 대상 리비도가 크게 발현된다. 자기자신을 포기하고 대상을 향해 리비도를 집중시키는 것이다. ” 반면에 그는 편집증의 <세계종말>과 같은 환상은 그와 반대로 자기자신에게 리비도를 집중하는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대상 리비도 집중이 일어나야만 성적 에너지-리비도-와 자아 본능 에너지의 구분이 가능하다고 가정하였다.

 

프로이트의 질문

 

첫째, 우리가 지금 언급하고 있는 나르시시즘과 리비도의 초기상태인 자가 성애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

 

둘째, 만일 근원적인 리비도의 발현이 자아를 향한 것임을 인정한다면 성적 리비도와 비성적 에너지인 자아 본능의 에너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정신 에너지는 동일한 종류의 에너지를 감안한다면, 자아 본능의 에너지와 자아 리비도를 구분짓고, 자아리비도와 대상 리비도를 구분 짓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애초부터 개인에게 자아와 비교될 만한 어떤 단일성을 존재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자아가 계속 발달한다고 가정된다. 그러나 자기애의 본능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나르시시즘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자기애가 무엇인가 새로운 정신 작용이 부가되어야 했다.

 

두 번째, 리비도와 자아본능의 에너지의 구분에 앞서 프로이트는 개념적 정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토로한다. 즉, 과학용어와 같이 리비도나 자아본능과 같은 용어의 정의는 쉽지않다. 사변적 이론과 경험적 해석 위에 세워진 과학의 차이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사실 자아 리비도, 자아본능 에너지 같은 개념들은 이해 되기 어려운 개념이다. 그런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거론하는 사변적 이론은 먼저 기초가 되는 개념들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들도 아니고, 내용이 풍부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런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거론하는 사변적 이론은 먼저 기초가 되는 개념들을 좀 더 명확하게 정의 내리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런데 내 생각엔 바로 그것이 사변적 이론과 경험적 해석 위에 세워진 과학의 차이점이다.

경험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과학은 사변적 이론이 지닌 장점, 즉 매끄럽고 논리적으로 흠 하나 없는 토대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개 관정 속에 더욱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거나 아니면 다른 적절한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는 그런 막연하고 상상 불가능한 개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에 만족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들은 과학의 토대가 아니며, 모든 것의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관찰만이 과학의 토대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들은 전체 구조의 토대가 아니라 상부이며, 그런 연유로 구조 자체에 아무런 손상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도 있고, 또 파기해 버려도 무방한 것들이다.

오늘 날의 물리학에서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질, 힘의 중심, 인력 등등의 물리학 개념들도 그와 유사한 정신분석학의 개념들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 용어의 모호함>

 

본능과 그변화에서 프로이튼 개념의 설정에 대해서 설명한다.

본능을 <정신과 육체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개념으로, 신체 기관 내에서 발생하여 정신에 도달하는 심리적 대표자> 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과학은 명료하면서도 분명하게 정의된 기본 개념들을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는 주장을 듣는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런 명확한 개념 정의에서 출발하는 과학은 없다. 아주 정교한 과학에서조차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실 과학 활동의 올바른 출발은 여러 현상을 기술하고, 그 다음에 그 현상들을 분류하고 배열하여 서로의 상관관계를 밝히는데 있다. 그런데 현상을 기술하는 단계에서 이미 우리는 해당 재료에 어떤 추상적인 개념들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그런 개념들은 다른 영역에서 이끌어 낸 것이지 새로운 관찰에서 얻어 낸 것은 분명 아니다. 그리고 그런 개념들- 나중에 이 개념들이 과학의 기본 개념들이 된다- 은 해당 재료를 더 깊이 연구해 감에 따라 더더욱 없어서는 안 될 개념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처음에는 그 개념들이 어느 정도 불분명한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내용을 명료하게 규정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념들이 이런 상태에 있는 한 우리가 그 개념들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개념들을 끌어들였던, 아니 사실은 그 개념들을 적용시킬 수 밖에 없었던 관찰 재료들을 반복해서 참조하지 않을 수 없다. 따서 엄밀하게 얘기하자면, 모든 것이 자의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경험적 재료들과 의미 있는 관계- 이관계ㅔ는 우리가 그 관계를 분명하게 인지하고 증명하기 이전에 감으로 느끼는 관계이다 –를 맺음으로써 결정된 그 개념들에 달려 있을지라도, 그 개념들은 기존에 존재하는 관습과 비슷한 성격의 개념일 수밖에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찰된 재료들의 바탕을 이루는 과학적 개념을 더욱 정확하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계속되는 수정 과정을 통해 그 개념들이 어느 한 영역 전체에 도움이 되는 일관성 있는 개념들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관찰영역에 대한 더욱 철저한 연구와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실제로 그래야만 그 개념들은 더 분명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은, 지식이 발전하려면 개념의 정의가 경직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 좋은 예를 분명한 정의 확정된 기본개념들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발전해 온 물리학에서 찾을 수 있다.

 

심리학에서 이런 종류의 관습적인 기본 개념 가운데 아직까지 모호한 채로 있으면서도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 바로 본능이라는 개념이다.

 

먼저 생리학의 관점

생리학을 통해 우리는 자극이라는 개념, 그리고 외부에서 살아있는 조직(신경물질)에 가해지는 자극을 외부로 발산시키는 반사 작용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반사 작용은 자극을 받은 물질을 자극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본능과 자극은 어떤 관계 인가? 본능이란 개념을 자극이란 개념아래 포함시키고, 본능은 바로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이라고 말한다 해도 무리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본능을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과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신에 가해지는 자극에는 본능적인 자극 이외에 생리적인 자극과 유사한 자극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두의 점막이 건조하다고 느껴질 대나 위 점막이 따끔거리며 아프다는 느끼밍 들 때면 그것은 본능적인 자극인 것이다. 우리는 정신에서 작용하는 본능적인 자극과 그 밖에 다른 (생리적인) 자극을 구분하는 데 필요한 여러 자료를 구했다.

 

첫째로 본능적인 자극은 외부 세계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 내부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능적 자극은 생리적인 자극과는 다르게 정신에 작용하며, 자연히 그 자극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른 행동이 필요하다. 자극에 대해 깊이 더 깊이 따져보자. 단 한 번의 적절한 행동에 의해 자극 제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자극의 필수적인 요소는 다 다룬 셈이 될 것이다. 이런 자극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가 바로 자극의 원인 되는 대상을 자동적으로 피해 버리는 운동 신경이다. 물론 자극이 주는 충격은 반복된어 축적될 수가 있지만, 그것이 자극 제거의 과정이나 그 조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 요소는 아니다. 반면에 본응은 <순간적인 > 충격을 주는 힘으로서가 아니라 늘<지속적인> 충격을 주는 힘으로서 작용을 한다. 더욱이 본능은 외부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본능적인 것을 표현하자면 <욕구>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 욕구를 해소시키는 것이 만족이며 자연히 만족은 자극의 내적 근원을 적절하게 변화시킴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아리비도나 대상리비도 같은 개념의 가치는 그 개념들이 신경증이나 정신병 과정의 본질적인 특징들을 연구한 결과 파생된 것이라는 사실에 있다. 리비도를 자아에 고유한 리비도와 대상을 향한 리비도를 구분하는 것은 성적 본능과 자아본능을 구별 지었던 최초의 가정에서 파생된 필연적 귀결이다. 어쨌든 내가 이런 구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순수 전이 신경증(히스테리와 강박신경증)에 대한 분석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으로 그런 신경증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연구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본능 이론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깨지든 아니면 사실로 확증이 되든 어떤 가정(가설)을 그 논리적인 결론까지 끌고 가는 것이 용인되기도 하면, 때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이기도 한다.

 

물론 분화 이전의 정신에너지가 리비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에 대한 집중적인 발현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성적 본능과 자아 본능의 구별이 그 자체만으로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성적 본능과 다른 본능, 즉 자아 본능 간에는 본래 차이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것이 전이 신경증의 분석에도 유용할뿐더러 다른 점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우선 1차적으로 이런 개념의 구분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구분 짓는 배고픔과 사랑의 차이와 비슷한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런 구분에는 <생물학적>인 고려가 담겨 있다. 각 개인은 실제로는 이중의 생활을 영위한다. 하나는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는 삶이고, 또 하나는 개인의 의지에 반해서, 아니면 적어도 어쩔 수 없이 종의 연쇄 사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