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6
일독을 하기가 어려웠다.
핵심, 요점을 갈망하는 나. 나는 듣는 척하지만 다른 생각, 산물들로 가득차 있다.
12시간 쯤 흘러 다시 읽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호흡이 가능해졌다.
지금 토요일 밤 11:15 나는 몇시 쯤 이 것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잡히지 않는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미로에서 빠져나오고 싶어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주장했으나, 또 다른 미로속에 갇힌 듯 하다.
작년인가 나는 한 벽에 가득찬 흑백의 커다란 액자앞에 서있는 작은 여자아이의 꿈을 꾸었다.
그 액자의 그림은 프로이트 할아버지 였었고, 종종 등장하는 그 여자아이는 여전히 나의 무의식 속에 폭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애정을 갈망하는 어린 여자아이인 나일 것이다.
그렇게 손가락을 빨며 액자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이렇게 쓰게 되었다.
앞서 우리가 논의 했던 쾌락원칙은 어디로 다 날아갔는지, 쾌락원칙의 4장과 5장에서는 또 다른 가설을 프로이트는 내놓으면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라고 말한다.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려야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버리고 싶은 욕망이 컸지만, 프로이트의 문장에서 징검다리를 건넜다가는 다시 앞으로 귀환하여 다시 읽어야 하는 무한루프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면서 다시 천천히 계속 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아마 몇 번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무의식의 시간은 없지만 의식적 시간은 한계가 있기에 이쯤에서 글을 시작하는 것이 나으리라.
앞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인간이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속에서 과도한 쾌락을 막아 불쾌함을 느끼지 않도록 항상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으로 대체하여 우리의 일상은 불쾌를 피하는 방향으로 조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원칙은 쾌락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알리바이(도덕적 심급)를 설정하여 우리가 과도한 쾌락 즉 불쾌한 긴장에 노출되지 않도록 작동한다. 쾌락원칙만 추구한다면 환상을 반복할 뿐이므로 현실원칙의 도움으로 자아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다.
프로이트의 정신적 기능의 두 가지 원칙에 따르면 “신경증 발생의 근본 원인이 되는 정신적 기질이란 성적 본능으로 하여금 현실을 존중하도록 교육을 지연시키는 데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자가성애기간에서는 성적대상과 관련하여 노력과 기다림(만족의 지연)을 요하는 현실적인 만족보다는 좀 더 쉬운 상상적인 만족을 얻으로 성향이 장기간 유지된다.” 프로이는 ‘현실원칙은 쾌락원칙을 대체한다기 보다 보호한다고 할 수 있다고 보며, 불확실한 어떤 순간적인 쾌락은 포기되지만, 그것은 새로운 길을 통해서 나중에 더욱 확실한 쾌락을 보장받기 위함이다.’ 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교차는 자아의 안정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라깡과 프로이트의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다시 라깡의 인간학의 서두를 챙겨보았다.
“세계는 주체의 쾌락에 대한 두가지 원칙 -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적용된 결과물이다.”
“쾌락원칙은 초과된 충동을 억압하는 기능도 하지만 쾌락을 표지하는 기능과 환각을 통해 쾌락의 기억을 반복하려는 무의식적 의지를 보다 부각하며, 현실원칙은 이렇게 표지된 쾌락을 억압과 부인을 통해 무의식의 밑바닥으로 내리 누른다. 그렇게 해서 출현하는 것이 주체의 핍진한 현실인 것이다.” (26)
억압과 부인은 도덕적 담화의 형식으로 만족의 지연에 대한 알리바이로 사용되며, 이러한 기제들의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것이 라깡과 프로이트의 차이점으로 보인다.
프로이트의 의식의 해부학적 구조
“이것은 하나의 생각을, 그것이 어디로 가는지 보고 싶은 호기심에서 그것을 일관성 있게 따라가려는 시도이다. ” 마치 프로이트와 생각이 분열된 듯 그렇게 그는 시작하고 있다.
프로이트는 4장에 걸쳐 뇌과학에서 <의식>의 기원을 탐구하려고 한다.
프로이트는 의식, 전의식, 무의식, 지각-의식으로 정신기능을 분류한다.
4장에서는 의식에 관련하여 프로이트는 다소 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의식이라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면 지각-의식을 내부와 외부의 경계선으로 보고 외부자극에 대한 수용과 정신내부의 흥분(어쩌면 충동)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지각-의식>조직, (왜 굳이 조직이란 표현을 써서 문맥을 어렵게 만드는지 잘 모르겠지만) <지각-의식>은 세계와 나 사이의 피부와 같은 것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라는 의미에서.
< 의식에 관하여 >
의식이 정신과정의 보편적 속성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특수한 기능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초심리학적 관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의식이 의식이라고 기술되는 특수한 조직의 한 기능이라고 주장한다. 의식이 산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부세계로부터 오는 자극의 지각과 정신기관의 내부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쾌와 불쾌의 감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인상은 <다른> 조직에서 발생하는 모든 흥분 과정이 그 속에 기억의 기초를 형성하는 영구적 흔적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억의 흔적들은 의식화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제로 그 흔적들은 그들을 남게 한 과정이 의식화된 적이 없을 때 가장 강력하고 영속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영구적 흔적들이 <지각-의식>의 조직에 남게 된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 조직이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는 능력의 한계를 그을 것이다.
기억은 무의식적이라면 조직체 내에서 무의식적 과정의 존재를 설명해야 한다.
의식화 되는 것과 기억의 흔적을 무의식에 남겨놓는 것.
동일한 조직내에 상호 양립불가는 한 것이라고 유도된다.
흥분과정은 의식의 조직에서 의식화 되지만 뒤에 아무런 영구적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흥분은 내부에 조직체에 전달이 되고 그 흔적들은 그 조직체들 속에 남는다.
이를 프로이트는 <지각-의식>이라고 부르고 의식은 이 지각-조직 공간 속에서 한위치를 할당한다고 보고 있다. <다른> 조직에서 발생하는 흥분과정이 기억의 기초를 형성하는 영구적 흔적을 남긴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다른 조직이란 지각-의식의 아닌 의식이므로 전의식, 무의식을 뜻하는 것 같으며, 우리의 기억은 무의식으로 억압되어 있다는 상식이 이때 만들어 진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것을 의식화시키며 기억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무의식에 저장한다는 뜻으로 생각된다.
의식의 조직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 유기체의 소포 ; 외부는 자극을 받아들이는 기관의 역할. 지속적으로 자극을 준다면 본질이 영구적으로 변화 자극에 의해 철저하게 구워진 껍질이 된다.
<의식>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조직의 요소들이 흥분과정으로부터 더 이상 영구적인 변화는 겪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의식으로 떠오를 것이다.
한 요소에서 다른 요소로 옮겨가면서 흥분은 저항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 저항의 감소는 흥분의 영구적 흔적 즉 어떤 촉진현상을 가져올 것이다. 조직 의식의 요소들은 어떠한 묶인 에너지도 갖고 있지 않고 오직 자유롭게 방출할 수 있는 에너지만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색을 통해서 우리는 의식의 기원을 조직 의식의 상황과 그리고 이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흥분과정의 특성들과 어느정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구워진 껍질.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부의 에너지와 내부의 흥분, 자극이 바깥으로 닿지 않도록 의식은 방어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보호적 방패막이며, 위협적 산물에 대항해서 그 보호막 속에서 작동하는 에너지의 특수한 변형의 틀을 보존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외부의 자극을 수용할 때 우리는 표본을 체취하여 수용할 뿐 외부 전체의 자극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프로이트 말한다. 상식적으로 모든 자극을 다 수용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해는 간다.
방어를 위해 극히 견본만을 수용할 뿐이고, 이것을 더듬이의 기능과 견주어 볼수 있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그러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흥분에 대해서는 방어할 수가 없어 우리는 그것을 타자의 것을 돌리며, 이것이 투사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의식의 역할이 방어적 기능이며 방어를 위하여 리비도가 집중되어 있다고 본다.
쾌락원칙을 발견한 후 프로이트는 전쟁 외상성을 통해 쾌락원칙의 예외성을 발견하고 의구심을 갖게 된 듯 하다.
만약 트라우마와 같은 외적 자극이 대량으로 주체를 겁박해 올때는 이 시스템은 무너지고 이것을 방어하기 위해 리비도가 집중되면 다른 조직들은 피폐해지고 만다. 따라서 트라우마 전쟁 신경증에서 나타난 증상들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방어할 수 없는 의식의 <다른>조직들이 만들어 반응이다.
프로이트는 <다른 조직>들에 대해 무의식이라고 말하지는 않으나, 발제자가 이해하는 바는 무의식이라고 생각이 든다.
프로이트는 자극의 방패의 수단으로 무시간성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무의식적 정신과정이 그 자체로 무시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그 정신과정이 시간적으로 질서화 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고,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도 과정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시간의 개념이 그 것에 적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동안 무의식의 시간은 없다는 말을 백상현 교수님한테 여러번 들은 듯 싶다.
시간이 어떤 방식으로 그 흔적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시간개념이 적용 될 수 없다는 뜻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기억의 기초인 흥분의 흔적들은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새겨진 S1의 기표의 기원적 사건은 그저 거기 있을 뿐이다. 흔적은 시간 개념이 없다. 반면 의식의 시간은 흐른다.
(또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도 종종 들었던 말인데, 이것은 반복은 시간이 흐르지 않는것과 같다는 말일 것이다)
한편 민감한 외피는 또한 <내부>에서 나오는 흥분을 받아들인다.
우리의 의식은 외부는 방어하지만, 내부에 대해서는 방어할 수 없다. (견본이 아닌 통째로 전달되다)
쾌와 불쾌의 감정이 모든 외부적 자극을 압도한다.
내부의 흥분은 또 무엇인가. 감정인가? 감정은 우리를 지배한다.
이성과 상관없이 의식과 상관없이 우리는 내부에서 올라오는 감정들은 견본처럼 소량만 취할 수가 없다. 프로이트는 그러한 자극의 양을 다스리기 위해 즉, 정신적인 의미에서 그것을 묶어두는 문제를 거론하면서 대량으로 방출된 그러한 흥분을 조절하기 위해서 모든 방어적 장치를 가동한다고 말한다. 이와 동시에 쾌락원칙은 당분간 정지되고 다른 정신 기능들은 심하게 마비되거나 축소된다고 말한다.
이 방어적 장치가 ‘증상’일 것이다. 또한 이를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반대 집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리비도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리비도의 집중과 정지된 상태에서 리비도의 집중이 있다고 말한다. 트라우마에 대해 방어하기 위해 집중된 리비도는 정지된 리비도의 집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기능을 묶는 기능이 더 강한 것 같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트라우마에 사로잡히는 현상을 말하는 듯 하다.
“우리들은 항상 거대한 미지의 요소를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데 이 요소를 우리는 어떤 새로운 공식으로 엮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흥분과정은 <양적으로> 다양한 에너지를 가지고 수행될 수 있다고 생각해도 이치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또한 하나 이상의 <질>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내적 흥분, 혹은 충동이 가진 에너지가 질과 양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정신기관 속으로 흘러들어오는 에너지의 묶음은 자유롭게 흐르는 상태에서 정지된 상태로의 변화 속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가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극에 대항하는 방패에 뚫린 구멍, 그로인해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생성되는 결과에 대해 프로이트는 이해하고자 했다. 이것은 낮은 리비도의 집중과 같은 말로 트라우마는 리비도의 집중이 흩뜨러져 흥분의 양을 묶지 못하고 파열된다. 이러한 파열구로 인하여 문제점이 더 쉽게 발생한다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의 결과 나타난 것을 프로이트는 ‘불안의 부재’ 즉 준비성이 결여라고 말한다.
그래서 외성성의 꿈들이 충격에 대한 준비를 위해 그러한 꿈을 꾸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은 이전에 소망성취라는 꿈의 기능과 대치되는 것으로 쾌락원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주장한다. 이를 반복강박에 가까울 것이라고 말한다.
만약 <쾌락원칙을 넘어서>라는 것이 가능하다면, 꿈이 소망 성취라는 목적을 갖기 이전이 어떤때가 또한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사리에 맞을 것이다.
강박증이 어떤 <악마적인> 힘에 사로잡혀있다는 의미와 더불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말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이 것은 쾌락원칙의 넘어서는 것은 소망성취 이전의 목적, 큰사물의 영역을 암시하는 문장으로 보인다.
강박증, 반복강박에 대해 악마적인 힘이라고 칭하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복하고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 본능에 관하여 >
반복은 보수적이다. 회귀도 보수적이다. 우리의 본능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그것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무기물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죽음이다. 뒤를 돌아보면서 무생물체가 생물체보다 먼저 존재했다”
이에 대하여 프로이트는 생물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최초의 유기체의 발달은 의식의 존재와 마찬가지고 외부자극에 대한 방어반응으로서 기능하지만, 생식세포는 이와 다르다. 생식세포는 죽음과 생명의 탄생을 동시에 표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적본능은 에로스의 본능은 죽음에의 본능과 대립하는 역설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죽음에 대항에서 일하고 잠재적 불멸이라고 간주할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성적 본능은 잠재적 불멸로 간주해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유기체 이전의 상태로 복원하기 때문에 보수적이라고 보고 있으며, 그들이 진정한 생명본능이라고 본다. 다른 본능들과 역행해서 운행한다는 것이다.
그 두 경우 모두 본능이 맡는 역할이 의무적 변이에 국한 될 것이다. (어떤 것의 의미하는가?)
프로이트는 또한 인간이 가진 완벽에 대한 본능에 대해 거론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의 본능인가를 묻는다. 결론은 프로이트는 그것은 환상이라고 본다. 억압된 본응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요구되는 만족의 쾌락과 실제로 성취한 것의 양적 차이로 완벽에 대한 욕망일뿐이다. 에로스는 완벽을 향한 본능은 에로스의 노력의 대체물을 제공할 뿐이지 억압이 없이는 설명되기 어렵다고 말한다.
4장과 5장에 걸쳐 프로이트는 의식의 기능에 대해 설명한다. 쾌락원칙이 방어막의 기능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면 지각-의식이 쾌락원칙의 방어막으로 작동되는 장소로 생각된다.
외부의 자극은 의식에서 머물지 않고 소량만 내부로 침투하고, 내부에서 일어나는 흥분들은 억압되어 밖으로 나가려고 한다. 외부의 자극에 의한 기억의 기초가 되는 영구적 흔적들은 무의식에 남겨진다는 것. 그러한 흔적들이 대량으로 외부로 표출될 때에는 쾌락원칙의 지배를 넘어 그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속성을 프로이트는 트라우마 전쟁신경증에서 발견하게 된다. (역사적인 순간을 목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쾌락원칙을 넘어 죽음충동을 사유하게 되는 과정을 눈 앞에서 보고 있구나 하는,,)
어쩌면 라깡을 먼저 공부하고 프로이트를 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프로이트를 반드시 읽을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사유의 지도를 그려나가는데는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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