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lamelle 라멜르. 박편들 19

말과 의미의 균열

분석 때 하나의 무의식인 것 같았다는 나의 말은 지금 생각해보니, 말과 의미가 분리되었다는 느낌이다. 말과 의미가 밀착되어 있으면 정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말과 의미가 분리되었다는 것, 말이 말로만 작동하는 것은 기표의 유희.실재의 무의식 같은 것을 아닐까. 지금 생각이 든다. 다시 말과 의미가 격차가 생기는 것 같다. 말을 하면서 감정이 올라오지 않는 것 같다. 의미에 포획되지 않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이건 다른 얘기인데, 실재의 순간과 uncanny는 다른 것일까? 말이 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나는 그에게 그렇게 물어야 했다.

허영, 초라한 영혼

허영심이란 무엇일까. 가진 것이 많은 자의 허영심은 욕심이고, 없는 자의 허영심은 시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가진 그 허영심을 부추기는 것은 자본주의이다. 알지만, 인간의 허영심은 자본주의를 취향의 이름으로 변모시키고 본능적인 심미안에 대한 욕구로 변모시킨다. 가진 자들이야 마음껏 그 허영이던 심미안이던 채우겠지만, 못가진 자는 일말의 허영을 위해 다른 것을 꼭 희생해야하는 비극에 놓인다. 그래서 허영심은 초라하고 측은한 마음의 상태이기도 하다. 대개의 허영심은 물질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지적 허영심 역시 질타의 대상이 된다. 어쩌면 물질보다 정신적 허영이 더 기만적이라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지적 허영이 희생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적 허영이 속이는 것 역시 초라한 자신의 ..

세 번째 죽음

나에게 두 번째 죽음은 마포구 상수동에서 였다.라깡의 두 번째 죽음은 상징적 죽음이다.  대타자에게 벗어나기 위한 죽음이다. 그 때, 삶을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제당하는 것도 아닌 무중력의 생활이라고 할까. 도망치는 것이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끝없는 잉여향유의 미로에 갇혀있다. 한편으로는 헛헛하고, 한편으로는 막 거칠게 곤봉을 휘두르고 싶다. 이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주이상스에 대한 향수도,  결여를 채우려는 욕망도 아닌 것 같다. 나를 소모하는 세상의 물질과 멈춰있는 시간들이다. 주체, 실재의 부산물들이 다시 응집되려는 것일까. 이 파렴치한 리비도는 기어이 죽음의 머리채를 흔들고 있다.  나는 여기서 세번째 무덤을 판다. 윤리적인 고꾸라짐. ..

꿈의 재개

고속철도가 개통되었다는 소식을 보거나, 들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나는 그 고속철도에 탔는데, 어두운 터널로 들어서자 굉장한 속도로 달렸다.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는데, 가족단위였고 나는 혼자였다. 롤러코스터와 같이 고속철도는 달리다가 급강하 했는데, 발이 허공에 뜨고 얼굴에 바람이 느껴졌다. 원래 그와 같은 서늘한 스릴을 즐기는 터라 나는 무섭지 않았다. 철도가 멈추고 내리니 어느 항구마을이었다. 오래된 관광지같은데, 불결한 시장도 함께 있었다. 한 여경찰이 볏짚을 들어 거기 쥐똥을 보여줬다. 그리고 가다가 죽은 비둘기도 보였다. 나는 낡은 호텔에서 씻고 가려고 했는데, 어떤 여자가 양말을 잔뜩들고 나와 부딪혔다. 그녀는 오늘 양말을 많이 얻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짝의 양말을 어..

상식을 넘어선 현실계(니콜라스 플루리)

언표 행위는 향락 그 자체일 수 있다. 향락(jouissance) 쾌락과 고통을 넘는 것. 인간의 각각 개별적이고 특이적 형태. 존재 방식의 규정. 인간은 향락하는 양태임 말하는 존재의 향락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향락한다. 기표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언표행위를 통해 향락하는 것. 그러므로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셍톰(sinthome) 신체라는 사건으로서 향락 환상의 횡단 이후 잔여물. 무의식의 실재화. 분석이 종료되어도 남는 것. 증상은 향락의 측면이 있다. 시니피앙적 증상에서 셍톰으로 "셍톰은 무의식의 생성물이 아니라" " 분석 최후의 시점에서 생겨난 증상의 잔여물"이다. "셍톰은 암호화된 의미 작용이 아니라 머리없이 욕동[향락]하는 양태이다. " 증상은 욕망을 대상을 목표물로 삼을 것이 아니라,..

타자의 현현 (사랑의 지혜) - 알렝 핑켈크로트 -

사랑에 관한 많은 말들이 있다.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는 사랑하는 사람의 타자성에 대해 짧지만 녹록치 않은 무게로 쓴 책이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읽다가, 남기고 싶어서 몇 줄 적어본다. 수 많은 말들 중에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 자비와 탐욕, 자선과 소유욕을 동시에 의미하는 낱말이 하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르 ㄹ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어떤 존재가 갖게 되는 격렬한 욕망과 무조건적인 헌신이 같은 어휘 안에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염려하는 마음의 극치를 일컬을 때에도, 또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일컬을 때에서도 모두 사랑이란느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 아직도 무사무욕을 믿고 있는가? 누가 무상의 행위를 진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근대..

무의식의 확실성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존재의 확실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프로이트는 데카르트 처럼 회의의 방법을 통해 무의식의 확실성을 논증하고자 했다. 꿈이나 말실수와 같은 것은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근거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이와 같이 말한다 그런데 회의는 바로 확실성의 근거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가장 힘주어 강조하는 바입니다. 프로이트는 어째서 회의가 확실성의 근거가 되는지를 밝힙니다. 즉, 회의 자체는 무언가 지켜야 (숨겨야) 할 것이 있음을 뜻하는 기호라는 것입니다. 회의는 저항의 기호인 셈이지요.

수동적 능동성 (여자의 심리코드 밑줄긋기)

현실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파트너를 알콜 중독에서 빠져나오도록 독려하거나 닦달해야 사랑의 책임이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드라마(해방일지)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대상의 증상을 제거하려 들거나 침범, 요구, 통제하려 하지 않고 증상 그대로를 존중하고, 한 주체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을 매우 정신분석적인 접근으로 보았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흡사 정신 분석가가 소파에 앉아 온갖 증상을 호소하는 내담자를 바라보는 모습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혐오스러운 증상을 가졌든 그것보다 너의 존재가 중요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 말이지요. 누군가는 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사랑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

비밀의 취향(자크 데리다, 마우리치오 페라리스 )

형상이란 형상 없는 것의 흔적이다. 현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질료가 현전하는 즉시 형상 없는 것이 형상을 배태한다. 하지만 질료는 극단적으로 아득해지는 것이다. 질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상이 가장 하등한 정도로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랑할 만한 것이 형상에 의해 형상화되는 존재이지 질료가 아니라면, 질료 안에 있는 형상이 영혼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라면, 영혼이 더 고등한 차원에서 형상이고 또 욕망할 만한 것이라며, 지성이 그보다도 더 고등한 차원에서 형상이고 또 욕망할 것이라면 우리는 '아름다움'의 제일 본성이 무형의 것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9p

「 주체성과 타자성」 밑줄긋기 -로렌초 키에자-

한국의 독자들에게 9-10P 2. 주체성과 타자성은 여전히 내가 라깡과 그 너머에 대해 행하고 있는 연구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따. 돌이켜 보면 애초 해석적 차원에서 전개한 이 책의 세 가지 상호연관된 쟁점이 내게는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 다가온다. 욕망의 변즈업을 통한 초월론적인 것의 사후 발생, 기표의 물질성, 빗금쳐진 실재로서의 죽지는-않은 것. 당연히 이책은 이 모든 물음이 수렴되는 교차점인 듯한 욕망과 충동의 분리불가능성을 주장한다. 라깡, 그리고 라깡에게 고무된 사유로부터 '초월론적 유물론'을 끌어내려한 용감한 시도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틀거렸다. 이른바 욕망에 대한 충동이 그 어떤 우선성도 유물론적인 의제를 손상시킬 수 밖에 없다. 셸링에 대한 반-관념론적 독해에 기반한 이론으로는 라깡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