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7의 의미
2020.8.14
라깡의 숲
재작년 라깡세미나와 교육분석을 동시에 시작하면서 꿨던 꿈이 있다.
기억나는 대로 잠깐 옮기면 나는 나의 아들과 함께 째즈가 들리는 반지하 까페로 들어간다.
머리를 묶은 작곡가가 앉아있다. 나는 그와 음악이야기를 나눈다. 흰 가운 의사들과 함께 나는 수업을 듣는다. 그들은 가짜라고 작곡가에게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절벽에 70도의 각도로 뻗어있는 나무들과 화려한 바위를 가진 엄청난 규모의 절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쉬운 클리셰로 범벅되어 해석도 쉽다.
작곡가는 분석가이고,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반지하 그리고 안다고 가정된 주체들인 가짜 의사들. 화려한 절벽은 이 라깡 학문이 나에게 화려한 지적 환상에 대한 기대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지하세계가 아니라 집들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어떤 이태원 같은 동네로 자꾸만 이사를 간다. 동네에서 내려다본 빽빽한 집들. 나는 능선을 걷고 동네에 있을 법한 숲으로 들어간다. 짙은 녹색이끼가 가득한 주름진 산. 나는 작은 동네의 이런 산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이 산의 질감이 얼마나 무겁고 진한지 마치 예술작품 같다고 생각한다.
밑으로 내려와 나는 다시 숲속을 탐닉하기 위해 나의 집으로 올라가는 것을 반복한다.
밑에서 올려다 본 화려한 절벽이 위에서 내려다는 시점으로 변화하고 이제는 주이상스의 산맥을 따라 나는 그 숲에 들어가기를 반복하고 있다.
집들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곳에 자꾸 이사를 간다는 것은 집 하나하나가 어떤 기표들, 그것을 조망하고 싶다는 소망과 라깡의 숲에 들어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망들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잠시 시들했던 공부가 꺅텔의 시작으로 변화를 예고한다.
음소거와 공백
퇴근 무렵, 이미 나는 너무나 지쳐있다.
마치 고막이 부식된 것 같다.
하루종일 쉬지 않고 지저분하게 그 또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마침내 쟁쟁거리는 울림으로만 들린다.
더 이상 내용은 들리지 않고 음성만 남아, 그저 목소리의 양태만이 뾰족하게 신경에 거슬린다.
거의 토할 것 같은 기분이다. 한 낮의 가위눌림, 악몽 같은 이 목소리들은 나를 흔든다.
어느 아침 출근길에 나는 불어버린 한강을 보다가 불현듯 그 쟁쟁거리는 목소리들을 듣는다. 분명 나는 불어난 한강 수위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왜 그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드는가?
멍하니 한강을 바라보다 세계의 언어가 난립하는 순간, 기분은 불쾌해진다.
만약 세상의 말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과 동시에 리모컨의 음소거 버튼을 누르듯 ‘말’을 지워 본다. 찰나의 고요에서 일순간 세계의 소음이 들어온다. 말을 제거한 그 자리에는 세계의 소음이 가득 찬다. 흔들리는 버스의 소음. 내가 탄 버스 밖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빗소리,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 눈 앞에 내 손, 내 발. 신체가 감각되는 순간. 곧 나는 다시 상징계로 돌아와서 몇 일째 언어의 효과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까의 불쾌감은 사라졌다.
타자로 가득찬 ‘언어’들을 지우면, 홀연히 존재는 공백을 가진 물체가 되어버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그냥 물체,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기계처럼 느껴진다.
언어의 효과를 지운 세계의 공백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던 ‘모든 것은 언어의 효과’라는 저자의 말이 떠올랐다. 단순하게 말을 지우기만 해도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쟁쟁거리는 목소리며, 그에 따른 불쾌든, 유쾌든 그 너머이든.
모든 것이 언어의 효과라면, 모든 욕망의 시작과 끝이 언어로 인한 효과이며, 인간의 존재가 가진 고통과 쾌락의 원천이 언어의 효과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불현 듯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공백과 잠시 조우한 것이 아닐까. 잠시나마, 팔루스 세계의 합에서 이탈한 것일까. 이것 역시 언어의 효과에 불과한 것일까..
공백을 순간으로 조우한 것이 아니라 공백에 압살당하는 것이 우울증이 아닐까 싶다.
이 과정은 목소리들의 양태가 기표로 대상a로 작용을 하고, 대상a가 데려간 자리는 큰사물의 근접하여 공백을 보유한 신체를 드러나게 한다. 사실 큰 사물의 그림자만 밟은 것일지 모른다.
목소리의 양태가 대상a로 기능했다는 것은 나의 오독인지도 모른다. 라깡은 창조적 오독에 대해서는 관대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큰사물이 아닌 상상계의 수로로 빠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동안 ‘언어’의 효과라는 의미는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와 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혼, 무의식 같은 것을 실체로 규정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심지어 나는 정신분석을 ‘영혼의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감정노동을 넘어 이것은 ‘영혼의 노동’이다 또는 ‘사랑의 노동’이라고 말이다. 저자는 존재를 내어준다는 표현을 쓴다. 왜 그런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영혼마저도 언어의 효과라고 언젠가 저자가 쓴 적도 있다) 실체를 가정하는 낭만주의. 라깡이론에서 나의 고정관념이 부서진 자리가 바로 이 낭만주의적 실체의 자리이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낭만주의적 실체를 가정했던 것 같다. 운명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고 있지 않았나. 막연하지만 어떤 확신 같은 것에 기대어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라깡을 공부하게 된 것 조차 운명에 의한 것일지 모른다는 환상 같은 것이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경증자인 우리에게 공백이란 세계를 떠도는 유령이며, 바로 이 유령을 따라서 세계의 유한성을 빠져나가는 궁극의 윤리가 된다. 이러한 무한성의 윤리가 세미나7을 통해 명백히 정의되고 있다. 욕망의 대상이 법과 초자아의 수로들에 의해 통제되는 유한성의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윤리학, 그런 다음 큰 사물의 위상으로 한계를 벗어나게 하는 윤리학. 그런 다음 그것을 큰사물의 위상으로 전화시키는 윤리학.
달리 말해서 의미로 봉합된 사물의 외관이 아닌 사물의 존재를 공백인 그것을 사유하는 승화의 절차. 공백을 사유함으로써 주체 스스로도 공백과 동일시 되는 그런 다음 엑스 니힐로의 사건적 장소가 되는 그러한 절차의 윤리학이 명확히 제시되고 있다. 후에 자끄 알랭밀레는 이것을 장치화된 위반의 임상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무의식을 또는 문명의 무의식을 고착시키면 통제하고 있는 법- 환상의 거대한 기둥들을 무너뜨리는 위반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11P -
잠시나마 nothing을 느꼈던이 작은 사건이 공백의 유령이 잠시 머문 순간이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위반의 장치화된 임상 절차와 공백의 사유
“세미나7을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명명한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정신분석임상에서 무의식이 어떻게 윤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지를 밝힌다. 각각의 개인에게는 각자의 타자의 남긴 흔적으로서의 초자아가 있다.”
인간은 언어가 도입되면서 첫 번째 거세를 당하게 되고, 이러한 거세는 윤리적 구조를 심어놓는다.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심어진 ‘언어’라는 도구는 그렇게 초자아와 함께 우리에게 새겨진다. 첫 번째 거세에 의한 흔적에 따라 무한반복의 궤도를 탐구하는 것이 정신분석 임상의 우선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궤도는 있지만, 그 궤도의 넓이, 폭, 깊이 등 각자의 길트임에 의해 고유하고, 개별적이며 이러한 루틴을 찾아내는 것이 첫 번째 임상의 실천이다.
어떻게 해야 그 루틴을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루틴을 찾는 행위
앞서 얘기했던 불쑥 끼어든 목소리, 비난과 칭찬을 번갈아 연기하는 초자아의 목소리는 예고 없이 들어 왔다 나간다. 이같은 초자아로서 군림하는 무의식의 발화는 예전보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초자아의 환영에 지배받는 것은 비윤리적이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는 주체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아직 선생님께 혼나거나 칭찬받는 초등학교에 교실에 앉아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할까.
초자아의 목소리는 대타자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타자의 목소리는 주로 명령과 금지의 목소리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이러면 안되고 저러면 안되고,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고, 끊임없이 초자아의 목소리는 마치 충동의 목소리와 싸우는 듯 주체를 지배한다. 그럼 초자아의 주인은 누구인가?
목소리는 주인이 없다. 대타자의 주인이 있던가? 없다.
초자아로서 등장하는 목소리뿐만 아니라 응시도 마찬가지다. 마치 신체 곳곳 내부에도 CCTV를 달아놓은 듯 너무나 익숙하게 그것은 내 안에 있다.
어느 날, 나는 화장실에서 울고 있다. 울고 있는 나, 그걸 응시하고 있는 나, 응시하는 나를 지켜보는 나, 응시를 지켜보는 나를 다시 지켜보는 끝없는 거울에 갇힌 것만 같은 순간들, 초자아의 응시를 비웃듯 묘하게 삐져나오던 그 웃음은? 하지만 그 웃음마저 가짜로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다. 다분히 증상적 순간이다.
응시하는 나와 응시당하는 나는 같은 것 같지만 그것은 타자의 응시가 아니였을까? 나의 신체가 타자들의 전쟁터처럼 느껴진다. 만약 그 응시와 목소리가 신이라는 타자로 가정된다면 보다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응시하는 나를 보고있는 나’를 진짜 ‘실물타자’로 대체하는 순간 정신병적 망상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라깡세미나 7』의 정신분석의 두 번째 윤리는 “매 순간 출몰하는 초자아의 환영적 기둥 역시 무너뜨리는 위반의 장치화를 일상화를 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윤리’ 이며, 삶을 고정시키는 환영적 욕망의 기둥들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며, 새로운 삶은 시작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윤리”라고 말한다. 또한, 그러기 위해 우리는 ‘죽음을 욕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큰 사물을 방어하기 위한 욕망의 죽음을 욕망하고, 임상에서 일상에서 초자아의 죽음을 욕망하는 것. 팔루스의 장례식을 각자의 방법으로 치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새로운 기표의 유입 : 큰 사물과 같은.
『라깡세미나 7』는 1959년에서 1960년 사이 24회에 거친 구술 세미나를 엮은 『세미나7 : 정신분석의 윤리』의 강해서이다. 1960년이면 우리 부모님들은 한창 젊을 때였고, 내가 태어나기 10여 년 전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그는 이미 ‘라깡이라는 기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이 세미나는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백상현 저자가 번역된 세미나 1과 세미나 11사이에 번역되지 않은 세미나를 강해하는 이유는 “라깡 정신분석의 핵심 사유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세미나7을 읽는 것은 곧 라깡의 새로운 인간학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라깡은 프로이트의 큰사물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주이상스가 상징계와 상상계 모두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공간에 위치한다고 가정한다. ”고 프롤로그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은 이 말이 이해가 가지만, 아마 처음에 이 문장을 읽었을 때 정말 난감했다. 다른 철학적 지식도 없고, 심지어 프로이트의 이론도 일부 고정관념으로만 갖고 있는 그러한 상태에서 라깡수업 들었을 때 너무나 난해했다. 나는 라깡이론과 대치되는 고정관념(지식)이 별로 없었기에, 처음에는 그냥 수업을 들었고, 머릿속에 의문만 가득 찬 채로 한 해, 두 해 보내왔다. 기존의 내가 아는 지식으로 환원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부족했다고 할까.
지식은 없고 오로지 경험과 상상으로 그 간극을 메워보려고 꿈을 동원하고, 상상력을 동원하고 이미지를 동원하려고 했다.
특히나 라깡세미나7에서 다루고 있는 큰사물 같은 경우에는 속된 말로 ‘내 사전에 없던 말’이였다. 아직도 명확하게 설명은 되지 않는다. 기존에 없던 기표의 도입이 내 인생의 사건이라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팔루스, 큰사물, 주이상스, 대상a , 죽음충동 등이다.
그리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인 무의식, 쾌락, 성욕 등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인 무의식, 쾌락, 성욕의 의미는 너무나 기의와 기표가 밀착되어 있기에 새로운 개념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기존에 내가 가진 의미를 아무리 제거하려고 해도 어느새 의미들은 달라붙어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무의식하면 떠오르는 의미들과 라깡이 세미나에서 다루었던 ‘무의식’은 달랐다. 성욕도 너무나 강하게 일상적 의미와 달라붙어 있는 기표이기 때문에 그것 역시 흔들어 기의를 털어내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아마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로서 경험과 상상계적 이미지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은 계속될지 모르겠다.
이미 저자에게는 해독된 기표지만 나에게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외계어로서 큰 사물은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것만큼이나, 기존에 내가 아는 개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새로운 지식을 도입한다는 것은 공백을 도입하는 기표를 심는 것이 아닐까.
큰 사물이라는 기표의 효과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큰 사물과 공백, 죽음충동의 뒤섞어 혼란스러웠다. 큰 사물이 거세가 일어나기 전의 장소라면 이 장소가 실재의 장소가 될 것이다. 큰 사물의 그림자가 대상a이며, 죽음충동의 미끼라고 이해했다.
그럼 주이상스의 자리는 어디인가? 큰사물과 함께 있는 있는가? 정리되지 않은 개념들이 숲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을 들게 만든다. 추상적 개념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도식화하게 되고, 다른 개념들과 차이를 통해 이해하려는 무의식적 노력하게 된다. 공부란 이런 것인가? 어쨌든 새로운 기표의 도입은 존재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행위이다.
세미나 7을 관통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라깡을 공부하기 전 인문학 쇼핑을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그 공부들이 고정관념을 될 정도로 뼈아프게 공부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도구로서 시작한 공부는 삶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러 인문학 아카데미에서 여러 선생님에게 강의를 들었지만, 그 어느 것도 일시적으로 삶의 잠언으로서만 작용을 했던 것 같다.
모든 공부 한가지 공통점은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양철학이던, 서양철학이던 공통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다. 라깡도 매 순간 죽음을 욕망하면서 새로 태어나는 것을 윤리도 삼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 ‘어떻게’를 각자가 발명하는 실천을 하는 것이 포인트가 아닌가 싶다.
나는 고정관념을 주입하지 않고 아이를 키운다면, 그는 창의적 인간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에게 되도록 고전은 읽히지 않고, 인문학에 가까운 창작동화만 던져줬다. 그리고 세상에서 같은 사람 말고 ‘다른 사람’이 되라는 주문을 걸었다.
(나의 실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방법들이 어떤 효과를 거둘지 아직은 모르겠다.)
‘고정관념’이 없으면 보다 자유로운 인간이 되리라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언어’의 도입되는 것 자체가 고정관념과 타자의 유입으로 소외된 주체로 살 수밖에 없는 것을 그땐 생각지도 못했다. 고작 창작동화 몇 권 읽힌다고 고정관념에서 보다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무언가를 흘려 넣을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그저 내가 사는 삶의 모습으로서 밖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기표를 세탁하는 방법을 알려줄 수도 있을까? 세탁해야 한다는 것은 알려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후의 과정은 각자가 발명해야 한다는 그 막막함을 함께 가르쳐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앞서 얘기했듯이 저자는 세미나7은 ‘새로운 인간학’을 읽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보았다.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 인간의 유한성이 아닌 무한성에 방점을 찍는 관점을 갖게 된다면 삶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윤리적이라는 것. 이를 위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낱낱이 횡단해야 한다는 것이 공부를 하는 이유라고 나는 이해했다.
저자는 ‘라깡이 우리에게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절차를 각자의 영역에서 재발명해 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며, 몰락의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무한 반복의 시지프스적 윤리를 실천하자는 의미’라고 말한다. 일종의 공백의 해석학으로서..
기의를 털고난 그물망에 남은 기표들을 가지고 나는 무엇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무엇이 될수 있을까.
이번 꺅텔에 참여하면서, 읽고 쓰고 말하는 것에 대한 훈련의 과정은 성장의 과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그동안 라깡을 공부하면서 대량으로 유입된 기표들의 출렁임을 정리해 보는 기회로 삼고자 한다.
책장을 넘길 때 마다 책에 베이기를 원한다. 따갑고 더러 피를 흘릴 것이다.
내가 가진 세계의 잠언들이 벌어진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고, 새로운 피가 돌도록 열심히 책을 먹는 것이 윤리적 실천이 나의 ‘라깡의 인간학’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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