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와 이드(1923)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말미 이러한 의문을 던진다.
우리의 의식은 내부로부터 쾌, 불쾌의 감정과 ‘특별한 긴장의 감정’도 전달해 주는데 이러한 감정이 묶인 에너지 과정과 묶이지 않는 에너지를 구별해 주는 지표가 아닐런지, 혹은 주어진 시간 단위에서 리비도 집중의 크기 변화인지 묻는다.
프로이트는 ‘내부에서 오는 자극’과 관련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과학적 지식의 더디게 발전하는 상황을 토로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 우리가 날아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절뚝거리면서 도달해야 한다…. 그 책은 우리에게 절뚝거리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
프로이트가 남긴 마지막 시구에서 그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한번에 도달할 수 없는 어려운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절뚝이면서 그 곳에 가려고 했다는 그 의지에 비해, 오늘날 내가 이 텍스트를 마주함에 있어 노력을 하지 않고, 날아가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절뚝이며 나아가는 것은 ‘실천’이지 죄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 논문을 쓴 시기는 맹정현의 프로이트의 4가지 패러다임에 따르면 ‘죽음충동의 시기’이다. 트라우마와 멜랑꼴리 환자를 연구하면서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가정하게 된 시기이며, <자아와 이드>는 기존의 메타심리학을 재구성한 것으로, “죽음 충동을 정신분석학에 하나의 메타심리학적인 개념으로 통합시키는 신호탄”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1.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
-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의식적이지 않은 어떤 정신 현상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증거로 “최면이나 꿈”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 의식이란 무엇인가?
먼저 의식된다는 것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은 무의식은 ‘지각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텍스트에서 ‘정신적 요소(관념)’을 언급하면서 정신적 요소가 오랫동안 의식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고 본 것은 ‘정신적 요소(관념)’을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화 이전의 이러한 상태는 억압되어 있고, 억압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힘을 의식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억압의 이론으로부터 무의식의 개념을 얻는다.(355P) 그리고, 억압된 것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보았다.
- 두 종류의 무의식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가 가능한 것(전의식)과 억압되어 의식화가 불가능한 것(무의식)으로 두가지로 나누었다. 즉 전의식과 무의식은 서술적 의미에서 두 종류이지만, 역동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무의식으로 본다.
서술적 의미로 전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지만 역동적 의미로는 하나의 무의식이라는 진술은 뒤에 부록에서 프로이트가 이에 대한 가설을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에서도 여러 번 설명하는 바라고 한다. 즉, “서술적 의미로는 전의식과 억압된 것 양쪽 모두가 무의식인 반면 역동적 의미로는 억압된 것만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4p)
- 무의식과 자아와의 관계
프로이트는 자아의 개념이 “정신 과정을 일관성 있게 조직화”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나왔다고 보았다. 이 “자아에 의식이 부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357p)
- 이드의 탄생
프로이트는 “분석은 자아가 억압된 것과 관련해서 보이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담자는 그러한 저항을 모르지만, “자아 자체 속에 있는 것으로서 역시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것과 똑같이 행동하는 어떤 것”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항을 넘어 의식화될 수 있기 위한 특별한 작업이 필요하며, 프로이트는 어떻게 그 특별한 작업이 가능한지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일관성 있는 자아에서 떨어져 나온 억압된 것 사이 존재하는 대극 구조”가 있다고 보았다.(358P) 다시 말해 분석을 통해 억압된 것이 의식화는 되지만, 자아와는 대립되는 것이 있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어 “무의식이 억압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무의식도 의식화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자아에 속한 무의식도 있는 것 이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은 전의식과 같이 잠재적인 것이 않다고 보았다. 이로써, “억압되지 않는 제 3의 무의식”을 가정하였다.
2. 자아와 이드
- 자아도 무의식적이다.
프로이트는 사실 “의식이냐 무의식이냐”라는 사실도 모호한 문제라고 말한다.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화 되는 일이 가능한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프로이트는 “ 우리는 의식이 정신 기관의 표면”이라고 말해왔으며, 그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첫 번째 조직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면은 유물론적이기도 한데, 해부학적 의미로서도 그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지각적 표면’을 출발점으로 다시 논의를 이어나간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외부와 감각-지각 내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지각은 처음부터 의식적이다. 그러나 거칠고 부정확하게나마 사고 과정의 이름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은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난제를 풀어나갈 키워드를 “언어표상”으로 삼는다.
프로이트는 의식화의 과정을 ‘내부 정신 기관 어디에서 발생한 정신 에너지가 행동을 취하려고 자리바꿈’ 하는 것을 표면으로 진출하여 의식을 생성 혹은 의식이 그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아닌지.. 난문을 제기하다가 “제3의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무의식과 전의식적 관념(생각)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즉 무의식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어떤 자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반면에 전의식은 거기에 덧붙여 언어 표상과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
다시 말해, 프로이트는 전의식은 언어로 표상되어 의식화 될 수 있고, 언어 표상은 기억의 잔재물이라고 보았다. 기억의 잔재물은 한때 지각의 내용이였으며, 의식적 지각만이 기억의 흔적으로 남아 의식화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이트에게 ‘환상’과 기억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였다.
프로이트는 기억의 재생은 리비도의 집중이 기억의 조직 속에 남아있는 반면, 지각과 구별할 수 없는 환상은 기억의 흔적에서 ‘지각적 요소’로 완전히 덮어버릴 떄 발생한다고 보았다. 무슨 의미일까. 이어 프로이트는 언어적 잔재물은 청각적 지각으로 유래하는 데서 보면 전의식 자체가 감각적 원천을 갖고 있는 셈이 되며, 사고의 과정에서 시각적 잔재물로 되돌아감으로써 의식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꿈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시각적 사고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사고의 구체적 주제일뿐 주제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시각적 표현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림으로 사고하는 것은 의식화의 매우 불완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또한 언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무의식적 과정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 같은 발언은 후에 라깡이 상상계를 실재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는 듯 하다.
프로이트는 그 자체로 무의식적 이었던 것이 전의식화 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분석 작업을 통해서 (전의식)에 중간 고리를 제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의식은 의식 속에 올라오지 않는다. 또한 “외부적 지각과 자아의 관계는 아주 명료한 반면, 내부적 지각과 자아의 관계는 특별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고 말한다.
내부적 지각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내부적 지각은 정신 기관 중 가장 다양하고 또한 가장 깊은 층에서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감각들을 산출해 내는 것으로 보았고, 쾌-불쾌의 고리들이 내부적지각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불쾌의 감각은 변화를 향해 방출을 향해 몰아붙이고, 쾌는 이를 저하시키면서 우리정신에서 쾌락과 불쾌로 느끼게 되는 그 정신과정을 “그 무엇”이라고 칭하고, 그 무엇은 지각 조직에 전달되어 쾌와 불쾌로 의식화 된다. “그 무엇은 억압된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고 프로이트 말하면서, 이것은 자아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무엇에 의한 내부적 지각인가? 억압된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그 무엇을 ‘충동’이라고 내심 간주하면서 읽고 있다가,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는 언술을 보고,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이어 프로이트는 아마 반복강박을 염두해 두고 쓴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 “자아는 그 강박성을 눈치 채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자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반복강박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고통이라는 감정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강박성에 대한 저항이나 방출 반작용에 대한 제지 행위가 발생할 때에야 비로소 그 무엇이 불쾌로서 갑자기 의식화” 되는데, 고통 역시 그럴 수 있다. 이 고통은 외부적 지각과 내부적 지각 사이 있으며, 그 근원은 외부세계에 있더라도 마치 내부적 지각처럼 근원은 외부 세계에 있는데도 마치 내부적 지각같이 행동한다. 그러므로 감각과 감정도 역시 지각의 조직에 도달함으로써만이 의식화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무의식적 감정은 연결고리가 없이 직접 전달된다고 보았다. 이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무의식에서 오는 가장 진실한 감정이라는 주장과 통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프로이트는 언어표상에 의해 내부의 사고가 지각된 것이지만, 사고 과정에서 리비도가 집중이 발생되면 마치 그것이 외부로부터 온 것처럼 실제적으로 지각되고, 결과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머리속의 목소리가 이러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머리속에서 말을 듣는다. 리비도의 집중은 타인의 목소리로 머리속에서 재생되는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 즉 무의식 상태인 정신적 이드를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자아가 이드를 완전히 감싸지 않고, 자아와 이드는 칼로 자르듯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
그의 주장은 억압된 것도 역시 이드와 합병되어 이것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단지 억압된 것은 억압의 저항에 의해서 자아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드를 통해서 자아와 의사소통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프로이트는 “자아가 듣는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 (청각인지)-우리가 대뇌 해부학을 통해서 알 곳 있듯이, 한쪽에만 쓴 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다” 고 말한다. 또한 자아는 수정된 부분의 이드이기도 하고, 자아는 외부세계의 영향을 자아와 연결시키려 하고,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으로 대치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자아에게는 지각이 이드 속에서 본능에 해당하고, 이성과 상식을 대변한다.
프로이트의 따르면 자아의 기능적 중요성은 통제이다. “말을 탄 사람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 가고자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도 이드의 의지를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 양 행동으로 나타내는 습관이 있다.
자아와 이드의 분화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는데,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그것은 사람의 육체이다. “자아는 무엇보다는 먼저 육체적 자아이다. 그것은 표면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표면의 투영이다.” 각주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이 표현은 자아는 궁극적으로 육체적 감각에서 주로 육체의 표면에서 나오는 감각에서 유래된 것이고, 따라서 정신 기관의 외관을 대표하는 것 외에 육체적 표면의 정신적 투사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자아와 의식과의 관계에 대해 아직 중요한 사실을 남아 있다고 말하는데, 어려운 지적작용도 의식화 되지 않은 상태로 전의식적으로 이루질 수 있고, 예를 들어 풀리지 않은 난문을 꿈에서 해결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또 하나 생소한 현상은 “양심, 자기비판”과 같은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언급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초자아와 관련된 논의로 나아간다.
자아와 이드(1923)
전현정 2023.7.7.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의 말미 이러한 의문을 던진다.
우리의 의식은 내부로부터 쾌, 불쾌의 감정과 ‘특별한 긴장의 감정’도 전달해 주는데 이러한 감정이 묶인 에너지 과정과 묶이지 않는 에너지를 구별해 주는 지표가 아닐런지, 혹은 주어진 시간 단위에서 리비도 집중의 크기 변화인지 묻는다.
프로이트는 ‘내부에서 오는 자극’과 관련하여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과학적 지식의 더디게 발전하는 상황을 토로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 우리가 날아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은 절뚝거리면서 도달해야 한다…. 그 책은 우리에게 절뚝거리는 것이 죄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다. “
프로이트가 남긴 마지막 시구에서 그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한번에 도달할 수 없는 어려운 길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절뚝이면서 그 곳에 가려고 했다는 그 의지에 비해, 오늘날 내가 이 텍스트를 마주함에 있어 노력을 하지 않고, 날아가려고 했던 스스로가 부끄럽다.
절뚝이며 나아가는 것은 ‘실천’이지 죄가 아니다.
프로이트가 이 논문을 쓴 시기는 맹정현의 프로이트의 4가지 패러다임에 따르면 ‘죽음충동의 시기’이다. 트라우마와 멜랑꼴리 환자를 연구하면서 프로이트는 죽음충동을 가정하게 된 시기이며, <자아와 이드>는 기존의 메타심리학을 재구성한 것으로, “죽음 충동을 정신분석학에 하나의 메타심리학적인 개념으로 통합시키는 신호탄”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1. 의식과 무의식적인 것
-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는 ‘의식과 무의식의 분열’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기본 전제는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 시대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의식적이지 않은 어떤 정신 현상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증거로 “최면이나 꿈”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 의식이란 무엇인가?
먼저 의식된다는 것은 프로이트에 따르면 ‘지각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 같은 발언은 무의식은 ‘지각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텍스트에서 ‘정신적 요소(관념)’을 언급하면서 정신적 요소가 오랫동안 의식적이지 못하고 일시적이라고 본 것은 ‘정신적 요소(관념)’을 무의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화 이전의 이러한 상태는 억압되어 있고, 억압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힘을 의식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억압의 이론으로부터 무의식의 개념을 얻는다.(355P) 그리고, 억압된 것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보았다.
- 두 종류의 무의식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잠재되어 있으나 의식화가 가능한 것(전의식)과 억압되어 의식화가 불가능한 것(무의식)으로 두가지로 나누었다. 즉 전의식과 무의식은 서술적 의미에서 두 종류이지만, 역동적 의미에서는 하나의 무의식으로 본다.
서술적 의미로 전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뉘지만 역동적 의미로는 하나의 무의식이라는 진술은 뒤에 부록에서 프로이트가 이에 대한 가설을 <새로운 정신분석 강의>에서도 여러 번 설명하는 바라고 한다. 즉, “서술적 의미로는 전의식과 억압된 것 양쪽 모두가 무의식인 반면 역동적 의미로는 억압된 것만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444p)
- 무의식과 자아와의 관계
프로이트는 자아의 개념이 “정신 과정을 일관성 있게 조직화”하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에서나왔다고 보았다. 이 “자아에 의식이 부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357p)
- 이드의 탄생
프로이트는 “분석은 자아가 억압된 것과 관련해서 보이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내담자는 그러한 저항을 모르지만, “자아 자체 속에 있는 것으로서 역시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것과 똑같이 행동하는 어떤 것”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저항을 넘어 의식화될 수 있기 위한 특별한 작업이 필요하며, 프로이트는 어떻게 그 특별한 작업이 가능한지는 따로 언급하지는 않는다.
프로이트는 “일관성 있는 자아에서 떨어져 나온 억압된 것 사이 존재하는 대극 구조”가 있다고 보았다.(358P) 다시 말해 분석을 통해 억압된 것이 의식화는 되지만, 자아와는 대립되는 것이 있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어 “무의식이 억압된 것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았다.”고 말함으로써 무의식도 의식화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즉, 자아에 속한 무의식도 있는 것 이다. 프로이트는 이 무의식은 전의식과 같이 잠재적인 것이 않다고 보았다. 이로써, “억압되지 않는 제 3의 무의식”을 가정하였다.
2. 자아와 이드
- 자아도 무의식적이다.
프로이트는 사실 “의식이냐 무의식이냐”라는 사실도 모호한 문제라고 말한다. 무의식이 어떻게 의식화 되는 일이 가능한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먼저 프로이트는 “ 우리는 의식이 정신 기관의 표면”이라고 말해왔으며, 그것은 외부 세계로부터 첫 번째 조직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면은 유물론적이기도 한데, 해부학적 의미로서도 그러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지각적 표면’을 출발점으로 다시 논의를 이어나간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외부와 감각-지각 내부로부터 받아들이는 모든 지각은 처음부터 의식적이다. 그러나 거칠고 부정확하게나마 사고 과정의 이름으로 요약할 수 있는 내적 과정은 어떠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 난제를 풀어나갈 키워드를 “언어표상”으로 삼는다.
프로이트는 의식화의 과정을 ‘내부 정신 기관 어디에서 발생한 정신 에너지가 행동을 취하려고 자리바꿈’ 하는 것을 표면으로 진출하여 의식을 생성 혹은 의식이 그쪽으로 진출하는 것은 아닌지.. 난문을 제기하다가 “제3의 대안”을 찾고자 하였다.
“나는 이미 다른 곳에서 무의식과 전의식적 관념(생각)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즉 무의식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있는 어떤 자료에 대해서 일어나는 것이고, 반면에 전의식은 거기에 덧붙여 언어 표상과 관련을 맺는다는 사실이다. ”
다시 말해, 프로이트는 전의식은 언어로 표상되어 의식화 될 수 있고, 언어 표상은 기억의 잔재물이라고 보았다. 기억의 잔재물은 한때 지각의 내용이였으며, 의식적 지각만이 기억의 흔적으로 남아 의식화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프로이트에게 ‘환상’과 기억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였다.
프로이트는 기억의 재생은 리비도의 집중이 기억의 조직 속에 남아있는 반면, 지각과 구별할 수 없는 환상은 기억의 흔적에서 ‘지각적 요소’로 완전히 덮어버릴 떄 발생한다고 보았다. 무슨 의미일까. 이어 프로이트는 언어적 잔재물은 청각적 지각으로 유래하는 데서 보면 전의식 자체가 감각적 원천을 갖고 있는 셈이 되며, 사고의 과정에서 시각적 잔재물로 되돌아감으로써 의식화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꿈에 대한 연구는 이러한 시각적 사고의 특별한 성격에 대한 개념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사고의 구체적 주제일뿐 주제의 여러 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시각적 표현을 얻을 수 없으므로, 그림으로 사고하는 것은 의식화의 매우 불완전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또한 언어로 사고하는 것보다 무의식적 과정에 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 같은 발언은 후에 라깡이 상상계를 실재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관점과 연결되는 듯 하다.
프로이트는 그 자체로 무의식적 이었던 것이 전의식화 되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분석 작업을 통해서 (전의식)에 중간 고리를 제공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무의식은 의식 속에 올라오지 않는다. 또한 “외부적 지각과 자아의 관계는 아주 명료한 반면, 내부적 지각과 자아의 관계는 특별한 연구를 필요로 한다.” 고 말한다.
내부적 지각이란 무엇인가?
프로이트는 내부적 지각은 정신 기관 중 가장 다양하고 또한 가장 깊은 층에서 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감각들을 산출해 내는 것으로 보았고, 쾌-불쾌의 고리들이 내부적지각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았다. 불쾌의 감각은 변화를 향해 방출을 향해 몰아붙이고, 쾌는 이를 저하시키면서 우리정신에서 쾌락과 불쾌로 느끼게 되는 그 정신과정을 “그 무엇”이라고 칭하고, 그 무엇은 지각 조직에 전달되어 쾌와 불쾌로 의식화 된다. “그 무엇은 억압된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고 프로이트 말하면서, 이것은 자아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무엇에 의한 내부적 지각인가? 억압된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필자는 그 무엇을 ‘충동’이라고 내심 간주하면서 읽고 있다가, 충동과 같이 행동한다는 언술을 보고, 그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이어 프로이트는 아마 반복강박을 염두해 두고 쓴 표현이 아닐까 싶은데, “자아는 그 강박성을 눈치 채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자아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반복강박에 사로잡혀있는 것을 말하는 듯 하다.
고통이라는 감정은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강박성에 대한 저항이나 방출 반작용에 대한 제지 행위가 발생할 때에야 비로소 그 무엇이 불쾌로서 갑자기 의식화” 되는데, 고통 역시 그럴 수 있다. 이 고통은 외부적 지각과 내부적 지각 사이 있으며, 그 근원은 외부세계에 있더라도 마치 내부적 지각처럼 근원은 외부 세계에 있는데도 마치 내부적 지각같이 행동한다. 그러므로 감각과 감정도 역시 지각의 조직에 도달함으로써만이 의식화 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무의식적 감정은 연결고리가 없이 직접 전달된다고 보았다. 이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무의식에서 오는 가장 진실한 감정이라는 주장과 통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프로이트는 언어표상에 의해 내부의 사고가 지각된 것이지만, 사고 과정에서 리비도가 집중이 발생되면 마치 그것이 외부로부터 온 것처럼 실제적으로 지각되고, 결과적 사실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한다. 머리속의 목소리가 이러한 사례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머리속에서 말을 듣는다. 리비도의 집중은 타인의 목소리로 머리속에서 재생되는 것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 즉 무의식 상태인 정신적 이드를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리고, 자아가 이드를 완전히 감싸지 않고, 자아와 이드는 칼로 자르듯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주장한다.
.
그의 주장은 억압된 것도 역시 이드와 합병되어 이것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다. 단지 억압된 것은 억압의 저항에 의해서 자아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드를 통해서 자아와 의사소통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프로이트는 “자아가 듣는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 (청각인지)-우리가 대뇌 해부학을 통해서 알 곳 있듯이, 한쪽에만 쓴 그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있다” 고 말한다. 또한 자아는 수정된 부분의 이드이기도 하고, 자아는 외부세계의 영향을 자아와 연결시키려 하고, 쾌락원칙을 현실원칙으로 대치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자아에게는 지각이 이드 속에서 본능에 해당하고, 이성과 상식을 대변한다.
프로이트의 따르면 자아의 기능적 중요성은 통제이다. “말을 탄 사람은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면 말이 가고자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아도 이드의 의지를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의지인 양 행동으로 나타내는 습관이 있다.
자아와 이드의 분화에는 또 다른 요소가 작용하는데,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그것은 사람의 육체이다. “자아는 무엇보다는 먼저 육체적 자아이다. 그것은 표면적 실체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표면의 투영이다.” 각주에 따르면 프로이트의 이 표현은 자아는 궁극적으로 육체적 감각에서 주로 육체의 표면에서 나오는 감각에서 유래된 것이고, 따라서 정신 기관의 외관을 대표하는 것 외에 육체적 표면의 정신적 투사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자아와 의식과의 관계에 대해 아직 중요한 사실을 남아 있다고 말하는데, 어려운 지적작용도 의식화 되지 않은 상태로 전의식적으로 이루질 수 있고, 예를 들어 풀리지 않은 난문을 꿈에서 해결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또 하나 생소한 현상은 “양심, 자기비판”과 같은 기능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언급함으로써 프로이트는 초자아와 관련된 논의로 나아간다. 2023.7.7.
'cart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정신분석인가 (0) | 2023.09.13 |
---|---|
글쓰기라는 임상 (1) | 2023.08.02 |
마조히즘의 경제 (프로이트) (1) | 2023.07.28 |
대타자의 불능 (0) | 2023.07.21 |
무의식이라는 해머 (0) | 2023.06.18 |
의식의 해부학적 구조(프로이트) (0) | 2023.06.14 |
상실의 발명 (0) | 2023.06.14 |
라깡 세미나 7을 읽는 다는 것 (1) | 2023.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