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때때로 발이 지면에 닿지 않는 듯 세상이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옷을 입고, 세상이라는 무대를 배회하는 하나의 거푸집 같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과의 대결 혹은 공범의식의 속에서 불안. 분열에 대한 불안감이 늘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의식을 벗어나기 위해 저는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그 불안은 저를 ‘신’에게 데려가진 않았습니다. 인간과 닮아있는 신은 의심스러워 ‘전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것을 끝장낼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했습니다. 종교나 잠언, 철학과 문학 말로된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증상을 가라앉힐 수는 있었으나, 허무의 동공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저의 의심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흑백의 남자 ‘라깡’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근원이 ‘언어’를 가지게 된 인류 문명의 한바탕 소동임을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아니라 언어를 기반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형식이 문제임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무의식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고 라깡은 말합니다. 무의식의 주체는 우리를 지배하고 때로는 소등시킵니다. 무의식의 주체는 의식의 주체와 분열되어 서로를 등진채 상호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우리의 분열된 안과 밖을 꿰매는 것이 바로 시니피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니피앙에 의해 표지되어지는 동시에 거세됩니다. 우리가 정신분석을 해야 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시니피앙에 의해 욕망하는 기계로 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체성이 있을까요? 라깡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타자는 대타자입니다. 그리고 이 대타자 역시 빗금 쳐 저 있는 이름뿐인 아버지일 뿐입니다.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는 뜻입니다. 라깡 정신분석은 우리의 욕망의 한계는 타자에 의해 구성된 욕망임을 환상의 횡단을 통해 내담자 스스로 깨닫게 만듭니다.
여기에는 어떤 낭만주의도 신비주의도 없습니다. 그저 언어의 횡단을 통해 내담자 스스로 자신의 무의식의 논리 너머에 공백뿐임을 깨닫게 되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 공백의 장소에서 우리는 새로운 환상을 만듭니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의 삶입니다. 이제 주이상스는 우리가 가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환상이 새로운 진리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실재를 조우하는 '사건'에 충실해야 합니다. 정신분석과의 조우가 저에게는 일종의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붙잡았고, 충실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알랭바디우가 말했듯이 '진리의 충실성'만이 주체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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