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우리의 무의식을 상연한다. 많은 꿈을 꾸며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의 세계에 갑자기 보였다 사라지는 몇 장의 셀로판지는 통편집된 내 꿈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 정신분석공부를 하기전에도 낮만큼 밤의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꿈이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야만 하는 길’을 가르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압축과 전치’, 중복결정의 위장을 하는데 ‘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나 싶다. 예전 보다는 내게 ‘꿈의 위상’은 낮아졌다. 꿈이론에 대한 공부를 통해 알게된 것은 의식의 내가 꿈을 통해서 어떤 ‘진리’의 수준으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개인의 신화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라캉의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화”라는 언명에 따르면, 나의 무의식조차 나의 것이 아닌 타자의 욕망의 반복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처럼 떠 받들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은 중요하다. 꿈이 아니라면 분열된 자신의 민낯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꿈의 드라마를 통해 우리가 접근해야 하는 것은 ‘근원적 사고’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꿈은 각성상태에서는 접근할 수 없는 그 나름의 기억들을 지닌” 것처럼 보이며, 우리의 잃어버린 기억이 재생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똑같은 재연은 아니며, “환기”되거나, 상당히 “변형”된다. 브루스 핑크는 임상에서의 꿈은 우리의 역사의 구멍을 메꾸고, 교정하며, 전복시키는데 도움이 되며, 우리의 증상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브루스 핑크의 설명에 따르면 꿈은 감각적인 경험이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을 동원하여 경험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은 “말로 번역”되면서 그 꿈이야기는 “말하면서 더 잘 기억”하게 된다. 꿈은 말로서 접근할 수 밖에 없고, 꿈의 해석을 시도한다는 것은 “일련의 단어들”이다. 한마디로 “꿈은 텍스트”라는 것이다. 꿈이 기표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꿈이 사건과 스토리를 상영한다고 할지라도, 꿈을 직조한 것은 무의식의 시니피앙의 연쇄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영화를 보고도 각자가 다른 해석을 내린다. 분석가에게 해석을 요청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의 요구”일 뿐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꿈을 해석하는 내담자의 말, 텍스트’이다. 꿈을 번역한 말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프로이트는 “그 꿈을 존재하게 했던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최초의 사고들, 소망들은 꿈을 구성하여 발현된 것이 시각적/ 정동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가설은 사고들은 이미지로 변형되고, 다시 말해 잠재내용은 발현내용으로 변하게 된다. 이 과정은 동시에 일어나고 겹친다 .프로이트는 “꿈-내용(발현)은 꿈-사고(잠재)를 다른 표현방식으로 옮겨 적는 필사처럼 보이는데, 원본과 번역본을 비교함으로써 그 글자와 구문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 정신분석의 일이라고 말한다.
이해불가능한 증상적 꿈
그렇다면 꿈-사고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의식에서는 접근할 수 없도록 무의식은 내용을 변형한다. 프로이트는 “꿈을 증상들과 비슷한 것으로, 증상들처럼 구조화된 것으로, 또한 소형증상들 그 자체로 간주”하였다. 꿈이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증상을 구조화했다는 것이고 이것은 반복되는 꿈의 구조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은 다르지만 언제나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처럼 말이다. 꿈이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을 때 그 꿈은 증상으로 취급된다. 의식하에 이해되는 꿈은 전의식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꿈들을 프로이트는 ‘증상’으로 취급했다는 것이다. 임상에서는 이러한 꿈들이 더욱 두드러진다.
. 프로이트는 검열되지 않도록 변장한 소망들은 꿈에서 성취될 것이고, 그것의 불미스러움을 눈치를 챈다면 잠에서 깰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꿈이 끔찍한 잠재사고와 소망들로 가득차 있다고 결론 내었지만, 브루스 핑크는 의견을 달리한다. 분석수행자들은 자신의 동기와 환상과 충동에 대해 실제로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꿈에 접근하는 방법
프로이트는 꿈에 접근하는 다양한 많은 방법들을 제공한다. 꿈꾼 사람의 꿈의 재료를 추적하고, 꿈의 텍스트를 작은 부분들로 쪼갠다. 라깡식으로는 ‘시니피앙’으로 나누고, 분석상황이라면 이 시니피앙과 연관된 시니피에들을 떠오르게 하게끔 반복해서 말을 건다. 자유연상과 같은 말들을 이해하려 하지말고, 분석수행자의 “내용”보다 “멈춤, 실언, 이중적 의미의 어구” 등에 주목한다. 이러한 듣기는 “시니피앙”을 달리 다룰 수 있게된다. 즉 사물들은 결코 동일한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석가는 미끼를 물고 잠재사고에 접근 해야 한다. 그 미끼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불확실하여 철회를 시도한 것, 뒤늦게 떠오른 것, 장소 등등이다.
꿈은 압축과 전치를 사용하여 의식의 검열을 피한다. 무의식이 하는 일은 시니피앙의 연쇄를 통해 억압된 사고를 다양한 차원에서 발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의식의 이해와 다르게 반직관적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런 다양한 층위들 모두가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분석수행자는 꿈에 희생된 것처럼 느끼지만, 모든 층위에 있어서 주체의 일이라고 말한다.
한편 프로이트는 말한다. “우리 꿈에서 충족된 소망들이 떄로는 우리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위 사람들의 소망들이라고 말할 만하다.“ “우리 꿈에서 충족된 소망들이 때로는 우리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위 사람들의 소망들”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꿈 역시 타자의 욕망이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들의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쫓는다. 그 타자는 다른 타자의 욕망을 모방하고, 그럼 욕망의 사슬의 끝은 있는가. 라깡에 따르면 대타자의 대타자는 없다.
꿈해몽은 꿈을 일대일 상징으로 해석을 끝내버린다. 재미는 있다. 정신분석은 환자들의 꿈을 일대일 상징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연상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과 해석에 있어서 엄마,아빠의 성에 도달하자마다 꿈의 해석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유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원주의와 정형화된 방식은 프로이트보다 훗날의 진료의사들한테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브루스 핑크는 보았다. 프로이트는 ‘꿈-요소들 각각의 의미가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이고 그 개인들의 연상을 권유하기 전에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즉 분석가가 내담자의 꿈을 해석하는 것은 오류를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상징과 분석수행자의 해석을 병용하여 사용한다. 프로이트는 상징보다는 환자들의 환경에 관한 광범위한 지식으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로운 텍스트
이제는 꿈을 꾸면 다각도로 생각해보기는 하지만,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꿈들이 난무하다. 낮의 잔재들을 가지고 꿈을 직조했다는 얕은 층위의 증거들만 수집될 때도 있으며, 의식과 반대되는 무의식의 현실을 발견할 때도 있다. 의식과 반대되는 무의식을 직면했을 때 그럼 무의식을 진리로 다루고, 선택을 수정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런데, 꿈은 재현한 드라마는 심층을 다시 들여다보면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꿈은 반직관적인데, 직관적으로 의식에서 해석한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보다 중요하는 것은 꿈의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떠오르는 왜 이런 꿈을 만들어 냈는가에 대한 ‘뿌리’을 밝히는 것일 것이다. 무의식에 접근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무언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적 사고 해석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은 ‘창조성’은 우리의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생의 텍스트를 쓰는 것이다. 아무 관련이 없던 것들을 꿈의 인두로 지져 새로운 뉴런을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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