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분열적 자리 paranoid-schizoid position
생후 초기에 아이의 세계는 두 세계로 분리되어 있다. 좋은 젖가슴의 세계와 나쁜 젖가슴의 세계이다. 나쁜 젖가슴은 좋은 젖가슴의 부재이며 이는 박해와 고통의 세계이다. 아기는 이 나쁜 젖가슴을 미워하고, 보복환상에 사로잡힌다. 초기에는 이 두 세계를 따로 떼어놓는 것이 문제가 된다. 즉,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이 분리되어야 한다. 나쁜 젖가슴에 대한 파괴적인 분노는 나쁜 젖가슴에만 해당되어야 하지, 조금이라도 혼동하면 좋은 대상도 파괴하게 된다. 클라인은 유아-초기의 이러한 경험체계를 "편집-분열적 자리"라고 명명하였다. 편집증은 피해의식에 따른 두려움이고, 분열증은 이에 대한 방어로서 자신을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의 분리시키는 것이다.
신
그런데, 이러한 나쁜젖가슴은 아이의 환상이 창조한 것이다. 신생아들에게 죽음본능은 '임박한 파멸'에 대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자신의 공격성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실재가 공포로 다가오는 것] 이 "박해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아는 자기에게 향한 공격성의 일부를 외부로 투사하여 나쁜 젖가슴을 창조"한다. 즉, 죽음본능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클라인은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유아의 악의는 타고난 공격성에 의해 시작되지만, 좋은 환경은 그 공포를 완화시킨다고 보았다.
이분법적 사고의 기원
성인이 된 지금에도 끊임없이 양가감정과 이분법적 사고에서 빠져나오기 힘이 든다. 멜라니 클라인의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은 이분법적 사고의 원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론은 아기가 처음 만나는 대상이 부분대상으로서만 인지한다고 가정한다. 라깡의 거울단계에서도 아이는 통합적으로 자신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의 팔이나 다리도 분절되어 있는 것으로 느낀다. 멜라니 클라인의 부분대상은 아이가 자신이 분절되어 느끼는 것처럼 외부의 대상도 분절되어 느낄 것이라는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From the beginning the ego introjects objects' good J and' bad', for both of which its mother's breast is the prototype-for good objects when the child obtains it and for bad when it fails him” (145p)
젖가슴과의 대면은 물리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이 물리적인 상황은 아기에게 '좋고, 나쁨의 원형'이 되는 무의식을 양산한다. 좋은 대상은 만족을 주고, 나쁜대상, 즉 불만족의 대상은 공격, 파괴 등 가학성을 띠게 만든다. 성인이 되어서도 좋거나, 나쁘거나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인간이 대상과의 처음 접촉했을 때 ‘아기’의 상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박해환상
구강가학증으로 인해 아기의 공격성, 파괴성이 나쁜 젖가슴을 만나 돌출될 것이다. 아니면, 나쁜 젖가슴이라는 외부의 대상을 만나, 구강가학증이 발생된 것은 아닐까? ‘편집증성 불안’은 갖게된다. 나쁜 대상이 자신을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박해자’를 가정하게 만든다. 이 박해자를 방어하기 위해 아기들은 내사 또는 투사를 하게 된다. ‘박해자’는 아기를 위협하는 일종의 두려움인데, 아기의 내부에서 생겨났지만,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는 ‘박해망상’의 기원이 되는 듯 하다. 우울적 자리는 편집증적인 불안의 자리에서 아이가 어머니가 나쁜 대상과 좋은 대상을 다 가지고 있는 통합적인 존재로 받아들이는 관계이다. 이 단계는 신경증과 편집증의 고착점 사이에 있다. 통합적 존재로 인식했을때는 신경증으로, 그렇지 못했을 때 편집증으로 전개된다.
아기는 좋은 대상과 동일시를 통해 대상을 자신과 통합하려고 한다. 그런데, 왜 아기가 우울적 자리에 있다는 하는 것일까?
멜라니 클라인은 사랑하는 엄마를 내면화하는 동시에 어떤 불안을 느낀다고 보았다. 그 불안은 자신의 가학적 충동이 대상을 헤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정이라면, ‘구강-가학적 충동’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충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구강-가학적 충동’을 방어하기 위해 ‘초자아’를 만드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의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강박증자의 의심은 자기자신의 의심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기들은 혹시나 자기가 사랑하는 엄마를 해치지 않을 하는 강박. 아기 두려움은 내면이 만들어낸 괴물, 그 박해자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울적 자리의 아기의 상실감은 ‘상실에 대한 환상’인 것인가?
왜 전체를 얻고도 우울해 지는가?
유아는 태어나서 젖가슴이라는 부분 대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이때 젖가슴은 아기에게 좋은 젖가슴이거나,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되는 박해적인 젖가슴으로 분열되어 있다. 6개월이 지나면 아이는 어머니라는 전체 대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 시기를 ‘우울적 자리’의 시작이라고 멜라니 클라인은 말한다. 그녀는 왜 통합적 인식이 ‘우울’한 결과를 낳는다고 본 것일까? 그동안의 부분 대상은 어머니에게 내사되는데, 좋은 대상을 내사한다면 아이가 만족감만을 느낄 것이라고 예상되는 바와 달리 멜라니 클라인은 상실감 때문에 우울하다고 보았다. “대상이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 사랑 받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대상에 대한 상실감 또한 하나의 전체로서 느껴질 수 있다.” 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좋은 내면화된 대상을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느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까다롭게 느껴진다. 좋은 대상이 자기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게 속한 것이므로 좋은 대상을 자기 소유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일까? 아니면 나쁜 대상으로부터 지키는데 실패했다는 것일까? 어머니라는 통합적 인식이 생기면, 아이는 나쁜 대상이 이제 ‘환상적 박해자’가 되어 ‘어머니가 이를 보호해주거나, 동시에 공격받는다’고 느낀다. 좋은 대상과 달리 아이는 어머니게 속한 나쁜 대상(젖가슴)에 대해서만 ‘박해자’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인가? 이 나쁜 대상은 내면의 구강가학증의 결과인가?
아이가 타자를 좋고 나쁜 것으로 분리하는 대신 하나의 전체로서 경험하게 됨으로써 많은 이익이 얻어진다. 아이는 자기의 고통과 좌절이 순수한 적의와 악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류와 불일치에 의해서 생긴 것임을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로 편집적 불안이 줄어든다. 박해의 위협이 감소함에 따라 분열의 필요성도 줄어든다. 유아는 자신의 외부나 내부의 힘들에 의해 파멸되거나 오염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이가 편집-분열적 자리를 벗어나게 되자 새로운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클라인에 의하면 생의 주된 문제는 공격성을 안전하게 담아내고 통제하는 것이다. 편집-분열적 자리에서 공격성은 나쁜 젖가슴과의 증오스런 관계에만 제한된다. 공격성은 좋은 젖가슴과의 사랑하는 관계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다. 유아가 좋거나 나쁜 경험들을 전체대상과의 양가적인 관계로 한데 묶기 시작하면서 편집-분열적 자리가 제공했던 평정은 깨어지게 된다. 이제 유아의 적대적 환상 속에서 파괴되는 것은 나쁜 젖가슴이 아니라 유아를 잘 돌보지 못함으로써 유아를 갈망하게 하고 좌절시키고 분리시키는 전체대상으로서의 어머니이다. ... 자신을 좌절시키는 전체대상을 파괴함으로써 유아는 보호자와 피난처를 함께 제거해버린다. 유아는 강렬한 공포와 죄책감을 우울 불안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유아가 전체 대상을 향하여 사랑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는 경험조직을 우울적 자리라고 명명하였다. (프로이트 이후 173p)
우울적 자리의 방어기제
우울적 자리에서 ‘박해불안’과 ‘우울불안’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기 때문에 유아는 고통스럽다. 이 우울적 자리는 아이에게 ‘새로운 방어기제’를 발달시키는데, 이전 방어기제가 ‘분열, 이상화, 축출, 멸절’이라면, 여기에 추가 하여 ‘조적 방어기제’를 형성한다. 조적 방어기제는 ‘부인과 맹점화’를 통하여 심리적 실재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 ‘전능화, 경멸, 승리감’을 갖게 한다. 조울증에서 조증 상태는 ‘자신에 대한 전능감, 승리감, 타인에 대한 경멸’의 상태를 보여준다. 또한, 애도에 관해서는 “무의식적 경멸과 승리감” 역시 상실에 대한 방어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상태는 애도의 기간이 길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아이는 사랑하는 대상이 유일하다는 것과 자신이 그 대상에게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어머니, 아버지, 연인들은 쉽게 떠나버린다. 그들은 다 똑같다. .... 자신이 무기력하게 대상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하여, 또 그 그 대상들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하여 아이는 타자의 개성들을 일반화시켜버리고 일시적으로나마 환각에서 위로를 얻는다. (프로이트 이후, 176p)
클라인은 “비정상적인 애도와 조울상태 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애도에서도 유아기의 우울은 재활성화” 된다고 보았다. 성인기의 우울은 우울적 자리의 재활성화 상태이다. 멜라니 클라인은 우울적 자리의 과제를 “좋은 대상의 내사를 안정적으로 확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궁극적으로 좋은 부모를 다시 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 속에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부모와 같은 사랑”을 성인이 되어서도 받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그런 좋은 대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흔한 말로 “자기자신을 사랑”하라는 말로써 다시금 우울적 자리의 과제를 수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울적 자리에서의 창조
한편, 우울적 자리를 극복하는 과정 중에 창조성, 승화가 도입된다. 멜라니 클라인은 자아가 ‘좋은 내적 상태를 재창조’하고 ‘전능감을 포기하면서 외적 대상들을 복구’하려고 노력할 때, 자아는 풍성해지며, 이 풍성한 자아가 승화와 창조성 노력의 원천이 된다고 보았다. 우울적 자리의 복합적인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자아 사용하는 방어기제의 가장 높은 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울적 자리의 과제가 좋은 대상을 내사화하려는 것이라면, 이 좋은 대상이란 외부의 대상, 라깡 이론에 의하면 ‘대타자의 도입’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우울적 자리에 외부의 대상이 아닌, 내부의 대상 즉, ‘무의식과의 조우를 통한 창조성’의 도입은 앞서 ‘자기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좋은 부모를 갖지 못한다고 해도, 잘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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