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MBTI는 INTP이다. '논리적 사색가'로 대변되는 이 유형은 다소 소수라고 한다. 문제를 풀며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가늠하면서 솔직한 답변을 되도록 애를 썼지만, 이것이 내가 욕망하는 이상적 자아인지 실제의 내 모습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유형을 읽으면서 '맞다' 혹은 '대충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유형이 나왔어도 '대충 맞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점집'이 먹고 사는 이유도 귀신같이 맞혀서가 아니라 인간의 유형이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기도 한 이유다. 마치 증상의 이름을 알았을 때의 안도감처럼 우리는 하나의 유형에 수렴될 때, 우리는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안할 때 마다 그 타자의 기표들을 꺼내 쓴다. 자신은 '논리적 사색가'이며, 그들은 '이러저러하게 행동' 할 것이며, 따라서 원인을 파악하기 보다는 마치 그런 유형이 처음부터 있었으며, 그런 유형에 속하기 때문에 그러한 결과를 나았다는 귀결을 만든다. 일상 속의 신화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기표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설명해줄 다른 '테스트'가 나오면 다시 휩쓸리고 만다.
한편, 우리는 자신의 이해 뿐만 아니라 타자의 모호함을 쉽게 MBTI로 치환하기도 한다. MBTI를 묻는다는 것은 그들의 성향을 아무 노력없이 파악하고 이해하겠다는 태만하고 오만한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의식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신화가 아닌 일종의 오락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어떠한 불협화음이 일어날 때는 그 지식을 불러내어 원인의 자리에 놓고 타자를 나의 오해 속에 밀어넣는다. 그것은 일종의 타자의 무의식에 접근처럼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타자의 '자아'일 뿐이다. MBTI로 자신을 규정할 수록 그것을 벗어나는 패턴에 대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상징화되지 못한, 혹은 상징화에 실패한 그것은 또 다른 MBTI를 찾는 환유 속에 빠질 것이다. 우리가 혈액형, 별자리를 지나 MBTI로 넘어왔듯이...
우리는 이 기표적 환상은 일시적으로 불안을 잊게 한다. 잉여향유의 모든 것들은 불안을 대체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원적 상실을 보상받는 차원이 아니라 가짜 향유 속에서 불안을 잠시 망각할 수 있는 마취제인 것이다. 마취는 금방 풀린다.
잉여향유의 연옥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탈할 수 있을까?
타자가 만든 인간유형, 즉 팔루스를 내재화하지 않도록 매순간 의식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즐기면 되는 것일까? 자신만의 기준이라는 것도 타자적이다. 우리는 '거기서 거기'가 아니다. 각자가 '고유한 실재'를 가지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분절해도 각자의 실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재는 녹록치 않다.
고군분투.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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