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범주없는 글쓰기

에크리 필사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

untold 2023. 6. 2. 12:54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

 

하나의 구조가 정신분석으로 불리는 실천을 구성하고 있다. 오늘 여기 모입 사람들처럼 철학에 조예가 깊으리라 사료되는 청중은 이 구조에 무관심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자라는 것은 세상 모두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그와 같은 말의 타당성 여부가 그것의 결정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 특수성을 갖고 있는 흥미로운 진술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되어야만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철학적 타당성인데, 왜냐하면 헤겔이 정신현상에서 역사에 대해 제시하는 도식은 결국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요약하는 것은 주체를 위치시킬 수 있는 용이한 매개를 마련해주는 이점을 갖고 있다. 주체와의 관계에 기반해서 말이다. 또한 그것은 이 관계의 모호성을 보여주기에도 용이하다. 그와 동일한 모호성이 오늘날의 세계에서 과학의 결과들에 의해 드러나고 있다. 과학이 그저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과학을 하는 학자도 하나의 주체, 특히 체질에서 제대로 자격을 갖춘 주체이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또는 적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주체는 이미 실제로 과학의 결과들에는 온 세상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적어도 현대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그와 같은 모습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무지한 점과 관련해서는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주체와 동일한 수준에 있다.

그야말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과학의 주체에 대해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성공보다는 주장을 더 많이 내세운다고 할 수 있는 인식론이 필적하려고 하는 것이 이 주체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헤겔을 참조해온 것은 모두 우리 목적인 정신분석가의 양성을 위해 정신분석이 말 그대로 전복시키고 있는 바와 같은 주체 문제와 관련된 현황을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기 위한 전적으로 교육적인 이유에서 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길을 따라 나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해주는 것은 물론 그러한 실천에 대한 우리 경험이다. 우리 뒤를 따를 사람들이 증언해주겠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든 것은 그러한 실천을 전달 할 때 발생하는 남용들에 의해 배가되는 이론의 무능력으로, 그건은 설사 실천 자체에는 무해할 수도 있지만 앞으로 두 경우 모두에서 과학적 지위와 완전한 결여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와 같은 지위를 얻기 위해 필요한 최소조건에 과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아마 적절치 못한 출발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갈 길이 요워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회를 문제시하는 것과 같은 어떤 장황한 일이 아니다. 특히 영국과 미국에서 정신분석의 이름을 빌어 자행된 분석 실천에서의 악명 높은 탈선들에 맞서기 위해 내가 내놓을 수 밖에 없던 결론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과 규정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전복으로, 우리가 앞서 자격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 본 모임에게 지금으로서는 이 모임 밖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즉 이 모임 밖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없는 점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즉 이 모임 자체를 우리 논증의 주축으로 삼을 수는 없을 텐데, 물론 그들에 대해 그렇게 적은 여지를 준 것을 정당화해야 할 책임은 우리가 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모임의 호의에 기대 경험주의가 과학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동의 된 것으로 간주한다.

두 번째로, 우리는 심리학이라는 이름하에 과학이라는 명찰을 붙임고 이미 구성된 것을 만나게 된다.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에 대해서이다. 다름 아니라 우리가 입증하겠지만 프로이트적 경험이 도입한 바와 같은 주체의 기능은 전제들을 어떤 형태로 재포장하건 심리학이라는 이름하에 단지 아카데믹한 틀을 영속시킬 뿐 인 것을 송두리째 실켝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틀의 기준은 주체의 통일성인데, 그것이 그러한 종류의 심리학의 전제 중의 하나이며 심지어 마치 의식의 어떤 주체의 복귀가 문제이기라도 하듯 또는 마치 심리적인 것을 유기체의 안감을 이루 것으로 인정해야 하기라도 하듯 그러한 주제가 점점 더 강조되어 부각되는 것을 징후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전통적인 사고 전체가 전혀 무근거하지는 않게 깨달은 상태라는 용어를 부여하는 데서 하나로 합류하고 있는 생각을 전형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플라톤이 말하는 황홀경이건 불교에서 말하는 삼매 단계건 또는 환각제를 통해 경험하는 생생한 체험이건 이론이 그중 어떤 것을 진정한 것으로 간주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인식이 동종성으로 인해 포함하고 있는 것의 영역 속에서 진정한 것으로 간주된다.

헤겔적 지식이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논리주의적 지약에서 현대 과학만큼이나 앞서 말한 상태들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데, 현대 과학은 앞서와 같은 상태들엑서 모종의 좌표를 규정할 수 있는 기회라는 의미에서 경험의 대상은 인식할 수는 있어도 어떤 경우든 말하자면 인식을 낳거나 영혼의 분출을 가져올 수 있는 고행같은 것은 인식 할 수없다.

앞서와 같은 상태들을 참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적젏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이다.

우리는 앞서와 같은 상태들은 프로이트적 실천에서는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을정도로 여러분이 그러한 실천에 대해 충분히 알 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사람들이 입체적으로 평가하고 있지 못한 것은 소위 이 심층 심리학은 예컨대 앞서와 같은 상태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은 꿈조차 꾸지 않으며, 앞서와 같은 상태들에게 이 심리학이 여정으로 그려나가는 것에 대한 조금의 몫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이트가 심지어 그저 최면상태로부터 단지 히스테리 현상만 설명해야 했을 때도 최면상태에 대해 거리를 둔 것의 의미가 바로 거기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편집증적 인식의 위치를 탐색하면서 비옥한 순간들이라고 불렀던 것은 프로이트를 참조한 것이 아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비논리성에 열중해 있는 환경 속에서 우리처럼 무의식에 대해 질문하는 것, 즉 무의식이 어떤 황홀경에 빠지거나 급습당한 상태에서 내놓는 것과 같은 종류의 대답이 아니라 그것이 왜냐고 하냐면 이라는 대답을 내놓을 때까지 질문하는 것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이해시키는 것은 제법 만만치 않은 일이다.

우리가 주체를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면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이미 일종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독을 향해서이다. 이 논리 속에서는 예를 들어 질문하는 목소리 또는 심지어 논증의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 에크리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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