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활동 지평으로서의 신체
먼저 메를로퐁티는 의식은 무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닌 충만한 전제로부터 시작한다고 보고 주장하며, 이에 전제는 바로 우리의 신체이다. 특히 의식, 의식의 감각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은 전체를 관망할 수 있는 추상적인 한 지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때문에 상대화된 국지적인 지점에 놓여있을 뿐이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국지적인 지점을 놓여서 상대적인 관점, 제한된 관점에서 의식 활동을 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논점이다. 메를로퐁티의 신체는 라깡의 실재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이는데, 라깡의 실재는 '의미가 주어지지 않은 사물로서의 신체'이다.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우리의 신체에 의해서 세계에 존재하는 한, 우리의 신체로 세계를 지각하는 한, 세계의 경험을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소생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신체를 가지고 지각한다면 신체는 자연적 자아이자 말하자면 지각의 주체”일 것이라고 말한다. (지각의 현상학, 316쪽) 메를로퐁티는 우리의 신체의 지각은 '규정된 대상의 총합으로서가 아니라 규정된 모든 사고에 앞서 스스로 우리의 경험에 끊임없이 현존하는 잠재적 지평으로서의 신체'라고 본다. (지각의 현상학, 158쪽) 따라서 우리는 이 신체를 의식의 기원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의식의 소산이 아니다. 다시 말해 신체는 의식에 주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의식 활동이 가능하기 위한 지평이다. 이와 같은 개념 속에서 우리는 본다는 것 역시 우리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함을 메를로퐁티는 주장한다.
데카르트는 우리의 의식을 사물처럼 간주하여 생각한다는 것, 즉 레스 코기탄스(res cogitans)라 불렀다. 데카르트에게 명석판명한 것은 감각이라는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남는 것인 바로 사유, 즉 의식한다는 것만이 확실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하는 행위, 사유하는 행위에 대한 보증은 어떻게 가능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답은 결국 '선한 신'이라는 신학적 원리를 끌어들임으로써 해결할 수 밖에 없었다.
의식은 항상 대상을 향해 있으므로, 데카르트의 코기토처럼 고립된 것이 아니다. 현상학에서는 우리가 대상에 대한 어떤 선입견의 지배를 받는 행위를 '판단중지'를 통해 사태에 직접 접근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은 '의식을 대상을 구성하는 활동'으로까지 생각한다. 후설은 우리 의식이 일반적인 경험적 의식보다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대상 구성적 활동을 수행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였고, 이 대상을 구성하는 주체는 '상호주관적인 주체'라고 말한다.
후설의 현상학은 의식을 원천의 자리에 두고서 철학을 설계하려 한 데카르트적 전통의 흐름안에 있으며, 대상 구성의 역할을 하는 의식의 활동올 밝히되 추상적인 차원에 머무르며 그 작업을 수행한 칸트의 작업을 가장 구체적인 경험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쇄신하고 있다. 이런 유의 철학의 반대편에서 전개된 철학의 전통은 의식에게 원천의 자리가 아니라 결과물의 자리를 배당한다. 대표적으로 스피노자가 그렇다. 의식은 자연의 과정의 결과물일 뿐인데 우리 상상력은 한낱 결과일 뿐인 의식이 원인인줄로 착각한다. 현대에 와서는 구조주의적인 철학들이 유사한 발견을 하고 있다. 이 입장에서 의식은, 언어구조가 되었든 사회구조가 되었든, 의식되지 않는 심층 구조로부터 나온 결과물일 뿐이다.
칸트는 초월론적인 관념론으로 주체가 경험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다시말해 경험자체는 초월적 지위를 가질 수 없으며, 초월적인 것은 종합하는 의식, 의식의 종합을 표현하는 범주와 그 범주에 기반한 원칙들이라고 보는 주관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칸트의 관점에 대해 메를로퐁티는 비판한다. 후설 역시 칸트의 철학을 세속 철학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주관을 세계를 향한 초월로서 인식하는 대신 세계를 주관에 내재하는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공간 자체는 그의 모든 현상들과 함께 표상으로서 우리안에 있지만, ‘경험을 구성하는 주체는 신이 아닌 이미 구성된 세계안에 있다는 점은 간과’하였다. 다시말해 칸트는 초월적 주관에 의식이 있다고 보았으나, 이는 초월적 자아와 경험적 자아가 분열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는 맹점이 있다. 우리의 의식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며, 객관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객관적, 선경험적인 것이 있다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생각이다.
메를로퐁티는 의식에 관해 “세계가 의식에 의해 구성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의식이 이미 세계안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칸트가 우리의 의식이 세계를 구성한 것처럼 보는 관점과 대립되는 관점이다. 메를로퐁티는 근대철학이 의식의 보편성에 대해 대해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보편성이 전제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았다. ‘의식이 사적인 것이라면 내면의 말소리에 불과’할 것이고, 유아론에 불과할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의식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라는 코키토”가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했다. 그는 우리의 의식 활동은 타자의 시선에 의해 보이고, 그러한 방식으로 정체성을 확보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의 시선에 서로가 보이는 방식으로 마련된 선의식적, 선객관적인 공동체를 전제로 자기 의식 활동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선의식적 지각이란 무엇인가? 메를롱퐁티에게 중요한 것은 신체가 지각이 이루지는 지평이고, 추상적으로 객관화된 세계의 이면이 아닌, 과학적 설명 이면의 가공되지 않은 세계를 강조한다. 메를로퐁티는 세계의 경험을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대로 소생” 시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세계는 선객관적인 세계이며, 공간을 필요로 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의 앞선 ‘나는 할 수 있다,행한다’의 세계이며, 이는 우리의 신체라는 지평이 있어야 모든 의식적인 체험이 가능함을 뜻한다. 메를로퐁티는 우리 존재방식이 영향을 주면서, 영향을 받는 양면성에 있음을 그의 이론 전반에서 주장한다. 이러한 양면성을 교차(chiasm)으로 표현했고, 근대적 주체의 자발성과 달리 신체는 수동성과 자발성이 교차하는 식으로 존립했다고 보았다. 선의식적 차원의 공통성으로서 지평인 신체는 살(chiar)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살은 물질이 아니고, 정신이 아니며, 실체가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200쪽)
바로 우리의 의식의 기원이 의식 자체가 아님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식은 스스로를 기원으로 여기지만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의식이 다가 가지못하는 선의식적인 신체적 지평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라깡은 메를롱퐁티의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라깡세미나 11에서 응시라는 개념을 도출하여 설명한다. 메를롱퐁티는 “우리는 보이는 한에 본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보이는 한에서만 볼 수 있다. 이것이 눈이라는 신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 이라고 말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311쪽)
이 글에서는 메를롱퐁티의 봄과 보여짐이 라깡이 말하는 응시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살펴보고, 세잔의 그림을 통한 메를리퐁티의 철학과 라깡의 접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통적 회화 기법 : 눈속임
메를로 퐁티는 <눈과 마음>에서 '르네상스 원근법은 회화의 모색과 역사를 마감한다고. 정확하고 오류 없는 회화의 기초를 놓는다고 자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 한해, '르네상스 원근법은 오류' 였으며,,,,, 화가들이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근법의 테크닉 가운데 정확한 해답은 단 하나도 없다' 말한다.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일종의 시각적 오류라는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에서 메를로퐁티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근법은 일종의 눈속임이다. 우리 의식의 표현인 시선은 우리의 신체, 바로 안구에 제한되어 있고, 안구는 하나의 고정된 지점에서 원근법적으로 단번에 사물의 전모를 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비전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즉 비전은 결코 소실점 같은 원근법상의 하나의 지점에서 구성되지 않고 눈의 운동에 따라 부분, 부분이 종합되면서 구성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비전은 철저히 신체에 바로 눈의 움직임에 좌우된다. 그런 까닭에 비전은 원근법적 종합이 아니라 轉移의 종합의 산물이다. “개개의 조망은 다른 조망”으로 넘어간다. 사람들이 여전히 종합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전이의 종합’이 문제일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 495쪽)
우리가 본다는 것은 우리의 안구운동을 하여 여러 조망을 하나의 조망으로 종합하는 것이므로 원근법을 통한 사물의 모습은 허구라는 것이다. 이어 눈과 마음에서도 메를로퐁티는 “온전히 실현된 회화 같은 개념이 의미가 없어진다. 세계가 수백만년 동안 계속된다 해도 화가들은 언제나 세계를 그려야 할 것이요. 세계는 미완성 상태로 끝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완전하게 우리의 눈이 보는 것을 이식한 그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세잔의 회화는 원근법을 무시한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이였다. 메를로퐁티는 자신의 철학과 맞닿아아 있는 세잔의 회화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다.
세잔의 회화
세잔은 기존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세잔이 자연의 일부를 포착하려 시도했듯이 지각적 세계 자체를 포착하려 시도” 세잔이 그리기 원했던 것은 이런 일차적인 세계이며, 메를로퐁티는 지각, 인식이전의 세계 , 지성이나 과학에 대해 일차적인 지각적 경험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세잔이 바로 일차적 경험으로 되돌아간다고 보았던 것이다. (메를로퐁티현상학과 예술세계, 82쪽)
메를로퐁티는 세잔의 '생빅투아르산' 작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그의 그림은 역설적인데가 있었다. 왜냐하면 감각적안 표면(sensuous surface)을 포기하지 않은 채 오직 자연에 매한 직접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그러고 뚜렷한 형태 윤곽을 짜르지도 않아, 색채를 둘러싸는 윤곽선도 없고 나아가 원근법적이나 혹은 회화적인 배열도 없은 채 그러면서도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베르나르는 세잔느의 자살 행위라 불렸다.”(세잔느의 회의, 191쪽)
세잔느는 베르나르와의 대화에서 “하나의 새로운 광학”을 개발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자연과 예술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것, 즉 “예술이란 개인의 통각을 구현시켜 지성의 힘으로 작품을 구성”시킨다는 것이다.
메를로퐁티는 이 작품을 어떻게 세잔이 그렸는가를 설명한다. 이 산의 여러국면을 계속되는 눈의 운동을 통해 부분과 부분을 부단히 종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그림은 '눈의 운동의 따른 여러 각도에서 보이는 면들의 수없는 중첩'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잔은 원근법과 같은 전통을 거부하고, 의문을 제기하였다. 또한 그는 감정과 사고, 혼동과 질서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원근법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 갈은 현장에 충실함으로써 세잔느는 최근의 심리학자들이 공식화하게 된 것을 발견하였다. 즉 우리들이 실제로 지각하는 원근법은 기하학적인 것도, 사진기의 원근법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 (타자철학, 193)
세잔느는 어떻게 그림을 보고, 그렸을까. 그는 꼼짝않고 풍경을 몇시간이고 바라보면서, 자신의 과학적 지식을 지우고, 일체의 것을 바라보는 발아의 순간을 기다리며, 이 순간에 '모티프'를 찾았다고 말하였다. 메를로퐁티는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풍경의 구조를 재포착'한 세잔느의 방식은 단지 풍경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이 세잔느의 내부에서 풍경 스스로 사유하는 것이므로, 세잔느가 오히려 풍경의 의식이 된다는 것이다. 세잔느는 '이 세계를 묘사하고자 했으며, 그것은 하나의 광경으로 완전히 바꾸어서 마침내 이 세계가 어떻게 우리에게 접촉되고 있는가를 가시적'이게 해주었다. 이와 같은 세잔느의 방식은 메를로퐁티의 철학과도 일치하는 면이 있었는데, 그는 우리게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삶의 과정에 있어 우리가 원래의 상황을 넘어서면서도 동시에 동일한 것으로 있기를 중지하지 않음으로써 가능할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결정된 존재가 아니나, 끊임없이 과거에 발목에 잡혀 무언가를 결정되어 버리는 사태에 대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유대관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이 자유가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방식과 함께 이러한 두가지 사실들을 동시에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응시의 선재성
세잔느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풍경의 의식이 되고자 한다. 이러한 인식은 바라봄에 대한 메를로퐁티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타자와의 관계 역시 신체라는 공통적인 측면에서 '봄과 보여짐'을 사유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메를로퐁티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볼 수 있거나 타인이 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본다' 라는 것이 양자가 공유하는 살, 신체에 귀속하기 때문이다. 본다라는 나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은 그 경험들 배후에 있는 하나의 동일한 신체의 두 측면이다. 보는 일은 자아나 타자의 개별성이 아니라 양자에게 공통적인 신체의 시각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메를로퐁티의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출간에 따라 시관적 기능을 의식을 무의식의 관점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는지를 규정하고자 한다.
라깡은 세미나 11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누군가의 눈이 우리를 보고 있다는 점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쪽으로 나있으니 말입니다. …. 메를로퐁티가 일러준 길을 따라 우리가 파악해야 할 것은 응시의 선재성입니다. 나는 다만 한 지점에서 볼 수 뿐이지만, 나의 실존 속에서 나는 사방에서 응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라깡세미나11, 114쪽)
이어 라깡은 메를로퐁티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시관적 장'에서 우리의 '존재론적인 위상은 그 장이 미치는 더없이 작위적'일 뿐 아니라 '더없이 허약한 효과들'을 통해 난다고 보았다. 본다는 것이 작위적이고 허약하다는 것이다. 라깡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분열은 우리가 현상학적 경험의 지향성을 따라 세계로 향할 때 그 세계로부터 어떤 형태들이 부과된다” 고 말한다. 보는 것에 앞서 보여짐의 응시가 우리 앞에 선재하는 이는 “우리의 지평에 나타난 경험의 막다른 골목, 즉 거세불안의 구성적인 결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기묘한 우발성이라는 형태로만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고 말이다. (라깡세미나11, 115쪽)
라깡은 눈과 응시의 분열을 시관적 장의 수준에서 충동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으로 본다. 메를로퐁티가 '보여짐'을 가정한 것에 나아가 그 '보여짐'의 기원은 충동이라는 것이다. 라깡세미나 11에서 “눈과 응시의 분열, 바로 이것이 시관적 장의 수준에서 충동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임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저는 우리가 세계의 광경속에서 응시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식하는 존재로 만드는 것은 동시에 우리를 세계의 거울로 위치시킵니다. 제가 조금 전에 메를로퐁티를 따라서 이야기한 우리를 에워싸는 응시,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엇보다 우리를 응시되는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응시, 바로 그러한 응시에 의해 우리는 응시되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라깡세미나11, 118쪽)
라깡은 우리가 보는 것은 응시의 기능에 대한 회피일 수 있으며, 왜냐하면 '응시'는 상징화 될 수 없는 실재로서 우리에게 불안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시관충동으로서 응시는 라깡이 말하는 부분충동의 하나이다. 구강충동, 항문충동, 호원충동, 시관충동이라는 네가지 충동이 유아기에 형성된 충동으로서 그 중 '응시'는 라깡에게 가장 문제시 된다.
라깡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무의식의 응시이다. 그것은 주체 없는 응시이며 부모-대타자의 응시였던 것이 분리되어 나와 그 자신의 독립성을 획득한 것이기에 그것은 부모도 신도 그 어떤 실질적인 존재의 응시도 아니다. 그저 응시 자체만 있으며 이것에 방어하기 위해 시각적 현실들, 관념화된 표상들이 구축되었을 뿐이다. “내가 지각한 그 표상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 주는 양극적인 반영관계”(라깡세미나11, 128쪽)를 구축하려는 주체는 ‘나는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본다’라는 관조하는 주체의 특권이 형성되지만 주체의 상황이 악화될 때 증상적 흔들림 속에서 미약해진 특권은 대상a로서 주체를 흔들게 된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주체의 의식의 토대가 철저하게 이상화된 것으로서 한계 지어진 오류의 원리라면 데카르트적 성찰이 최소한 세계의 표상들에 대해서 그것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무화하는 능동적 과정이며 이 같은 데카르트적 무화의 역능은 마침내 하이데거에 와서 존재 자체에 무화의 힘을 되돌려 준다고 라깡은 지적한다. 여기서 무화의 역능이란 주체도 존재도 아닌 증상의 차원이며 모든 종류의 상징화에 저항하는 응시와 같은 신체의 사건이다. 라깡은 이어서 메를로퐁티 역시 “모든 반성에 선행하는 어떤 것으로 올라갈 것을 제안”(129쪽)한다고 말한다. 거울단계에서 결정되는 신체 이미지의 상상계적 대상이 아닌 파편적 사태로서의 분열된 기관이 진정한 실재로서의 응시이다. 이를 통해 인간 주체는 시각적 주체로서 출현하기 이전에 이미 보임을 당하는 자로서 수동적인 사태이며 “자신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보는 ‘환영 속에 있는 의식이 응시의 뒤집힌 구조에 기초하고 있음을”(130쪽)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대상a로서의 응시의 특권
라깡은 주체의 환원이 이뤄지는 장 속에 어떤 균열이 각인되는 최초의 무화의 지점이 응시라고 말한다. 정신분석은 의식을 한계 지어진 것으로 이상화[관념화]의 원리만이 아니라 몰인식의 원리로 규정하는데, 이 의식을 시각적인 분야에 쓰이게 되면서 암점scotome으로 규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멸하는 지점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암점은 심리학과 정신분석에서 방어기제로서 현실 부정이나 망각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시각의 장을 구성하는 것은 알지 않기 위하여 보지 않기 위하여 응시-실재에 대한 방어로서 주체의 의식은 암점화 된다. 응시는 시각장의 강력한 견고한 방어에 의해서 언제나 몰인식되어 빠져나가는 포착 불가능한 대상이며 이것은 주체의 시각장의 방어가 붕괴는 아주 드문 순간에 주체를 ‘불시에’ 엄습하는 특징을 갖는다.
라깡은 주체가 자기 자신의 분열로부터 얻는 이익이 그 분열을 결정짓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다시 말해 실재가 근접함에 따라 이뤄진 자기절단 그 최초의 분리로부터 출현한 어떤 특권적인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대상a, 응시로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대상a는 자기 자신의 분열로부터 얻는 이익이다. 즉 대상a는 어머니의 대체물이며 우리는 그 대상a를 원인으로 해서 욕망하게 된다. 이어서 라깡은 주체가 어떤 본질적인 흔들림 속에서 환상에 매달려 있다면 시관적 관계에서 그 환상이 의존하는 대상은 바로 응시이며 응시의 특권은 바로 응시의 구조 자체에서 연유함으로서 그 특권 때문에 주체는 자신이 응시에 의존하고 있음을 그토록 오랫동안 몰인식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같은 이유에서 주체는 ‘나는 내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본다’는 의식의 환영 속에서 점 형태로 소실되어가는 자기 자신의 자취를 그토록 즐겁게 상징화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환영 속에서 응시는 생략됩니다. 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즐겁게 상징화할 수 있는 것은 응시가 억압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맹인의 광학
“우리는 시각의 어떤 연결 통로를 따라 욕망의 장에 통합되었는지에 따라가 봄으로써, 욕망의 기능 속에서 응시가 갖는 특권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성찰이 주체의 기능을 순수한 형태로 출범시킨 바로 그 시대에 오늘 제가 기하광학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구별하게 될 광학의 차원이 발달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라깡세미나 11, 134쪽)
라깡은 위에서 언급했던 르네상스의 기하광학적 조망점(원근법)이라는 것이 응시와 관련해서 어떻게 욕망의 영역으로 들어오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욕망과 관련하여 안정된 장을 형성하려는 상징계의 기능은 회화가 이미지를 조직하는 원리와 동일한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라깡이 제시하는 회화의 장치는 왜상이라고 번역되는 아나모르포시스,라는 이미지 조작게임이다. 원통형 왜상이 아닌 단순 왜상은 이미지를 바라보는 일반적 위치로부터 일탈된 하나의 특수한 시점에서만 보일 수 있도록 고안된 시각적 조작이다. 이에 앞서 라깡은 1525년에 뒤러가 만든 <화가들이 만든 매뉴얼>을 언급한다. 뒤러가 정리한 원근법의 왜상 장치를 보면 어떻게 이미지가 하나의 고정된 함수관계를 통해 일률적인 공간을 구성하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즉 라깡이 말하고 있는 “원근법 연구는 시각영역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집중되는 곳”(136쪽)이며 이것은 광학의 세계와 기하학이라는 수학적 좌표화된 언어에 의해 근대의 원근법이 출현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하광학적 원근법을 중심으로 회화사 속에서도 완전히 그림이 구성되며 우리는 너무나 중요한 이 그림이라는 기능을 살펴보게 될 것”(136쪽)이라고 또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방식의 구성이 시각의 핵심을 완전히 놓치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맹인 또한 시각의 기하광학적 공간을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라깡세미나, 136쪽)
라깡이 위에서 언급한 디드로가 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위해 쓴 맹인에 대한 서한』에서 “기하광학적 원근법에서 관건은 시각이 아니라 공간”(136쪽)이라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사실상 시각이란 보는 것이 아니라 강제된 하나의 함수를 통해 대상의 이미지를 관념화 또는 좌표화하는 방식으로 상상하는 것에 불과하다. 공간의 좌표는 언어인 것이고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닌 듣는 것과 읽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굴절광학을 보면 양 눈은 마치 두 개의 막대기가 결합되어 작용하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따라서 시각의 기하광학적 차원은 시각의 장 자체에 의해 제시하는 주체화의 본원적 관계를 완전히 규정해주기엔 한참 부족합니다.”(라깡세미나, 136쪽)
세계는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짐이 선재한다는 메를로퐁티의 관점을 토대로 라깡의 응시개념을 살펴보았다. 보여짐이 먼저라는 메를로퐁티의 아이디어는 라깡의 응시 개념에 큰 영향을 미친듯이 보이다. 메를로퐁티는 의식의 기원이 의식이 아니라 신체라는 지평에서 선의식적으로 출발한다고 가정을 하였고, 선의식적인 출발점이 라깡이 말하는 응시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각의 0도로 볼 수 있는 응시는 그 기원이 유아기의 성충동에서 비롯되지만, 다시 억압된 것이 회귀되었을 때는 그것은 상징화되기 어려운 대상a로서 출몰한다. 세잔느의 회화 역시 그 응시의 출몰을 적극적으로 조우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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