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향락, 우리는 잉여향유라고 불러왔다. 알렌카 주판치치가 라깡이 시니피앙과 향락을 개념적으로 어떻게 연결하는지, 잉여향유가 어떻게 도출되었는가와 관련되어 있는지가 규명하는 것이 이번 논문의 주제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주인담화, 히스테리담화, 대학담화를 통해서 시니피앙과 잉여향유의 관계를 어떻게 볼 수 있는지 규명하고 있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시니피앙과 향락관의 관계에서 라깡의 담론은 획기적인 답변이라고 서두를 시작한다.
그럼 이전 시니피앙과 향락의 관계는 어떠한가? 라깡의 인간학을 참조하면 다음과 같다.
자끄 알렝밀래는 주이상스의 변화를 6개의 패러다임으로 나눈다.
첫 번째 패러다임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대립으로 기표와 주이상스는 대립된다.
두 번째 패러다임은 ‘주이상스의 기표화 ’ 즉 상상적 주이상스에 대한 상징계의 식민화라고 볼 수 있으며, 상상계는 상징계에 통제되는 식민지다. 주이상스의 상상계적 모호함이 기표에 상징계 내부에 고정된다. 환상 역시 언어로 지탱된다. 이는 세미나 6에 해당되는 과정이다.
세 번째 패러다임은 세미나 7에 해당되며, 상상계적 주이상스가 실재계로 이관되면서 큰사물의 영토라는 개념으로 도약한다.
여기 주이상스는 실재계의 독자적인 영역이며, 밀례는 이를 ‘불가능한 주이상스’의 시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는 기표의 반복과 수렴을 통해 무의식의 언어가 끝내 비켜가려고 했던 주이상스의 중핵에 도달하는 실천이다. 여기서 반복의 개념은 상징계 자체의 본질로서의 반복이다. 즉 시니피앙의 반복이다.
이 시기의 기표와 향락의 관계는 기표로서의 증상은 큰사물에 대한 기표의 접점이 된다. 밀레는 이에 대해 “증상이란 주체가 주이상스를 나쁜 것으로 형식화하는 양태”라고 설명한다.
네 번째 패러다임은 주이상스의 국지화이다.
세미나 11에서 주이상스는 충동의 부분절편으로서 4가지 부분충동으로 개념화된다. 이로써 기표의 상징계와 주이상의 모호한 대상은 신체의 구체적인 장소로 소환되고 대면된다. 상징계에 의해 주체의 소외에 자리에 주이상스가 대상a의 형식으로 분리되어 보충된다.
다섯 번째 패러다임는 주이상스의 담론화이다. 세미나 17은 다섯 번째 패러다임에 해당한다. 라깡은 신체를 주이상의 공간으로 다루고, 이것을 포획하는 다양한 담화들, 특히 4가지 담화의 형식들을 주이상스의 획득의 구체적 도구로서 가정한다. 신체는 특정 담화들에 의해 주이상스가 금지되는 동시에 또한 한줌의 잉여-주이상스가 허용되는 공간이다. 여기서 기표는 주이상스의 결여를 표지하는 동시에 그것의 보충적 만족을 보장하는 유일한 실행자로 가정된다. 세미나17에서 상징계와 주이상스가 연결된다는 것이 이전 세미나와의 변화이다. 주이상스의 기표적 반복이라는 개념은 상징계가 아니라 주이상스 쪽에서 증상과 같이 연속된다. 이처럼 주이상스의 결여와 보충을 담당하는 것이 기교인 한에서 지식은 담화의 형태로 잉여향유를 보장하는 도구가 된다. 주체는 어떤 담화를 취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주이상스를 취하는 양상을 달리하게 된다. 기표에 연결된 주이상스는 오직 담화 속에서만 출현한다.
여섯 번째 패러다임은 세미나 20 앙코르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주이상스는 ‘라랑그’라는 특수한 개념, 일종의 옹알이와 같은 주이상스의 기표, 상징계 외부의 기표인 그것이 신체에 씨앗처럼 스며들어 발생하는 무엇이며, 이들이 구조화되면서 일종의 타성적인 상징계적 현상계를 출현시킨다. 따라서 주체와 주이상스의 관계란 문화 속에서 특정한 권력을 획득한 주요한 접속자들에 의해 타성화되고 있을 뿐이며, 이 같이 타성화된 주이상스의 접속과 배치에 문제가 있을 경우 타성적 접속자를 거부하고 새로운 접속자를 창안해내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와 같은 패러다임은 세미나 7에서 정립된 패러다임과 유사한데, 이것은 모든 구조를 가상적인 것으로, 환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이며, 그 어떤 구조도 선험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창조적 실천을 정신분석의 윤리를 간주하는 관점과 동일한다.
라깡은 세미나22에서‘주이상스는 주체에 하나의 고착적 환상을 가져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공동체가 지탱되는 것은 오히려 주체의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고착적 주이상스 효과라는 것이다. 주체가 무한성으로 끌리지 않도록 쾌락원칙과 마찬가지로 주인담화는 잉여주이상스로 주체를 가둔다.
여섯 번째 패러다임은 아직 접하지 못해서 호기심차원에서 길게 인용하였다.
세미나 16에서 라깡은 실상 대타자의 장이 주이상스가 깔끔하게 태워지지는 않았으며, 태워진 가장자리에 결여의 표식으로서 대상a가 출몰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제 상징계 내부에서 담화의 초과로서 잉여주이상스로 변모하여 텅빈 주이상스가 아니라 담화구조에서 초과되어 생산되는 잉여향유로서 대상a로 설정된다.
세미나17에서는 기존의 기표와 주이상스가 대립되던 것이 연결된다는 것이고, 주첵가 어떤 담화구조 속에 있는가에 따라 주이상스를 취하는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으로 요약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상징계에도 쾌락이 있다. 비록 가짜 주이상스이기는 하지만 쾌락의 모습으로 더 이상 위반이 아닌 잉여향유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쾌락을 탐닉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잉여향유는 예전과 같이 공백의 유령이기 보다는 담화의 실증적 효과로 나타나는데, 언어로 소통하는 세계속에서 무의식적 쾌락을 탐닉하는 4가지 유형이 4가지 담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라깡은 ‘말없는 담화’라고 표현한 것이다.
잉여향락을 소개하기 위해 알렌카 주판치치는 단일의 특색을 거론한다.
처음에 등장한 기침이 S1이라면 이 S1의 반복들이 잉여향유이다. 단일한 특색은 즉 상실과 보상의 두가지의 차원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상실을 나타내는 단일의 특색에게로 옮겨간다. 따라서 단일의 특색과의 동일시는 상실된 대상의 구조적 장소를 차지한다. 그와 동시에 이런 동일시는 그 자체가 대리보충적인 충족의 원천이 된다. ”
그러나 그것은 아무소용이 없고, 반복을 필요로한다. 쾌락원칙을 넘는 죽음충동의 원인이 바로 시니피앙의 반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향락은 우연히, 최초의 우발사건에 의해, 우발사고에 의해 작동하기 시작할 뿐입니다. 계속 돌아가는 살아있는 존재는 정상적으로 쾌락과 함께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만일 향락이 색다른 것이라면 또한 향락이 만일 단일의 특색과 반복의 허용으로써 이후로 그것을 하나의 표시로 설정되는 일이 벌어져 승인된다면, 그것은 향락의 의미로 매우 작은 변화에서 비롯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런 변화들은 결국 내가 피학증과 가학증 이전에 제안했던 실행에서조차 극단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향락의 우발성에 대해 설명한다.
라깡의 담론은 ‘시니피앙과 향락 간의 관계’라는 문제의 획기적 답변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는 자끄알렝 밀레에 의해 지적되어온 것이고, 라깡은 시니피앙과 향락 간의 근본적인 이율배반 속에서 개념을 정교화하였다. 라깡은‘신체의 기구에서 어떤 것이 무의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조된다’고 주장한 것과 ‘시니피앙과 향락사이의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다. 신체의 기구는 여기서 충동이 원인이 된 무의식의 발화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니피앙이 원인이 되어 향락이 발생한 것을 구조적 유사성을 봐도 좋을지 모르겠다. 충동과 증상, 시니피앙와 잉여향유는 보상이라는 구조적 유사성이 있지 않은가.
이어 지는 문단은 다소 어려웠는데, 갑자기 정치적 차원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논무의 후반부에 대학담화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한 전조라 생각된다. 나의 이해를 거칠게 담아보면 담론의 이론은 항상 시니피앙과 향락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담론의 본질적 차원인데, 이러한 인식은 정치적 차원에서도 제기된다. 정신분석이 정치에의 침투는 거기 담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이루어지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진리추구가 가능한 주이상스의 담론이 됩니다.
향락이 정치에 침투되는 것은 ‘즐기라’는 강요된 명령을 통해서이다. 이 명령은 강요된 것으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대학담론
라깡은 대학담론과 자본주의경제 사이에 근본적인 친화력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재형성된 주인담론으로도 볼 수 있는데, 모든 지식의 배후에는 권력이 있다는 사태는 자유로운 객관적인 선택이 실상 불가능하고, 눈가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예시로 저자는 다음과 같은 경우를 든다
“ 그에게 강요된 행동을 그가 해야되는 나쁜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경우, 그것은 그가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이것은 현재 ‘인지부조화’라는 심리와 유사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대학담론의 일면으로, “향락 그자 자체는 가장 현저하고 냉혹한 의무가 되어 있다 ”
유튜브에 빠져 나는 웃고 싶지 않은데, 몇시간씩 웃고 있다. 누워서 보느라 손목도 아프고, 핸드폰이 떨어져 머리를 강타한 적도 있다. 그러한 나의 웃음은‘돈’이 된다. 남이 태우는 간지러움 때문에 우는꼴이다. 그 거지같은 웃음속에서 나는 소외되어 있다. 돈이라는 권력이 늦은 밤 나를 사정없이 앗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들은 이 비유에서 향락은 설탕없는 제로콜라처럼 주체가 웃음소리의 효과음을 흉내내는 것일 것이다.
주인담론
알렌카 주판치치는 잉여향락을 ‘순수한 노동’으로 설명한다.
주인을 노예에게 시니피앙을 가지고 일을 시킨다. 노예는 지식을 생산한다. 그리고 주인은 생산한 지식을 소유한다. 이것은 ‘지식의 증유’라고도 표현된다. 주인은 노동에는 관심이 없고, 이것이 어떻게 지식을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갖게 된다. 노예가 일을 하여 만든 지식을 주인이 전유한 후 남는 것은 노예의 ‘순수한 노동’만 남는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폐기물이다. 노예의 이 순수한 노동이 잉여향유이다. 라깡은 이 개념을 마르크스의 잉여가치에서 잉여향유 개념을 들여왔다. 노동과 자본이 교환되면서 생기는 잉여노동을 주인이 착취하는 사태를 기표시장에서 기표의 교환 속에서 잉여향락이 발생하는 것으로 라깡은 등가시켰다.
‘잉여노동은 상징계의 부정적 규모로 나타나는 주체의 긍정적 상관물이다. 그리고 이것은 엔트로피의 요소이다.’
번역문의 이해가 어려워 문장을 분절해 봤다. 잉여노동이 엔트로피의 요소라는 물리학의 개념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잘은 모르지만, 엔트로피는 무질서로 증가하는 경향이라고 보았을 때 잉여노동이 증가된다고 하는 것을 잉여향유의 증가현상으로 본다면 현대사회에서 끝도 없는 잉여향유를 설명하는 걔념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잉여향유의 본질은 주이상스의 불가능이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니피앙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주이상스의 회복불가능이라는 상실의 차원을 계속해서 보충하는 것이 잉여향유인 것이다. 여기서 내게 잘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개념이 시니피앙의 반복이다.
단지 상실된 것은 회귀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한 이해에 그쳐도 될지 모르겠다.
다음은 히스테리 담론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히스테리는 행위로자로서 빗금친 주체의 담론이다. 주인담론에서 S1의 실제적 동기이기도 주체가 이제 행위자가 된다. 주체의 진실의 자리는 타대상이다. 저자가 설명하기를 ‘이 담론과 관련하여 근본적인 불가능성이 작동하기 시작하는데, 만일 주체가 원인의 원인으로서 작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타자의) 욕망의 원인’이 됨으로써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로서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라는 언명과도 일치하는 듯하다.
히스테리담론은 실제로 지식을 만들어내는 유일한 담론이다. 히스테리자의 논제는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히스테리자는 항상 불공평에 대해 불평한다. 주인이 무능하고, 시니피앙은 언제나 진실은 설명하지 못하고, 충족은 언제나 가짜 충족이라는 것이다.
히스테리 담화에서는 불공평함이 주체에게 자행되는데, 이 부분은 잘 이해가 안간다.
두 번째 논제로 제시된 것은 히스테리자의 목표는 주인의 거세가 아니라 주인이 충분히 거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인데, 히스테리자는 아버지, 혹은 주인이 거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충분히 거세 되어 있지 않는 것 = 거세를 은폐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는지 모르겠다. 히스테리자의 불평은 그럼 그가 충분한 주인이 아니라는 것인데, 이미 거세되어 있는 자를 충분한 주인이 아니라고 하면 거세를 은폐하려는 것이 아닌가? 오로지 목표는 주인에 대해 불평하는 것으로 그것이 잉여향락이 된다. 그 잉여향락, 오로지 끝없이 불평하는데 향락을 숨기고 있는 히스테리의 구조는 일상의 담화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 같다. 회식을 하면 우리는 항상 상사욕을 하면서 향락을 즐기지 않는가.. 그의 본성을 차치하고 그저 뒷담화의 열을 올리는 것을 즐긴다.
히스테리담화가 유일한 지식을 생산하는 것은 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히스테리자는 주인이 생산한 지식을 믿지 못하지 않는가.
“히스테리 환자는 정확인 전체적인 진실을 말할 것이 없는 그 절반에 두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그것에 대해 말해보려고 무엇이든 하고 있다. 히스테리 환자는 흔히 진실의 표명으로써 그녀 자신을 내놓고 그것을 말로 밝히는 대신에 그녀의 신체를 증상의 형태로 내줌으로써 그 자신의 존재 내에서 그것을 수행해 낸다. ”
“히스테리자는 불가능한 것의 수호자이다. 그 어떤 것도 그녀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무 그 자체는 충족의 중요한 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유는 향락이 진실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202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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