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파문 속의 진리

untold 2023. 6. 2. 12:49

정 

 

 

...그래서 때로 한 10년쯤 누워 있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모든 생각도 보류하고 쉽게 꿈꾸는 죄도 벗어버리고 깊이깊이 한 시대를 잠들었으면.

그러나 언젠가 깨어나 다시 시작해야 할 때의 황량함. 아아 너무 늦게야 깨어났구나 하는 막심한 후회감이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한다. 결국 그 거대한 타의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대항해서 싸우는 필사의 길 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밤에도 나는 이를 갈며 일어나 앉는다. 끝없이 던져지고 밀쳐지면서 다시 떠나야 하는 역마살의 청춘 속에서, 모든 것이 억울하고 헛되다는 생각의 끝에서. 내가 깨닫는 이 쓸쓸함의 고질적인 힘으로, 허무의 가장 독한 힘으로 일어나 앉는다. (1976)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15P

 

 

위의 글은 최승자 시인이 1976년에 쓴 산문이다. 최근에 묵혔던 산문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쓰자

끝.

 

1976년이면 그녀가 52년생이므로 그녀가 24세에 쓴 글이다. 그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문장은 낡아 보이지 않는다. 최승자 시인은 큰 사물로 침하 하였다가, 그것으로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의 ‘쿡’하는 웃음과 ‘그만 쓰자’라는 정색 사이에서 나는 그녀만의 중력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한밤에도 일어나 이를 갈며 쓴다.’에 밑줄을 긋는다. 그녀의 시대적 상황에서는 아마 대타자가 눈에 보이는 듯 선명하게 육박해 오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녀는 대타자보다 무서운 허무, 그리고 그것의 독한 힘, 라깡식으로 죽음충동의 힘으로 일어나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문장에 들어있는 허무의 ‘큭’ 때문에 절절매며 읽고 있다.

 

분석가의 인증

 

1964년 라깡은 국제정신분석협회에서 축출당한 후 기존에 강의했던 생탄병원을 떠나 파리고등사범학교라는 새로운 기지(base)에서 세미나 11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강의에 앞서 ‘어떻게 해서 이러한 강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는가’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은 10년 전부터 정신분석가를 대상으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는 소문 덕분에 청중을 상대로 ‘정신분석의 토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그 당시 그는 ‘정신분석협회’에서 축출되어 이 학교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배려한 ‘페르낭 브로델 학장’과 ‘레비스트로스’의 배려에 감사를 표하면서 강의 시작한다.

 

라깡은 ‘정신분석의 토대를 이루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의 세미나는 처음부터 그것에 내포되어 있었다’라고 말한다. 왜냐면 정신분석의 토대는 실천을 포함하고 있고, 그 실천의 요소로 정신분석가를 양성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이 권한에 대해 백상현 교수의 강해서에서 비교적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라깡은 1970년 파리프로이트학교에서 『Autre ecrit』 연설에서 “분석가는 오직 자기자신에 의해서만 인증될 뿐입니다.”라고 언급한다. 자끄알랭 밀레는 그 구절을 통해 이것은 개인에 의해 사용되는 언표가 아니라 사회전복적이며, 국가권력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를 양성하는 세미나 역시 그 어떤 사회적 권력 장치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LPI의 ‘정신분석가’의 인증은 교육분석과 논문을 통해 분석가의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절차로 구성돼 있지만, 외부에서는 그것이 국가나 어떤 협회에서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그 권한을 의심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라깡정신분석이 기존의 제도권 인증이 필요치 않다는 사실에서 이 또한 정확한 라깡정신분석의 실천의 일부일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타자의 장소에서 주체가 도래하는 경험만이 증상적 ‘그 자신’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그러한 순간의 경험만이 분석가로 허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분석가는 모든 권위, 고정관념으로 저항하는 순간의 시간과 공간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라깡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관련해서 몇 가지 애매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이에 관해 규정한 자신의 논문을 삭제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며, 지금 자신이 처해 있는 이 상황에 다시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그 당시 입지와 다른 내부도 외부도 아닌 장소에서 이를 거론함을 밝히고 있다.

라깡의 논문은 ‘국제정신분석협회’로부터 검열을 당하고, 그들은 그의 정신분석가의 자격부여에 대하여 ‘무효’로 간주하고 금지해버렸으며, 그가 속한 정신분석협회가 국제정신분석협회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금지의 해제를 제시했다. 게다가 그들은 정신분석가 양성에 관한 수업도 재개하지 않을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혹한 처사들은 오히려 라깡에 대한 두려움을 드러낸다.

라깡이라는 기표가 그들에게는 라깡이 큰사물처럼 포획되지 않는 거물이기에 그들은 라깡의 제자들마저 협회 가입을 조건으로 라깡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그러한 배신 속에서 라깡은 자신의 '파문’을 스피노자가 ‘대파문’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유한다. 라깡은 파문이 함축하고 있는 구조 속에는 우리 정신분석 실천에 대한 핵심적인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정신분석 단체를 하나의 교회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마치 종교적 실천을 연상시킨다고 말한다. 라깡을 마치 이단으로 간주하는 사태에서 그는 정신분석에서의 유용하게 쓰일 무엇인가를 발견했고, 그러한 추문을 이용하여 정신분석이 무엇인가에 관한 규정을 규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라깡은 그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던 제자, 동료들이 라깡을 배신하는 대가로 교수 자리라는 거래 속에서 라깡은 희극적 차원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분석을 통해 잘 드러나듯이 주체의 진실은 이 주체가 주인의 입장에 있을 때조차 주체 자신이 아니라 대상 속에 본성상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대상 속에 있습니다. 바로 이 대상을 불쑥 드러나게 하는 일이라 말로 순수하게 희극적인 것의 기본이 되겠지요”라는 라깡의 말은 라깡이 파문이라는 사태에서 당한 어이없는 일이 희극적이며, 이 희극은 숨겨진 대상이 불쑥 드러날 때 발견된다는 것이다.  라깡은 분석적 관점에서도 희극적 차원을 지각할 수 있으며, 그것을 뛰어넘게 되는 방식인 유머라는 관점에서도 충분히 체험 가능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적은 정신분석의 토대와 관련해 제시해 볼 수 있는데, 실제로 토대라는 말은 하나 이상의 의미가 담긴 중의적 표현이며, 이 말은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방식 중의 하나인 카발라를 가리키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카발라에서는 정확히 치부(pudendum; 성기, 음부를 뜻한다)과 동일시한다고 말한다. 분석담화에서 치부는 토대, 내막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라깡 말하는 이 희극적 요소는 무엇을 드러나게 하는가? 라깡은 그것이 직접 ’진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으나, 백상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진리라고 설명한다.

희극적 순간은 바로 이러한 쾌락원칙의 대상이 일상적 궤도에서 벗어나는 상황에 등장하는데, 진리 역시 진리는 쾌락원칙의 궤도에서 벗어났을 때 드러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욕망의 중핵에 위치한 큰 사물과 구분하기 위해 언급했던 산물과 등가를 이루는 그것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의 지배로부터 일탈하는 순간 큰 사물에 근접한 것이 된다. 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반응의 양태가 ‘유머’인 것이다.  파문이라는 사태에서 희극적인 요소가 드러난 것은 분석상황에서 마찬가지로 그것이 진리임을 가리킨다. 라깡은 그 진리의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라깡은 그 때문에 파문이라는 사건을 정신분석의 토대를 드러내 줄 수 있기에 이번 수업에 거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희극적 태도는 주체가 욕망의 진리에 접근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고 참을 수 없이 불편한 진실을 견뎌내는 방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욕망에 관한 진리는 수치심의 외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서 실천이란 무엇인가?

 

“실천이란 그것이 무엇이건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적인 것을 다룰 수 있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행동을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 용어지요. 그 가운데 다소간 상상적인 것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은 부차적인 가치밖에 없습니다.”

 

정신분석에서는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가? 의 문제라면 라깡은 실재를 다루는 일이라고 말한다. 백상현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프로이트 용어에서 욕망의 차원에서 실재라 할 수 있는 것은 충동이며, 그것의 다형성이다. 다형성은 파편적이고, 질서의 부재라는 의미에서 공백이다.  라깡에게 실천이란 실재를 다룬다는 것이고, 이것은 공백을 상징화하는 행위가 실천인 것이다. 상징화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상징화할 수 있을까. 공백에 테두리를 치는 행위인가? 그것이 은유라면, 타자의 은유를 버리고 개인적 은유를 발명해야 한다는 것이 세미나 17 강의에서 언급된 내용과 같은 맥락으로 생각된다.

 

정신분석은 과학인가? 종교인가?

정신분석을 어떤 영역에 속할만한가?

 

라깡은 정신분석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과학은 탐구와 발견의 영역이 있는데, 과학에서의 탐구의 영역은 종교와 어떤 유사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미 발견된 것 속에서 망각의 영역에 있는 무언가를 찾는 것이다.

피카소의 “저는 찾지 않습니다. 저는 발견합니다.”라는 말처럼 정신분석은 탐구의 영역이 아니라, 발견하는 자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발견된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에 정신분석을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라깡은 과학에서 해석학적 요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모든 발견자에게 불현듯 나타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바로 탐구에의 요구와 같은 것이며, 이것은 항상 새로운 우면서도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그러나 다 자라기도 전에 발견자에 의해 베어질 위험이 있는 의미효과를 탐구하려는 요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학은 정신분석과도 관련이 있는데, 왜냐면 의미효과에 발달 경로를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해석’과 혼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위에서 말한 해석학, 즉 의미효과를 탐구하려는 요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으로 정신분석을 보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해석’이 아니다. 분석가는 내담자를 해석하지 않는다. 해석은 판단이고, 의미의 세계에 속한다. 내담자는 분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석할 새로운 언어를 찾고, 발견해야 한다. 그것은 여타 다른 심리상담과 확연한 구별점이다. 증상을 발견하는 것도 구성하는 것도 내담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신학이 하는 것은 해석학. 근원에 뭔가 있는지, 인간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

또한, 라깡은 과학을 특징짓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대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대상은 과학이 진화함에 따라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이렇게 지적하자면 실천이 하나의 장을 규정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현대 과학자가 규정되는 것은 이러한 실천에 의해 규정되는 장의 수준이 아닌지 자문해야 하며, 이 장은 궁극적은 통일성을 갖고 있는 초월적인 보완물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어 라깡은 통일성이 아닌 과학은 하나의 실천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에 근거한다면 신비체험(경험도) 그러한 장에서 과학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종의 애매함이 있는데, 이 체험이 항상 과학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라깡이 보기에는 신비체험(경험)은 과학적으로 검토한다면 과학에 재편입 시킬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연금술은 과학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지를 이어 지적한다.

결국 연금술이 과학이 아니라고 단언하게 되는 것은 ‘조작자의 영혼이 지닌 순수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사태의 본질적인 요소’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과학인가 아닌가를 거론하기 위해 그는 먼저 과학에는 탐구와 발견의 영역이 있으며, 이미 발견된 탐구의 영역은 하나의 장에서 실천되는 제한된 영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때, 과학이 항상 통일성, 초월적인 진리가 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비체험과 같은 것 역시 과학적으로 검토대상은 될 수는 있으나, 이것이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연금술과 같이 조작자의 영혼의 순수성 같은 것이본질이기 때문이라고 라깡은 설명한다. 

연금술을 과학으로 볼 수 없는 것은 조작자의 영혼, 욕망의 개입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석가의 욕망이란 정신분석의 연금술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이 역시 과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강의시간 종종 들었던 백상현 교수의 ‘분석가는 자기 존재를 내어 준다’라는 언명에서도 이와 같은 요소를 염두에 둔 표현이라 생각이 든다.

 

그럼 분석가의 욕망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라깡은 물리학자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지 않듯이 분석가의 욕망이란 무엇인지 과학에서는 제기될 수 없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그래도 정신분석가의 욕망의 차원이 하나의 확실한 공식화의 차원을 등장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비록 과학의 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라깡은 “정신분석에서 공식은 무엇에 관한 것일까요? 무엇이 대상의 미끄러짐을 초래하고 그것이 변주되게 만드는 것일까요?”라고 묻는다. 라깡은 이에 대해 과학에도 근본 개념이 정박하듯이 정신분석에서도 우리의 실천을 어디에 정박시킬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나 문제의 관건이 개념인 것이냐. 그렇다면 형성중인 개념인가, 발전하고 운동하는 개념인지 재고되어야 하는 개념인지 묻는다. 위의 질문들 속에 분석가의 욕망이란 무엇인가가 들어있는 듯하다. 세미나 11에서 대상a가 대상의 미끄러짐, 균열, 흔들림을 만들지 않는가.

라깡의 정치학에서 저자는 그 욕망을 텅 빈 순수성, 균열로 향하는 리비도이고 죽음 충동이고 존재하는 모든 질서에 대한 타나토스라고 소개한다.

 

이러한 질문에 관하여 라깡은 일견 정신분석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에 이론적인 논의들이 있다 하더라고 이러한 개념을 정리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이론적 지위를 보증하는 것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의 이론으로 증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정신분석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실어증 증상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분석은 ‘그녀의 증상이 말하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증상을 이론의 개입으로 변별하는 것과 무관한 다른 유형의 개입이 정신분석의 목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무언증에서 무엇이 다시 그녀를 말하게 했는가? 의 문제를 히스테리증자가 자신을 욕망을 말하는 운동자체를 통해 구성한다는 변별적 특징, 그 메커니즘을 발견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라깡은 프로이트가 욕망과 언어의 관계가 베일 속에 감춰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줬기는 하나, 그것이 욕망과 언어의 관계를 완전히 해명했다는 뜻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면 히스테리자의 욕망은 우리 앞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때,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 증상을 치유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태도는 ‘왜 히스테리자가 자신의 욕망을 충족되지 않은 욕망으로만 유지하는가라는 고유한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라깡은 또한 히스테리는 우리로 하여금 분석이 지니고 있는 원죄의 흔적과 대면케 한다라는 주장으로부터 하나의 원죄를 가정한다.

아마도 진정한 원죄란 하나밖에 없을 텐데요. 바로 프로이트 자신의 욕망입니다. 즉 프로이트 속의 어떤 것이 전혀 분석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프로이트의 욕망

 

라깡은 아버지의 이름들에 대해 말하려 했던 것은 사실 기원을 문제 삼기 위해서였고, 프로이트의 욕망은 도대체 어떠한 특권을 갖고 있었기에 무의식이라는 경험의 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분석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이러한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깡은 분석 경험의 장을 탐사하는 이 같은 방식은 다음번 강의에서 ‘무의식, ’반복‘, ’전이‘, ’충동‘에 어떤 개념적 지위를 부여해야 할 것인지를 탐사를 예고하고 강의를 마무리 짓는다.

 

이어지는 질의에서 프로이트의 욕망과 히스테리의 욕망의 결부를 통해 라깡이 심리주의 비난을 받게 되지 않는지에 대한 답변으로 라깡은 프로이트의 욕망은 심리주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은 욕망에 관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게 없다고 말했을 때, 이 말에는 주체의 지위와 관련된 어떤 핵심적인 주제가 담겨 있는데, 그것은 이 욕망을 본원적인 주체성이 아닌 대상의 위치에 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도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대상으로서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욕망이 무엇이었길래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명하게 되었는가? 자신의 욕망을 주체성으로 본 것이 아니라 대상의 위치로 옮겼을 때 무의식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임으로 프로이트 자신의 욕망 역시 타자의 욕망임을 알게 됨으로써 그것을 대상화하자 무의식이라는 경험의 장을 열어 보이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것도 만족의 덮개로 덮지 않았던 히스테리증자로서의 프로이트의 욕망이 무의식을 발견하게 된 것은 아닐까?

 

라깡은 그 타자의 장소에 주체가 도래하기를 원한다. 나는 어떻게 그 장소에 도달해야 하는가? 천천히는 어림없다. 사건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던가, 기습해야 한다.(20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