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대학원 담화

강박사회

untold 2024. 12. 9. 14:38

들어가며..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항문기에 고착된 한 인물의 배변의 기표에서 동시에 미래를 앞당기는 기표가 되었다. 비상계엄이 가지고 있는 기의의 차원은 한국사회의 축적된 트라우마를 표상하고, 현직 대통령에게는 타자의 욕망을 무화시키는 기표일 것이다. 그의 극도의 불안은 극단적 액팅아웃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한편, 현대는 라캉에 따르면 잉여향락의 시대이다. 이에 따라 역설적으로 대타자를 소환하려는 움직임 역시 강박증과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던 피터슨에 대한 청년들의 숭배는 그 사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본 글에서는 개인적 차원 및 사회적 차원의 강박증의 메커니즘에 대한 관찰을 포함할 것이다.

먼저 강박증의 일반적인 개념을 프로이트와 라캉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현재의 정치 상황을 강박증적인 사태의 붕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고자 한다. 끝으로 정신분석과 정치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정신분석이론이 지향하는 ‘강박증에서 히스테리화’라는 의미의 차원을 검토하고자 한다. 강박증보다는 히스테리의 문법이 개방적이고, 가능성에 열려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영화 ‘헤어질 결심’도 참조하였다.

강박증은 일종의 불안장애로서 강박사고와 강박행위로 심리학과 현대 정신의학에서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강박행위를 포함하여 강박증은 강박사고를 주요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박증과 프로이트의 강박증은 다르다. 증상의 형태는 같지만, 그 원인과 작동기제를 파악하는 방식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강박증은 증상인가? 구조인가? 정신분석은 증상과 구조의 구분을 강조한다. 프로이트와 라캉 정신분석은 주체의 병리적 구조를 정신병, 도착증, 신경증으로 구분했다. 신경증에는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있으며, 도착증에는 새디즘, 마조히즘, 노출증, 관음증, 페티시즘이 있고, 정신병에는 편집증, 분열증, 우울증 등이 있다. 본 글에서는 신경증의 하위구조로서 강박증을 다루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강박증

프로이트는 강박증을 신경증의 한 형태로 보았다. 신경증은 억압된 것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강의 입문에서 “강박신경증은 환자들 자신이 원래는 흥미를 느끼지 않고 있는 생각들에 몰두하는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강박관념은 “유치한 것들”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계기가 된다. 의지에 반하는 생각들로 고통받는 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뚜렷한 증상으로 만연해 있다. 또한 환자가 내부에서 느끼는 충동들은 범죄의 유혹과 같은 끔찍한 충동으로 채워지고, 이를 낯선 것으로 느껴 환자는 부정하거나 도피하려 한다. 이러한 충동들로부터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강박행위를 반복하게 된다. 이는 고통을 수반한다. 프로이트는 강박신경증의 의례적인 반복행위들은 다른 행위들로 옮겨갈 수 있으며, 모든 증상은 변형되는 것이 그 특징으로 보았다. “정신 과정을 관통하면서 서로 대립하는 관념들은 환자의 증상 속에서 특히 선명하게 구별”되어 나타난다. 이 생각들은 ‘의심’을 낳고 결국 가장 확실한 ‘신념’까지 잠식해 들어가게 한다. 이러한 것은 점차 시간이 갈수록 환자를 우유부단하거나 무기력하게 만든다. 강박증은 ‘행동 대신 다시 생각을 준비하는 행동’으로 이루어져 행동은 지연된다. 사고의 과정이 강박적인 경우는 행동에 쓰여야 할 힘이 사고하는데 사용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 원인을 상반되는 충동의 갈등 때문이라고 보았다.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사고와 정동의 분리이다. 프로이트는 사건을 억압하면서 표상의 연쇄, 표상의 덩어리들, 의례들에 달라붙어 정해진 울타리를 반복하면 불안감이나 불쾌감의 제어한다고 보았다. 그는 강박증의 원인을 어릴 때의 쾌락경험이 자책과 죄책감을 가져온 것이라고 보았고, 이에 반해 히스테리는 그 경험이 혐오감을 가져다 준다고 보았다.

 

라캉의 강박증

라캉의 히스테리와 강박증의 구분은 프로이트와는 다르다. 히스테리와 강박증은 ‘상징계’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정신증과 도착증이 구분된다. 라캉은 상징계, 아버지의 이름, 즉 은유 혹은 거세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를 정신증, 상징계가 아닌 다른 팔루스, 어머니의 욕망을 물신화하는 것을 도착증으로 보았다. 신경증은 일단은 상징계가 받아들여진 상태로서 아버지의 이름(부성적 은유)을 받아들였지만, 주이상스, 큰사물과 같은 상징화될 수 없는 무의식이 억압된 상태이며, 이를 최대한 억압하려는 것이 강박증이다.

라캉은 그 억압의 대상이 주이상스이라 규정하였으며, 바로 주이상스의 출현을 억압하고 은폐하려는 것이 신경증의 증상이며, 강박증은 이를 최대한 억압하기 위해 기표의 연쇄, 사유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았다. 강박증의 그러한 집착은 역설적으로 주이상스의 초과를 일으킨다. 강박증이 강박적 사고와 행위에 몰두할수록 주이상스는 초과 되어 질서는 무너진다. 죽음충동이 쾌락원칙에 앞서듯이 주이상스, 혹은 큰사물은 완전히 억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라캉은 “칸트의 정언명령은 보편적 명제에 대한 집착을 통해 병리적 모든 정념을 일소하는 전략을 세웠지만, 오히려 그것은 불안을 호명하는 효과를 가져와 스스로 강박증적 현상을 출현시키게 된다.”고 해석했다. 다시 말해, 억압된 것은 어떻게든 회귀된다. 라캉은 억압은 기표와 관련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것과 관련하여 억압은 기표들에 작동합니다. 주체와 기표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억압의 근본적 포지션이 조직됩니다.”(『라깡의 인간학』 재인용, p.57)

강박증자의 억압 역시 기표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박증자의 증상은 억압의 기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캉은 과도한 쾌락, 큰사물, 주이상스의 초과는 주체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강박증자는 질서와 사유를 들어 억압된 것, 즉 큰사물이 없는 듯 살아간다. 강박증자는 무의식을 강하게 부인하고 생각 속으로 도망친다. 이러한 방어전략은 부인과 회피를 위해 특정 기표연쇄에 집착하는 것이다. 생각 속에서 두 가지 대립되는 욕동 속에서 내전을 겪으며, 고통스러운 강박행위를 반복하게 만든다. 때로는 강박증자가 자기보존 본능 및 쾌락원칙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은 반복 강박 때문이다. 이러한 강박증의 담화는 오히려 큰 사물을 소환하게 된다. 상징화할 수 없는 실재, 주이상스는 반복강박이 되어 주체의 인생을 지배한다.

충동적인 강박증자

“이번 기회에 다 잡아들여라, 싹 다 정리하라”

그는 비상계엄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편이 아닌 대상은 “종북세력”으로 규정했다. 오늘(12.8. 담화)은 그는 자신의 절박함 때문에 국민을 놀라게 했다는 수준에서 담화는 끝났다. 그에게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이 증상이며, 그 증상이 출몰하지 못하도록 상징계의 질서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 절대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 같다. 실패한 비상계엄이지만, 그는 도대체 어떤 확신으로 이 일을 저질렀을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극단적 강박증이 편집증으로 전환된 것일까? 그는 극우 보수 유튜버의 가짜 뉴스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뉴스로 미루어 짐작건대, ‘부정선거’라는 기표가 중요했던 것 같다. 종북과 부정선거라는 두 개의 기표를 강박사고로 계속 회전시키면서 현실감각은 없어지고, 충동으로 분출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세상이 종북과 종북이 아닌 것으로 나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타자의 욕망은 알고 싶지도 않고, 무화시키고 싶을 뿐이다. 더욱이 수세에 몰린 현재 상황에서는 그동안 눌러있던 포악함이 폭발했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비상계엄’이라는 기표로서 불안한 위치를 고정시켜줄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전 국민의 트라우마를 자극하여 대놓고 분노를 발산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비상계엄이라는 기표는 국민에게 이동하여 ‘잠든 국민을 타격’하였다. 강박증의 초과는 결국 “붕괴”를 초래하게 된다. 항문기에 고착된 그의 성향은 강박적이면서도 질서를 따지는 성향과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가장 가까운 아내가 붙인 ‘바보 윤석렬’이라는 꼬리를 떼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강박증자는 질서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자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현장 속에서 그는 들끓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날마다 술을 마신다. 그의 의심의 중핵에는 ‘부정선거’라는 기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관위 기습’ 기습했지만, 이제 그의 망상을 확인할 길은 없어지고, 탄핵 또는 하야가 예상된다. 모든 것이 붕괴되도 그는 부정선거에 집착할 가능성이 크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정리하면 그는 팔루스에 미친 자이고, 그의 내면적 불안을 방어하기 위해 강박사고의 시뮬레이션, 미신적 사고를 방어기제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는 무력감은 합리적인 사고 대신,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한다. 정권 초기부터 ‘무속신앙’에 대한 의존하고 있음이 여러 정황에 비쳤다. 윤 씨 부부가 스스로 붕괴를 자초한 것과 다름없는 이 사태를 두고 볼 때 ‘마법적 사고’에 의한 ‘인과 관계의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에리히 프롬이 강박신경증에 대해 말한 문장을 인용해 본다. “모든 마법적 행위가 그러하듯 순수하게 주체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과 관계가 객관적인 영향을 대체한다. 자신의 특정 행위를 마법적 제스처의 의미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사자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강박신경증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무력감이 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마법적 제스처를 이용하는 점이다.” 정권 초기 손바닥의 ‘王’자는 마법적 제스처였을까?

부르스 핑크에 따르면 강박증은 망각에 의해 억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소실로 인과 관계가 끊어져 억압된다. 억압된 연결고리는 투사 과정을 통해 우연적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등의 미신적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른 형태로는 불확실성과 의심이다. 강박증 환자들은 불확실한 것과 의심스러운 것을 쫓아가는 경향이 있어서 기원이나, 수명, 사후의 세계, 기억 등에 관심을 보인다.

강박증자는 무의식을 믿지 않고, 정신분석을 믿지 않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흔히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무의식은 믿지 않아도 미신은 믿는 기이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들은 징크스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작은 에피소드가 징크스가 되어 근거 없는 인과 관계를 설정하거나, 지나친 낙관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 ‘직관’이라는 이름 아래 무의식적 선택, 결정하는 때도 강박증적 성향이 반영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무기력한 강박증자

윤석열처럼 충동적인 강박증자가 있는 반면에 무기력한 강박증자도 있다. 현대의 임상 심리에서는 강박사고와 강박행위 등의 증상으로 대변되지만, 정신분석에서 강박 증상은 더욱 다양한 특징들을 포함한다. 정동의 격리, 소급 취소, 반동형성, 전치, 양가성, 항문기의 고착과 퇴행, 자아의 잔인한 초자아 사이의 긴장 형태로 내면화된 가학-피학적 구조 등이다.

브루스핑크는 “빈둥거림”도 오늘날에 나타나는 강박증의 형태라고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그들의 리비도적 힘과 금지하는 힘이 팽팽하게 내전을 치르기 때문에 다른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부르스 핑크는 “선택과 결정에 대한 회피는 강박증자에게 사랑과 직장생활에서 중요한 모든 일에 대해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운명에 맡겨진다.”라고 말한다. 경험상 강박증자처럼 보이는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라는 말 같다. 그들은 사사건건 참견하지만, 정작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뒤로 물러서서 “니가 알아서 해”라고 말한다. 강박증자는 워커홀릭이거나,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필경사 ‘바틀비’와 같이 언뜻 반대처럼 보이는 성향이지만, 강박증이라는 같은 구조 아래 움직인다. 일종의 완고함은 강박증의 뚜렷한 성격이다. 한편, 직업 특성상 주변에서 관찰되는 강박증자들은 다수가 애주가가 많다. 일에 대해 더없이 빡빡한 사람,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사람들은 낮 동안의 긴장감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폭음을 한다. 간단히 맥주 한 잔이 아니라, 폭음에 몸을 맡기는 경우는 죽음충동이 넘실대는 것만 같다. 절차와 질서에 대한 강박은 작은 균열에 쉽게 무너진다.

끊임없는 작업 지연 전술을 가진 이들은 어떠한가? 완벽해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무력감은 얼어붙게 만든다. 그래서 ‘많은 일을 시행했다가 취소’하며, 일하는 대신에 미디어로 불법적인 향락을 취한다.

현대는 잉여향락의 시대이다. 손쉽게 각자의 향락을 취할 수 있다. 유튜브나 SNS에 몇 시간 동안 매몰되어 있기도 하고 게임에 빠져있기도 한다. 대타자에게 복종하는 시늉은 하지만 잉여가치는 생산하지 않는 일종의 ‘항의’를 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의 갈등’ 속에서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종교라는 대타자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과학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우리는 ‘주술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다. 여전히 사주와 타로, 관상을 믿고 별자리를 믿는다. 아니면 우리는 ‘자본’을 믿는다. 강력한 아버지가 사라지고, 우리는 현대의 아버지상을 찾아 그에게 매를 맞고 싶어 한다…. “조던 피터슨 현상”이 그러한 예라고 생각한다. 잉여향락은 강박적이다. 도파민중독이라는 말은 잉여향락의 강제성과 같은 말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그러한 잉여향락 속에서 엄격한 초자아의 역할을 자처하고 하고 있는 ‘인터넷 아버지 조던 피터슨’을 기이하게도 청년들은 숭배한다. 느슨해진 상징계를 조이기 위해 “가혹한 초자아”를 소환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매 맞는 환상”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라캉의 이론 말기에서 라캉은 우리는 잃어버린 주이상스를 찾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 내 잉여향락을 즐기는 일종의 향락사회를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러한 잉여향락의 과도함은 또 다른 대타자를 불러내는 가짜 강박을 요청한다.

강박증자에게 사랑은 가능한가?

라캉에 따르면 “성관계는 없다” 히스테리자는 타자를 경유하여만 욕망이 유지되고, 강박증자는 눈 앞의 타자가 아니라 다른 것을 욕망한다.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눈앞의 타자를 있는 그대로 욕망할 수 없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은 무의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현실 속에서는 사랑은 ‘어떤 가능성’의 기표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캉의 사랑>에 따르면 강박주의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을 한다. “강박증자의 이타주의적인 사랑, 이상화되고 열광적인 사랑은 항문기적 대상의 증여와 유사한 방식으로 시관적인 수준에서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색정광과 다른 강박증자는 그에게 속한 어떤 것, 즉, 정확히 항문기적 대상을 그가 사랑하는 방식 안으로 끌어들인다” 사랑의 대상을 이상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상이 자아이상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강박증의 마조히즘적 태도는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는 마조히즘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능동형이며 사디즘을 자기자신에게 돌린 것이다. 자아의 잔인한 초자아 사이의 긴장형태로 내면화된 가학-피학의 구조 속에 들어간다. 그러나 강박증자의 욕망의 대상은 언제나 그를 빠져나감으로 해서 그는 붕괴된다.

“모든 것이 붕괴되었어요”

영화 헤어질 결심은 히스테리증자와 강박증자가 어떻게 서로의 균열이 되는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같다. 송서래로 분한 탕웨이는 '품위있는' 박해일을 욕망한다. 박해일 역시 이유도 모르는 체 '꼿꼿한' 그녀에게 이끌린다. 꼿꼿하다는 것은 히스테리증자가 법(아버지, 가부장, 대타자)에 대한 거부의 자세이다. 박해일이 강박증자인 이유는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말했습니까"라는 대사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랑하지만 자신의 사랑조차 의심한다. 또한 주머니가 많은 조끼, 벽면을 채운 사진들도 그가 강박증자임을 방증한다. 그들은 모호함을 견디기 힘들어 한다. 그는 송서래에 빠져들면서 그녀에 대해 강박적으로 알고자 한다. 클로즈업되는 탕웨이의 얼굴과 중국어를 번역하는 모습은 그의 특성을 드러낸다. 강박증자에게 사랑은 균열에 다름 아니다. 그의 사랑은 그를 붕괴시키고 말았다.

히스테리증자는 욕망을 충족하지 않으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미결’이 되어 그의 욕망의 대상에서 영원한 그의 증상이 되고 싶었다. 굳이 그녀 스스로 ‘미결’이란 그 단어를 쓰지 않았다면 더 히스테리적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박증자가 타자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존재를 포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강박증자는 사랑을 통해 균열이 열리면 다른 문법으로 들어간다. 정신분석 임상에서 ‘강박증의 히스테리화’는 이와 같은 균열을 발생시키는 것일 것이다.

맺으며...

정신분석과 정치

알랭바디우와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라캉 사후 30주기 대담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라캉의 정치적입장 등을 파악해 볼 수 있었다. 라캉은 정치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활동에 참여하는 않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실제 라캉은 자신의 가르침이 어떤 형태로든 이데올로기적으로 또는 당파적으로 재활용되는 일을 금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디우에 따르면 라캉의 사유는 정치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바디우는 라캉의 정신분석이 의미심장한 정치적 문맥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체의 애초의 무능력한 상태와 관련하여 주체의 어떤 확충을 겨냥하는 치료’의 깊은 의미를 재발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정신분석은 ‘집단적 차원에서도 적용’ 할 수 있으며, ‘정치의 장에서 어떤 결정된 상황이 불가능하게 막고 있는 삶의 가능성들을 해방시키는 일에 상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라캉의 치료는 그 본래의 실행에서는 탈정치적이지만, 사유에 있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모태를 제안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라캉의 사유와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 사이에서 어떤 연속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그는 혁명적 유형의 행동방식이란 국가적 억압에 의해 봉쇄된 집단의 개방성을 다시 가동시키는 것이라 본 것이다. 정신분석이 억압에 의한 개인의 유한성을 무의식에 개방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맞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을 ‘사회적응의 시각’으로 보는 것에 완강히 반대한다. 라캉에게 정신분석의 관건은 더욱 근원적인데, 그것은 정치와 상관없이 보이지만, 실은 ‘해방의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라캉의 사유는 68혁명과 1980년대 사이에 젊은이들을 총궐기하게 만들었던 추동적 요인들 중 하나였다.

바디우는 68혁명에서 급진좌파가 나타나는데 라캉의 사유가 주요하였다고 보았다. 이에 대해 루디네스코는 ‘라캉에게 68혁명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운동’이였다고 보았다. 그녀는 “그것은 일반화된 해방 의지가 아니라, 반대로 좀 더 잔인한 노예상태에 대한 저항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었죠.” 라고 말한다.

라캉은 “혁명은 항상 자기가 제거한 지배자보다 더 포악한 지배자를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그 포악한 지배자는 우리의 주체성을 상실케 하는 모든 것일 것이다. 신경증적 구조의 인간들의 문명이라는 일자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주인을 뽑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벌어진 이 초유의 사태를 ‘사건적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역사의 한 가운데에 있고, 정권의 헤게모니를 잡기 위하여 사건을 희석시키는 말들에 속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객관성이라는 미온적 태도에도 속지 말하야 할 것이며, 강박증자의 개인적 배설의 희생양이 되어서도 안된다.

사랑이라는 누빔점

우리는 어떻게 이 강박증적 사회를 히스테리화 할 수 있을까? 강박증을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의 방언”이라고 불렀다. 히스테리와 강박은 혼재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대부분의 신경증은 <혼합된> 신경증”이라고 말한다. 순수한 히스테리와 강박증 신경증은 드물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두 신경증은 불안 신경증과 함께 혼합되어 나타난다. 혼합된 신경증이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병인이 서로 섞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며, 중요한 특징을 따라 그 이름이 주어진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한다. 임상경험은 없지만, 개인적 경험으로는 한 인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박증과 히스테리가 교차하기도 하고, 대상관계에 따라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담화가 구성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통시적이적고 공시적인 구조에서 개인의 성격도 중층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개인분석을 해보자면, 특정 대상 관계에 들어서면 강박증상이 두드려진다. 인생의 그래프로 보자면 한 때는 히스테리의 구간이 있었고, 한 때는 강박증의 구간이 있었다. 라캉정신분석의 교육분석과정 속에서는 강박과 히스테리라는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았고, 막연히 자신을 히스테리자로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강박적으로 히스테리적이였다. 한 인간을 좌표화 한다는 것은 어렵고 다층적인 일이므로 히스테리자이건 강박증자이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기표를 흔드는 것이다. 이번 발제문을 쓰면서 스스로에게 “나는 강박증자인가? 히스테리자인가?”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이러한 의미없는 물음을 왜 계속 하는가 생각했다. 이 향락은 리비도가 스스로에게 집중되기 때문인 듯 싶다. 한편, 강박증자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은 히스테리 버튼은 ‘사랑’이다. 앞서 발표한 영화 ‘플랜맨’에서 그에게 균열은 ‘사랑’이였다. 그가 이상화한 대상이 아니라 그의 질서를 흩뜨렸던 여자였다. 강박증자에게 ‘사랑’은 그렇게 ‘사건’이 된다. 히스테리와 강박증의 증상의 교환은 ‘사랑’이라는 누빔점에서 일어난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이 누빔점을 기준으로 강박증자는 히스테리화되고 히스테리자는 강박증적으로 문법이 바뀐다. 무의식적으로 서로의 옷을 바꿔 입음으로 해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 열린다. 사랑도 다시 쓰인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랑이 균열의 시발점이었다면, 사회적 차원에서는 정신분석의 담화를 어떻게 감염 시킬 수 있을까? 억압된 사회가 아니라 유연한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히스테리적 리더십이 가미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적으로 극우화가 경향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고 한다. 너와 나를 차별하지 않고 차이만이 존재하는 새로운 인류애라는 환상을 심는 것은 가능할까. 그리고 그 환상이 지금의 환상을 끝낼 수 있을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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