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속에서 여성은 자신의 파트너를 알콜 중독에서 빠져나오도록 독려하거나 닦달해야 사랑의 책임이나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드라마(해방일지)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대상의 증상을 제거하려 들거나 침범, 요구, 통제하려 하지 않고 증상 그대로를 존중하고, 한 주체를 전혀 침해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을 매우 정신분석적인 접근으로 보았습니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흡사 정신 분석가가 소파에 앉아 온갖 증상을 호소하는 내담자를 바라보는 모습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혐오스러운 증상을 가졌든 그것보다 너의 존재가 중요할 뿐이야'라고 말하는 듯 말이지요. 누군가는 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이 사랑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냥 가만히 지켜본다고 사랑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돕기를 자처한다고 해도 우리가 타자인 대상에게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 존재합니다.
상대에게 자신의 요구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해 악을 쓰거나 내가 원하는 네가 되어 주지 않는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울부짖지 않고, 모든 판단과 개입을 멈추고 그냥 상대를 받아들이는 행위이지요. 이것이 '수동적 능동성'입니다.
이 수동적 능동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한 주체가 눈 앞의 대상에 우선해 자기 자신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 그래서 결국 자아 스스로 욕망을 포기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 나의 욕망이 투사되지 않고 세계와 나를 분리해 하나의 공간을 그 사이에 두지 못한다면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요원한 환상에 불과 합니다.
관계 맺음은 타자가 타자가 되도록 허용하고, 결국 자기 구도에 가까운 수동적 능동성에 대한 고민을 하도록 요청합니다. (177P)
여기서의 욕망은 주체의 고유한 욕망이 아니라, 자아의 타자적 욕망이다. 무의식은 언제나 타자이므로, 그 욕망은 포기되어야 한다. 욕망은 발명되어야 한다. 자아가 주도권을 잃어야 한다. 그래야 "타자가 비로소 현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의 현존은 "어리석음"을 피하는 길이다. " 어리석음" 이란 낯선 것을 낯익은 것으로 치환하는 지능, 부동의 자세의 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을 무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일. 마치 들리는 말을 지우개로 지워야만 하는 일이다. 이미 귀에 들어온 말을 지울 수는 없다. 들려오는 말을 막을 수가 없다. 그 말을 타자화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면의 말을 들어라가 아니라 내면의 말을 무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말을 해서 지워야 한다. 말이 말을 덮어야 하는데, 그 말을 새로운 말이여만 힘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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