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한 많은 말들이 있다.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는 사랑하는 사람의 타자성에 대해 짧지만 녹록치 않은 무게로 쓴 책이다.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읽다가, 남기고 싶어서 몇 줄 적어본다.
수 많은 말들 중에서 주는 행위와 받는 행위, 자비와 탐욕, 자선과 소유욕을 동시에 의미하는 낱말이 하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이다. 자기르 ㄹ충족시켜 줄 수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어떤 존재가 갖게 되는 격렬한 욕망과 무조건적인 헌신이 같은 어휘 안에 역설적으로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를 염려하는 마음의 극치를 일컬을 때에도, 또 타자를 생각하는 마음을 일컬을 때에서도 모두 사랑이란느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누가 아직도 무사무욕을 믿고 있는가? 누가 무상의 행위를 진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근대의 동이 터오르면서부터, 도덕을 논하는 모든 계파들은 어느것을 막론하고, 무상은 탐욕에서, 또 숭고한 행위는 획득하고 싶은 욕망에서 유래한다는 설명을 하고 있다. 자기 포기란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며,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이유는 보상때문이고, 모든 관대함은 상징적이나마 은밀한 만족감을 동반다. 요켠대 주는 행위는 모두 타자를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제국주의적인 욕구의 일환이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모든 증여는 포식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영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명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헌신의 외양 아래 감추어진, 그 아래 숨어서 도처에 편재해 있는 자기 중심성의 현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란 남에게 주는 마음이 별로 없는 존재이다.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규범이 제거된, 오로지 사실에만 집착하는 실증적인 사고는 사랑이란 점유 본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편재하는 탐욕과 각자 자신만을 위해서 군리하는 자기 중심성과 무사무욕의 가치를 대립시키는 사상이다. 즉 이웃 사랑이란 인간이 으레 지니고 있어야 할 모습, 또는 역사가 그 억압적 과거를 백지상태로 만들고 난 후에 인간이 분명히 취하게 될 모습을 규정한다.
통찰력을 지니려는 배려에서 이러한 분열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상적인 영역으로 내쫓는다고 해서, 현실을 더 잘 생각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타인과의 원초적인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또 그것에서 출발하여 사랑의 감정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미움의 감정까지도 이해하기 위해서, 유행에 뒤진 이 개념 소유의 이이야기와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필요할 수 있다.
1. 타인과의 만남
다른 사람들과 차이를 운운하는 것
저자는 차이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웃과 그 독자성을 혼동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흑인에 대한 멸시 혹은 찬사는 '얼굴'은 동일한 전언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이미 타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외재성은 포괄되고, '타자의 얼굴'이 가진 명령적인 힘은 사라진다. "서로 다름을 기본으로 해서 인식된 얼굴은 타자성을 잃어버린 얼굴"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판단 자체가 타자성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는 타자에 대한 생각 보다 타자를 두고 느끼는 '동요'가 우선하는데, 이것은 모두 같은 욕망에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저자는 본다. 바로 '자신의 근원적 문제로부터의 회피욕망'이다.
타인은 우리가 타인을 사물화 시키는 시선이 아니라 고립되고, 무방비상태가 되는 벌거벗게 되는 당혹감이 들게 만든다.
타자의 얼굴은 이중적으로 구원적이다. 즉 자기로부터 자아를 해방시켜준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것이 자아의 자기 만족과 자만심을 깨우쳐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존재한다'이 간다는 말에 레비나는 수감된 사람이란느 비극적인 의미와, 얽매이지 ㅇ낳는 힘이라는 의기양양한 의미를 동시에 부여한느 것이다. 혹은 '자기 자신에 결박되어 자신의 내부에서 질식하는 자아'와 자기가 지닌 욕망의 광기에 귀를 기울이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혜를 선호함으로써, 어쨌든지간에 자기밖에는 생각하지않고 집요하게 존재 안에 칩거하는 자아라고나 할까. 근원적 소외인 존재는 자기에게로 고정되는 것이지만, 또 그것은 무방비하게 세상 속에 침투하는 최초의 폭력이기도 하다. 그것은 매몰되는 것이며, 흩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타자는 자아로부터 해방시켜준다. 타자의 얼굴은 자아을 뜯어낸다. 자아를 뜯어내지 않으면 타자는 타자가 아니다. 타자는 또 다른 자기자신일뿐이다. 존재는 자아에 수감되었고, 존재는 소외되어 있으며, 존재는 세상의 입장에서는 폭력이고, 매몰되고 흩어진다.
레비나스의 새로움은 '선'을 종국의 목표에 위치시킨 것이 아니라, 시작(타인과의 만남)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대타적 존재의 원래 의미는 투쟁이 아니라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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