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대학원 담화

분석의 끝은 있는가?

untold 2025. 4. 8. 11:34

 

 

 

나의 분석은 실패인가? 성공인가?

 

프로이트는 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분석의 자연스러운 끝은 있는가? 묻는다. 나의 분석의 종결은 더없이 댕강 잘린 두부 같았다. 뭐랄까.. 어정쩡하고 담백한 끝이였다. 라캉은 분석의 끝에서 환멸을 예고하기도 했다. 나는 마지막 꿈에서 분석가의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나오는 꿈을 꾸었다. 경악했지만, 그러려니 한다.

프로이트는 분석의 끝이라는 것은 환자가 더 이상 증상으로 괴로워 하지 않으며, 억압된 것이 충분히 의식화 되어 병리적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 다른 의미로는 분석의 끝은 다른 증상으로 대체되지 않는 증상의 소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아의 변형보다 외상에 의한 경우가 더 많이 성공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이 기질적인 면과 외상적인 것이 신경증의 병인이며, 기질적인 것이 강할 때는 치료가 더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기질적인 것은 유전적인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외상이라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다. 분석이 종결된 이후 성공적 치료로 보였던 사례는 분석가를 비난하거나, 발병하는 등 그 치료 효과에 대해서 실패로 돌아간 경우도 있었기에, 프로이트는 치료효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는 기질, 욕동의 강렬함 그리고 자아의 변형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분석치료를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욕동과 자아 사이의 갈등이 분석치료로 해결 가능한가의 문제에 있어 그것은 마녀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욕동과 자아의 조화는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이 자연발생적으로 절대 존재하지 않는 상태, 그 상태를 새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분석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의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억압은 초기 유아기에 나타나고 그 당시 억압하던 방식을 성인이 되어서도 고수한다고 보았다.

분석치료는 성숙된 자아가 이전의 억압을 수정한다. 다시 말해 억압하는 방식, 즉 방어기제를 수정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무의식의 새로운 댐을 만드는 일이다. 이 새로운 상태는 분석과정이 아니면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며, 새로운 방어기제를 발명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자아는 위험, 불안, 불쾌를 피하기 위해 억압하는데, 이 위험은 내적 위험을 포함한다. 바로 자신의 이드가 그 위험요소로 작용하여 자아는 이드를 왜곡하고 위조한다. 그러나 그 위조에는 댓가, 일종의 부담이 따르기 따른다. 우리의 방어 메커니즘은 성격의 한 양식이 되며, 존재하지 않는 위험에도 자신을 지키려고 한다. 또한 자아는 그 방식을 고수하기 위해 원래의 위험을 대체할 또 다른 위험을 찾는다. 결국 자아는 소외되고 신경증이 발병하게 된다. 히스테리자가 자신의 결여를 보존하기 위해 불안을 욕망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방어기제의 분석과 무의식의 저항, 즉 자아분석과 이드분석의 진자운동을 의식화 하는 것이 프로이트의 치료방식이다. 이것은 해석과 구성이다. 이러한 치유의 과정에 피분석자는 저항한다. 증상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이다. 증상은 자아와 이드의 갈등의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앞서 신경증의 부산물, 전이의 잔여, 괴사한 뼈조각으로 표현했다. 라캉은 증상은 무의식의 차원에서는 쾌락이라고 말한다. 주이상스의 상실을 보상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프로이트는 욕동을 잘 제어할 수 없고, 우리는 부분적으로만 그 욕동을 잠재울 수 있다고 보았다. 억압에 틈새가 있으며, 분석을 통해 일부 욕동을 제어한다 하더라도 방어 메커니즘이 변환이 완전하기 않기 때문이다. 피분석자의 방어시스템을 변환을 위해 분석가와 내담자는 공모해야한다. 이드를 대상화하여, 외부의 위험으로 다루는 것이다. 그러면서 욕동충동에 대해 새로운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이 새로운 길이 핵심이다.

 

분석이 끝나도 피분석자의 자기분석은 계속 될 것이라고 프로이트는 말한다. 우리는 분석경험을 통해 얻은 통찰을 삶을 살아가면서 이용하게 된다. 그가 내린 결론은 분석은 끝나지 않는다가 아니라, “분석의 종료가 실천의 문제라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종료를 실천의 문제로 설정한 것은 앞서 말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렇게 증상의 소멸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석이 끝난 후에 피분석자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기능하는데 가장 유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아가 잘 기능한다면, 증상의 발현될 때 증상에 휘말리기보다, 증상에 거리두기가 가능하다.

 

가끔 여전히 나는 카우치에 엉거주춤 걸터 앉아 있는 것 같다. 끊임없는 자기분석, 어쩌면 그 분석은 무의식이 아니라 나와 타자들의 전의식을 분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거기에 잉여향락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차라리 밑도 끝도 없는 검은 우물을 들여다 보았을 때가 나은지도 모르겠다. 내 분석이 잘된 분석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증상을 포기하지 않았고, 포기 하지 않은 댓가를 치루면서도 소중한 무언가를 만들고 말겠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인생의 허무에 대처하는 나만의 발명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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