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오해
“대중들의 기억 용량은 그리 크지 않으며 그들은 어떤 주장에 대해 앙상한 뼈대만 기억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그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만듭니다. ” 프로이트는 그가 모든 것을 성적인 것으로 환원한다는 시대의 오해에 대해 해명하고자 한다. 이 말은 모든 것을 우리가 이해차원에서 받아들일 때 저지르는 실수 이기도 하다. 우리는 뭔가 기억하기 위해 우리는 압축시키고, 구조화 시키면서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려고 한다. 물론 이 작업도 공부나 연구를 하는데 있어서는 쉽지 않지만, 이것은 대중이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하다. 대중은 타자의 말을 극단적으로 주어와 술어만 기억하며 입장을 취한다. 하나하나 따져서 물을 생각도, 시간도 없다. 모든 대중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대중은 프로이트에 대해 읽어보지도 않고, 그를 ‘성’이론에 매몰된 자로 몰아간다. 인간의 판단이란 너무도 빈약한 근거에 의해 단정짓는 과오를 범한다. 프로이트의 ‘성’은 단지 성기의 결합이 아니라, 그가 말하듯이 넓은 영역으로 확대된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성’은 “원초적 성적 충동이라는 원천에서 비롯된 애정어린 감정의 모든 활동을 성생활”이다. 이 원초적 충동이 원래의 성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억제되거나 이 목적이 더 이상 성적이지 않은 다른 것으로 바뀌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성교 외에 다른 충동, 예를 들어 구강충동에 비롯된 빠는 행위, 먹기, 흡연하기, 거식증, 말하기 등 입과 관련된 행위 역시 ‘성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정신분석에서 ‘성’을 거론되면 이 것이 단순한 성교를 의미하지 않으며, 나아가 “애정 어린 감정의 모든 활동”이라는 주석을 머리속에 달아 놓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적 불만’이라고 했을 때, 이 것은 성욕의 결핍보다는 강한 리비도와 그것을 억압하는 힘(혐오) 사이의 갈등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은 신경증 환자의 ‘성에 대한 혐오’, ‘사랑에 대한 무능력’이다. 그는 복잡하다고 피하지 말자고 말한다.
정신분석의 계몽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초적 충동은 원래의 성적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억제되거나, 성적이지 않은 다른 것으로 바뀐다고 보았다. 그 다른 것은 ‘증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상을 ‘욕동의 왜곡된 대체 만족’라고 표현한다. 증상은 전혀 성적이지 않지만 성적 만족을 위한 대체물로써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신경증이라는 것은 병의 이득이다. 그러나 그것을 겪는 개인은 고통스럽다. 라캉 후기에서 증상을 잉여향락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의식적 차원에서 증상은 고통이기에, 잉여고통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프로이트는 이것을 사회에 대입시켜 보자고 말한다. 신경증을 앓는 개인의 치료가 가능하듯이 집단도 치료 가능하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증상을 해명하면 증상이 없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이것은 증상의 기능은 숨기는 것이고 증상이 밝혀지면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증상도 사라진다고 본 것이다. 신경증으로의 도피는 더 어려운 문제를 피하는 것이다. 증상이 욕동의 문제를 은폐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다면, 즉, 증상을 해부한다면 욕동의 만족을 위해 싸우던, 포기하던 갈등에 맞설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증상은 해소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정신분석의 계몽에 의해 ‘사회는 더 관용적이 될 것’이고,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물론 이 논문에서 증상의 해명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고 있지 않아, 증상을 밝히면 치료가 된다는 단순화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 욕동이 증상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인 듯하다. 현재 우리사회를 해부하는 정신분석의 눈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프로이트는 ‘병의 이득’은 개인과 사회의 해가 되는 되는 바, 문명의 변화를 위해 대중의 계몽이라는 의무를 정신분석이 기여해야 된다고 밝히고 있다. 윤석열에 의해서도 계몽된다는 사람도 있는데(?!), 정신분석이 사회를 계몽시킬 수 있다는 관점은 정신분석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계몽이라는 기표의 독재성을 나는 잠들어 있는 의식을 깨우는 계몽으로 쓴다. 사회문제의 원인을 무의식의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프로이트가 말하듯 변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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