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두 번째 죽음은 마포구 상수동에서 였다.
라깡의 두 번째 죽음은 상징적 죽음이다. 대타자에게 벗어나기 위한 죽음이다.
그 때, 삶을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제당하는 것도 아닌 무중력의 생활이라고 할까. 도망치는 것이 없이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나는 끝없는 잉여향유의 미로에 갇혀있다. 한편으로는 헛헛하고, 한편으로는 막 거칠게 곤봉을 휘두르고 싶다.
이 분노는 어디서 오는가? 주이상스에 대한 향수도, 결여를 채우려는 욕망도 아닌 것 같다.
나를 소모하는 세상의 물질과 멈춰있는 시간들이다.
주체, 실재의 부산물들이 다시 응집되려는 것일까. 이 파렴치한 리비도는 기어이 죽음의 머리채를 흔들고 있다.
나는 여기서 세번째 무덤을 판다. 윤리적인 고꾸라짐. 살기위해 죽음을 반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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