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L도식에 대한 이해(조엘도르 에크리 22장)

untold 2024. 2. 27. 23:14

 

 

주체는 담화 속에서만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한 기표는 다른 기표를 위해 주체를 대리한다는 정식에 따르면 하나의 기표가 주체를 대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표가 다른 기표를 대리하면서 주체는 효과로서 등장했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기존의 논의에서 우리는 주체는 자아를 통해서만 자신을 파악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주체는 자아를 통해서 드러난다고도 바꾸어 말한다면, 그것은 자아의 담화 속에서 일 것이다. 자아의 담화는 실제적 타자와 대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데, L도식은 그 담화의 구조를 설명해주는 도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L도식

L도식의 화살표를 따라가 보면 주체에서 소타자로 소타자에서 자아의 방향이 있고, 대타자에서 주체로 대타자에서 자아로의 방향이 있다. 소타자에서 자아로의 방향은 상상적 축이라고 하고 대타자에서 주체의 방향은 상징적 축이라고 한다. 먼저 주체에서 소타자로 향하는 점선 화살표는 주체가 대타자에게는 직접 메시지를 전달할 수 없으며, 단지 소타자를 경유하여 자아로 메시지가 전달됨을 뜻한다. 그런데 소타자는 우리의 자아를 닮은 타자이지만, 주체는 이 소타자를 대타자로 간주하여 말을 건네게 된다. 대타자에게 직접 말을 걸 수 없는 이유는 대타자는 언어의 장소일 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체는 소타자를 대타자로 간주하여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소타자에게 주체가 건네는 메시지는 대타자의 기표에서 유래하는 메시지이며, 소타자는 자아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한다. 자아는 타자의 인정 혹은 인증에 의해 자아가 구성됨으로 주체는 타자에 의존적이다. 소타자가 건네는 메시지는 실은 대타자의 담화가 전달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타자로부터 주체에 흐르는 상징적 축은 무엇인가?

대타자의 담화는 무의식이며, 이 무의식은 상상적 축을 교차하면 점선으로 주체에게 도달한다. 대타자로부터 무언가 주체에게 도달하는데, 상상적 축을 통과하면서 말은 어떻게 되는가? 텍스트에서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나오지 않는다. 동시에 대타자로부터 자아에게 향하는 벡터도 있다. 이 벡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타자는 자아에 직접 영향을 미침을 의미한 것으로 보인다. 조엘도로는 이것은 인정이라고 말한 듯 하다. 대타자의 인증 속에서 자아는 구성된다는 거울단계의 이론과도 겹쳐진다.

L도식을 주체와 타자, 자아와 소타자의 의사소통의 방식이라고 간단히 규정해 본다면 우리는 타자와 진정한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다. 타자의 주체 역시 대타자에게 유래한 것이고, 나의 주체 역시 대타자에게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조엘도르는 주체와 타자간의 진정한 의사소통을 증언하는 충만한 말이 나타날 수 있는지 묻는다. 소타자가 아닌 대타자를 향하는 의사소통 말이다.

주체가 타자에게 말한 때, 그것은 소타자에게 말을 건네면서도 대타자로 그를 간주하게 된다. 하지만 주체가 그 타자를 대타자로 간주함에 따라 주체는 타자를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대타자의 타자성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말의 관계의 본질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

말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향해 말하는 것이고 우리의 말들은 말의 주인인 대타자의 인정을 깔고 있으며, 대타자로 하여금 우리를 인정하도록 만든다.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대타자의 인정이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말 속에서 여러분은 자신을 승인하도록 만드는데, 이러한 말의 가치는 주체로서의 이 절대자의 존재에 의존한다.”

 

우리의 담화는 대타자의 인정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모른채 소타자와 의사소통을 한다. 충만한 말의 담지자가 되기 위해서는 대타자의 인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충만한 말의 표출의 동인은 주체가 타자로부터 뒤집힌 형태의 메시지를 받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정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발화자는 수신자로부터 뒤집힌 형태로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받는다.”

 

내 눈 앞에 소타자를 가정해보자.

 

당신은 나의 선생님입니다. ”

이 말은 나는 당신의 제자입니다를 내포한다. 일견 자명해 보이는 말이다. 이 말들은 라깡적 의미에서 충만하게 의미하는 메시지이며, 대타자의 암묵적 인정을 예증해 주는 사례라고 설명하는데,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라는 말은 소타자에게 말하고 있지만, 실상 그것은 대타자를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대타자로 하여금 나는 당신의 제자라는 시선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의 구조는 중요한데, 이러한 구조만이 주체는 당신은 나의 선생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설명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이미 그에게 도래한 메시지, 주체를 이미 제자로 인정하는 대타자의 메시지를 통해서 확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충만한 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타자로부터 유래된 메시지가 주체를 드러나게 해주는 것인가?

 

우리의 메시지는 뒤집힌 형태로 우리에게 온다

 

이 말은 진정한 의사소통에서 말한다는 것은 곧 대타자가 자신으로 하여금 말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L도식에서 대타자로부터 주체에게 향하는 메시지는 뒤집힌 형태로 주체에게 도달한다. 그리고 그 것은 무의식적이기 때문에 주체는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를 전달한다. 주체는 소외된다. 주체는 당신은 나의 선생님입니다라는 말을 듣고 있는 지점이다. 자아의 자리에서 메시지는 중층결정적이다.

 

정신병적 구조에서 의사소통

 

망상적 구조에서 나오는 애피소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암퇘지그리고 여자는 나는 방금 정육점에서 다녀왔어요라고 그 남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남자는 그 여자에게 암퇘지라는 욕설을 했는데, 처음에 그녀는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어서 발음하지 않았다.

말의 구조에 따르면 우리의 배후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대타자인데, 정신병에서는 대타자가 없다. 다시말해 정신분열적 구조에서는 자아는 소타자에게 자기 자신의 메시지를 받는다. 자기 자신의 말이 소타자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두 소타자 속에 순환이 닫힌다. 망상적 말 속에서는 모든 것이 소타자의 자리에서 실재적으로 말해진다.

 

망상은 어떤 확신이다. 신경증은 환상을 사실로 오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망상은 자신의 환상을 사실로 간주한다. 대타자로부터 유래된 메시지를 뒤집힌 형태로 자아가 받는 것을 우리가 분열이라고 말한다면, 정신증자는 분열이 아닌 자아와 소타자의 유착상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들은 대타자의 인증 없는 세계의 불안을 떠안고 산다. 기표의 연쇄는 고정되지 않고 흔들린다. 오히려 그들의 담화는 대타자의 담화라가 점령해 버린 것은 아닐까 ..?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대타자를 말의 순환에서 배제했다는 것이다. 언어의 장 속의 질서를 잃어버린 주체는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버리고 만다.

 

 

L도식에서 상상적 축과 상징적 축의 교차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담화는 두 자아간에 이루어진다. 두 자아는 타자의 무의식을 참조하고 있다. 타자의 무의식을 참조한 주체는 소타자를 대타자고 간주하여 메시지를 전달하지만, 그렇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뒤집혀서 발화된다. 혼잣말을 할 때, 생각할 때도 우리는 타자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면 그 타자는 대타자인가? 그렇다면 대타자의 말을 순환이 아닌가?

주체의 소외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타자가 언어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배후에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회의에 부쳐야 할까.

 

기표의 순환이 원활하지 않다. 세상에 동떨어져 있는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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