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성욕의 담지자 시니피앙

untold 2024. 4. 25. 19:22

무의식의 현실은 성적이다. 

 

라깡은 다음과 같은 경구로 세미나를 시작한다.

 '전이는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하는 것이다' 

 

1

라깡은 전이에 대한 분석에서 사람들이 가장 회피하는 경향의 어떤 것이 이 경구에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가장 회피하는 어떤 것은 바로 섹슈얼리티일 것이다. 섹슈얼리티, 성, 성적현실은 동물과 같이 ‘번식이라는 자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인간에게는 동물의 성과 다른 의미가 생기게 된 것인가? 라깡은 무의식이 어째서 성적 현실이고, 이 성적 현실이 시니피앙의 도입과 동시에 욕망이 생성된다는 논점이 세미나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런데, 전이가 무의식을 현행화한다는 입장, 즉 사람들이 회피하는 성과 관련된 이 문구가 자신이 그동안 가르쳐왔던 입장과 다소 애매한 것은 아닌지 라깡은 묻는다. 먼저 무의식에 대해 라깡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무의식은 주체에 대한 말의 효과이고 이 말의 효과들에 의해 주체가 결정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정식으로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이고,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이다.

이와 같은 차원은 현실의 관점이 아닌 주체의 구성에 맞춰진 규정이였으며, 현실의 관점에서 무의식은 성적 현실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핵심으로 들어가 봅시다. 무의식의 현실, 그것은 성적 현실입니다. ”

 

무의식의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앞서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의 무의식, 언어구조로서의 무의식의 ‘형식’이라면 그 ‘내용’에 해당하는 것이 무의식의 현실, 바로 성적 현실로 간주할 수 있지 않을까. 앞서 라깡이 언급한 경우 '전이는 무의식을 현행화하는 것'이라는 경구에서 전이는 성적 현실이 분석 속에서 현행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욕과 시니피앙

 

라깡은 과학의 진보와 성적 현실의 통합에 대해 말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한 1900년대는 과학적 진보가 이루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이전에 성적분화는 종족보존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도 상식이 아니였던 시기였다. 플라톤에게는 ‘종’이 이데아 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종은 개체들의 형태로 존속된다고 보았다. 말馬이 종으로 종속된다는 것의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죽음과 성의 연관이 근본적이라는 사실이다.

하나의 종이 종속되는 것은 죽음과 탄생의 연속이다. 탄생은 성적 분화에서 다시 교미행위를 통해 삶을 유지하게 된다. 생식이라는 과정 속에 교미행위가 조화를 이루어 종이 종속된다. 성적 분극화와 결합하는 무엇. 즉 인간은 2차 성징을 통해 성기능을 갖게된다. 성기능들의 분배가 종의 존속에 기본이 된다.

라깡은 현대의 구조주의가 분명하게 해명하는 것은 생물학적 혈통이나 자연적 출산과 대립되는 결연結緣의 수준, 즉 시니피앙의 수준에서 근본적 교환이 행해진다고 보았다. 생물학적인 것과 대립되는 결연의 수준이라면 인위적인 것을 말할 것이다. 이어 라깡은 “사회적 작용의 가장 기초적인 구조들, 즉 어떤 조합의 항들로 기록될 수 있는 구조들이 재발견되는 것 또한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라는 것을 그것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작용의 가장 기초적인 구조들, 즉 어떤 조합의 항들의 구조란 무엇일까? 필자의 해석이기는 하지만,남녀의 만남, 결혼, 가족과 같은 구조와 같이 개체의 조합의 항들은 구조는 남과 여라는 구조의 합이고, 남과 여라는 구조는 사실 시니피앙에 불과하다. 라깡이 “이러한 조합이 성적 현실 속에 통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시니피앙의 도입”을 설명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어 유전자학에서 감수분열을 통해 일부 염색체는 잃게된다는 사실과 함께 유기체를 결정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조합하는 기능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로부터 라깡은 ‘성욕의 수수께끼와 시니피앙의 유희’ 사이에는 일종의 친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라깡은 성욕과 시니피앙을 어떻게 일종의 친화성이 있다고 본 것일까? 라깡의 설명은 원시과학과 중국천문학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원시 과학은 어떤 조합 음과 양, 물과 불과 같이 대립항을 활용해 춤을 리드하도록 하는 사고방식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라깡이 춤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사회적 성별 분류에 촉발된 춤의식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남녀라는 것은 대립항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는 사회문화 속에서 남과 여로 분류하고, 남녀의 조합을 하나의 춤으로 의식한다.

이어 라깡은 중국천문학을 시니피앙의 유희로 설명한다.

중국천문학은 과학이라기 보다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거대한 시니피앙의 별자리이다. 중국천문학은 시니피앙의 춤이라고도 말한다. 정치, 사회구조, 윤리, 시니피앙의 유희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만세력’이나 ‘사주오행’등의 중국천문학에 기반한 사주를 풀이할 때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의 사주에는 木이 많고, 金이 적다. 이 시니피앙들의 조합에 어떻게 의미를 책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시니피앙이 추는 춤이다.

그런데, 라깡은 궁극적으로 원시과학을 성적 테크닉으로 볼 수 있지 않느냐고 다소 도약한다. 성적테크닉으로서의 원시 과학도 분명 하나의 과학이기 때문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며, 원시과학이 춤과 결합된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라깡은 이 경계선, 매듭이 결절점이 있는데, 시니피앙이 더 암묵적이고 눈이 띄지 않을 경우 그 결렬은 더 늦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무슨 뜻 일까. 라깡에 이어지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호하다.

라깡은 별이라는 시니피앙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콩트의 말을 빌려 “별들은 제 자리에서, 다시 말해 순수한 시니피앙 기능으로 붙박여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는 말에 반해 우리는 이제 그 별들의 화학적 구성 등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천문학과 점성술이 완전히 분리되기 이르렀다고 말한다.

라깡이 원시과학을 성적 테크닉으로 보는 관점은 천문학에서 점성술이 분리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말한 조합, 교미행위는 시니피앙으로 인해 인간에게 다른 의미로 분리되었다고 의미로 생각된다.

 

2

 

라깡은 이 모든 논의는 무의식을 사유와 성적 현실 사이의 시원적 접합의 잔류효과로 간주해야 하는가의 물음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이고, 언어가 사유라면 우리의 사유는 성적 현실을 반영한다. 최초의 접합의 잔류효과에 대해 라깡은 역사적 고찰을 시도한다.

 

라깡의 설명에 따르면 먼저 융은 주체와 심리의 현실 사이의 관계를 원형이라는 이름으로 구현한다. 융 사상은 세계가 분절되는 원시적인 방식들을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무언가로 간주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리비도를 거부하게 되고, 리비도를 심적 에너지로 중화시키게 된다. 반면에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욕망의 현존으로 보았다. 라깡은 “리비도는 욕망을 통해 현재에도 계속 겨냥되어야 하는 무엇”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욕망은 실체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1차 과정 수준에 존재하며, 우리의 접근 방식 자체를 조종하는 것으로서의 욕망’이다. [1차 과정 수준에 속하는 욕망이 무엇인가?]

 

이어 라깡은 리쾨르의 해석학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리쾨르는 무의식의 실재론에 도달하고자 한다. 무의식은 행위의 모호성,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결여 속에 기입되어 있는 공백, 단절, 결렬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에서 리쾨르는 정신분석이 매 순간 다루고 있는 것을 순전히 우발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며, 이에 대해 라깡은 비판한다. “소위 해석학이란 인간의 연속적인 흥망성쇠 속에서 인간이 스스로의 역사를 구성하는 데 사용한 기호들의 진보, 그 인간 역사의 진보를 읽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역사는 그 가장자리에 있어서는 무한정한 시간으로까지 연장될 수도 있는 역사입니다.” 그런데 리쾨를는 역사가 아니라 분석가들의 작업을 우발적인 것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라깡은 분석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의식의 박동을 성적 현실과 결합시키는 결절점(매듭)이 무엇”인지 분석에서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라깡의 그 매듭은 바로 욕망이다. 라깡은 욕망은 요구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요구는 시니피앙들 속에서 분절됨으로써 환유적 잔여물을 남겨놓는다. 앞서 말한 인간의 사유와 성적현실의 접합 속에서는 환유적 잔유물이 남는다, 매듭은 환유적 잔유물로서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봉착할 수 밖에 없고, 충족되지 못하며, 실현불가능하고 몰인식 되는 요소“이다.

무의식의 박동은 주체의 드러남의 순간이다. 성적 현실과 결합되는 지점이 ’말실수‘로 드러난다면, ’말‘에 의해 드러난 것은 무의식적 주체의 욕망, 성적현실이다. 라깡에 따르면 프로이트가 1차 과정의 수준에서 성욕의 심급이라 정의했던 장과 접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욕망이다.

 

’욕망의 기능은 주체에게 시니피앙이 낳은 효과의 최종적인 잔여물‘이라고 라깡은 말한다. 그리고 이것(Desidero 나는 욕망한다)이 프로이트의 ’코키토‘라고 말한다. 욕망은 시니피앙이 낳은 괴물이다!

무의식은 말의 효과들이 전개됨에 주체가 결정되는 차원이라는 앞선 언급으로 볼 때 주체의 욕망은 시니피앙의 효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깡은 욕동이 본질적으로 환각에 의해 만족되는 장에 대해 프로이트는 뭐라고 했는지 주목해보자고 한다.

감각중추를 통해 들어온 것은 운동중추를 통해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막혔을 때는 뒤로돌아갈 것이다. 그런데 뒤로 돌아간 것은 어떻게 지각되는 것인가? 정지된 전류의 전구가 에너지의 역류를 통해 램프가 켜진다면 그 램프는 누구를 위해 켜진 것인가? 이런식의 퇴행에서 제3자의 차원은 본질적이다... 이러한 라깡의 설명은 이해가 난감한데, 억압된 충동의 메커니즘 속에서 제3자의 차원, 즉 시니피앙의 차원의 도입에 의해 욕망이 생성되는 차원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라깡은 언표의 주체와 언표 행위의 주체라는 이중 구조 형태와 지각의 동일성이 결정되도록 하는 그 자연적인 은유의 차원은 오로지 욕망하는 주체, 그것도 성적으로 욕망하는 주체의 현존뿐이라고 말한다. 지각된 것을 은유의 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 이기도 하다.

라깡은 이어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1차과정의 핵심요소라고 주장하지만, 단순한 환각에서 조차 욕구의 대상들은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안나의 꿈에서 나타난 ’파이‘, ’딸기‘와 같은 군것질거리들이 꿈에 나타난 것은 이 대상들이 성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고, 성적인 대상이 환각의 대상으로 삼는 오로지 금지된 대상이다.

욕동이 본질적으로 환각에 의해 만족되는 장이라는 의미는 욕망의 만족은 환상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쾌락원칙에 문제가 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환각 속에서 의미효과의 차원을 확인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환각에 현실성이라는 함의가 주어지는 것은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부터입니다.“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이란 무엇인가? 바로 요구에 의해 현실이 탈성욕화 되는 시점이다. 환각의 현실성 즉, 성적 현실이라는 함의는 주체가 욕망하는 시점부터이고, 주체의 욕망은 시니피앙의 도입에 의해 개시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개시되지만 환각은 성적 현실을 군것질거리로 대체 할 뿐이다.

”프로이트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을 대립시킨다면, 이는 정확히 거기서 현실이 탈성욕화된 것으로 규정되는 한에서입니다. “ 현실이 탈성욕화된 것으로 규정된다면, 자아이상은 탈성욕화된 리비도의 투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한다. 탈성욕화된 리비도란 무엇인가? 요구는 욕망의 가면을 쓴 담화가 아닐까. 라깡은 성적 현실이 분석담화의 수준아래 요구의 담화의 수준으로 흐른다고 보았다. 전이는 무의식의 현실을 현행화한다는 의미는 내담자의 무의식이 요구의 담화를 통하여 성적 현실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분석 경험 전체가 성적 현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좌절과 만족이라는 용어로 기울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분석에서의 상상계적 만족과 좌절이 나타나는 것은 무의식의 현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무의식이 성적 현실이라는 규정을 제3의 차원 즉 시니피앙의 도입과 욕망으로 라깡이 풀어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를 향해 흐른다. 타자의 욕망이 역류하여 주체를 구성하는 차원인 것이다. 타자의 욕망, 시니피앙은 욕망의 담지자이다. 교미행위와 접합한 시니피앙, 혹은 언어는 인간에게 무의식이라는 성적현실을 구현하게 만든다. 요구의 난맥을 넘고자 욕망은 환상을 사용하지만 이마저도 욕망의 구멍을 봉합할 수 없자, 우리는 새로운 잉여향락을 찾아 떠나는 방구석 여행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여는 결코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결여가 아닌 이상 말이다.

분석가와 마지막 상담에서 남긴 메모를 발견했다. 그는 나에게 냉철해지라는 조언을 했던 것이다. 분석의 시간이 물러나고, 나는 물러지고, 나태해졌다. 냉철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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