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발목이라도 잘라야 하나? 회전의자에 묶여 빙빙돌고 있는 것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자신에 대한 권태와 지겨움 그리고 역겨움...무거운 머리, 정지된 화면들, 밀려들어오는 '뻔한 말들'...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었을까?
이게 증상이라면 나는 마지막 향유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향유의 시간을 질질 끌면서, 뱅뱅 도는 것이다.
새로운 인생은 증상도 없고, 건강함만 있는 한 낮의 시간이 될 것이고, 안정과 고요속에서 묵묵히 공부하며, 시간을 견디다 보면 진리를 통과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는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어떤 미련이 있다. 이 미련은 어쩌면 새로운 인생에 대한 나의 상상계적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인생에 대한 정의 부터가 라깡 정신분석에서 배운 '새로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물론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증상'을 보존하고 증상의 힘을 이용하여 주체를 재발명하다는 논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분석가와 분석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내게 내재화 되어 나 역시 새로운 인생이 새로운 루틴을 발명과 실천이라고 따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잉여향유'와 '대타자의 욕망'의 시소에서 나는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시소에서 조금 더 놀고 싶다는 아이의 소망을, 그 미련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그 시소에서 내리면 사막이 펼쳐질 것 같다는 그 무의식적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이미 한 번 내려온 경험이 아이에게는 있지 않은가? 아이는 고의로 잊었다. ' 사막은 대노잼이다.' 라고 느낀 아이는 조금 견디다가 다시 시소에 올라탄 것이다.시소에서 뛰어내리면 대노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무한이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은 무한이다. 새로운 인생은 유한성에서 무한의 방향성, 가능성의 공간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아이는 죽어야 한다. 자아의 죽음은 환생을 가능하게 한다.
죽음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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