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캭텔 발제문이다. 역시나 나는 반복하고 있다. 타격없는 반복이 반복된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다.
한 해가 지났다. 그리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12월 초부터 시작된 슬럼프가 저번주 일요일을 기점으로 조금씩 나아졌다.
새해 1월 1일은 자연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오로지 인간만이 이러한 시간개념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한다.
지난 한 달간 거의 어두컴컴한 집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칩거했는데, 1월 1일이라는 분기점은 젊은 시절처럼 분기탱천하는 무의미한 작심 같은 것은 없었다. 어찌되었든 새해라는 기표에서 나는 약간의 기운을 얻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번 주는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는‘거짓말과 소문’이 내 세포들에게 전파된 듯 일어나서 청소와 빨래 등 비로소 몸을 움직일 맛이 났다.
무엇 때문에, 나는 심연으로 떨어졌는지, 그리고 홀로 왜 나아졌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무엇이 무엇인지를 안다해도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는 갱년기인가? 환상의 횡단인가? 우울증인가? 증상의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이 것이 왜 시작되었는지를 따지는 것 역시 별 의미가 없겠다 싶었다.
때로는 작은 에피소드 하나가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몰고 올 때가 있다. 그렇게 물 속에 잠기는 일, 어둠에 삼켜지는 일들의 원인을 그 에피소드에서 찾는 것은 상상계적일인 듯 싶다. 오히려, 그렇게 해서 잠기게 되었다면 어디까지 침수하게 되었는지, 어떤 반복을 하고 있는지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죽음충동의 반복속에서 허우적대는 ‘나란 타자’가 한심하다. 하지만 거기에 쾌락이 있는지 자꾸만 나는 거기로 고인다.
거울단계에서 형성하는 정체성 I
이번 발제문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공격성’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과 공격성과도 연관이 있다는 논의로 이어지는데,
주체가 거울을 보며 환호할 때는 언제고, 공격성을 갖게 되는 것일까?
거울단계는 1936년 8월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4차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발표되었다.
거울단계에 대해서는 라깡이 ‘나’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보기 위해 이 논문을 작성했다고 보여진다.
이 번 발제문은 거울단계와 정신분석의 공격성과 관련하여
라깡은 13년 전에 학회에서 도입한 거울 단계 개념에 대해 설명한다.
‘나’의 개념이 어떻게 형성이 되는가를 밝히기 위해 이 논문을 작성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정신분석 경험에서는 ‘나’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거울단계이론은 코기토로부터 직접 유래 하는 철학과 대면한다고 라깡은 말한다.
코기토에서 유래하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철학과 대면한다는 것이 인간존재에 대한 규정이 같은 심금이라고 보는 것인가? 오늘도 여전히 헤맨다.
라깡은 침팬지가 거울을 보고 별 흥미가 없어하는데 비해, 아기들은 자신의 모습에 환호한다. 그러나, 이 덩어리가 자신임을 증명해줄 대타자 어머니가 필요하다. 어머니는 아기를 ‘이게 너’라고 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자아’라는 허상이 구성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아기는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증받는다. 인간 세계에서 우리는 타인의 인증없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신앙이 없이 타자의 신앙 속에서만 살게 된다.
이에 대해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숭이와 달리 유아는 이미지가 보여주는 움직임과 거울에 비치 이미지의 환경 사이의 관계, 그리고 잠재적 복합체와 그것이 이중화하는 현실, 즉 자기 몸과 주변 및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유희적으로 시험한다.
라깡이 설명하는 유아의 이 행동은 18개월까지는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를 보유하는데, 그것은 리비도적 역동성뿐만 아니라 편집증적 인식에 관한 우리의 고찰 속으로 삽입된 인간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보여준다.”
거울단계가 인간 세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보여준다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이 대타자라는 존재없이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존재론적 구조를 말하는 것인가?
리비도적 역동성이란 유아의 나르시시즘적 쾌락, 집요한 요구이며, 인간의 편집증적 인식은 거울이 자신이라고 믿는 우리의 망상을 의미하는 것을 생각된다. 정신분석에서는 이 거울 단계를 동일화로 이해한다.
동일화는 자신과 타자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체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세미나17에서 주체는 상징계의 매스, 주인기표가 삽입된 후 주체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이다. 이 무의식의 주체는 이상적 자아(Ideal - I)와 다르다. 이상적 자아는 거울에서 비롯된 주체, 호명에 따라 구성되어진 주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거울단계의 기능은 내가 보기에 유기체와 그의 현실 또는 흔히 말하듯 내부세계와 환경 사이의 관계를 수립해주는 이마고들의 기능의 특수한 사례임이 입증된다.”
“하지만 인간에게서 자연과의 이 관계는 유기체 한가운데서의 어떤 파열에 의해 그리고 태어난 지 몇 달되는 신생아가 느끼는 불편함과 동작에서의 부조화의 몸짓들에 의해 드러나는 원초적 불화에 의해 변질된다. 추체로의 해부학적 미완성 그리고 신생아에게서 모계 유기체의 특정한 체액이 잔류하는 현상과 같은 객관적 개념들은 인간의 탄생에 특수한 조산성은 기정사실이라는 나의 견해를 확인해 준다.”
이 문장도 이해하기 좀 까다로웠다. 인간은 나약한 채로 태어나서 충만한 전체 게슈탈트를 ‘자아’이미지로 같게 된다. 타자를 보며, 거울을 보며 완전한 신체의 윤곽을 보게되지만 마음대로 그것을 움직일 수 없는 부조화로 인해 자연과 인간은 원초적 불화로 변질된다.
“이 발달은 개인의 형성을 역사 속으로 결정적으로 투사하는 시간적 변증법으로 체험된다. 거울 단계는 내적 압력이 기능부전으로부터 선취로, 그리고 주체를 소외 시키는 정체성(주체의 정신적 발달전체를 엄격한 구조로 표시한다) 이라는 마침내 입게되는 갑옷으로 서둘러 전개되는 드라마이다. 이 선취는 공간적 동일화의 유혹에 사로잡힌 주체에게는 조각난 신체 이미지로부터, 육체의 총체성의 ‘정형외과적 형태라고 내가 부르는 것까지 연속되는 환상들을 만들어 낸다. ”
그리하여 내부세계로부터 환경으로의 원의 파열은 자아의 검사라는 완성되지 않은 구적법을 낳는다.
라깡은 거울단계가 히스테리적 억압과 회귀를 강박적 도치와 격리 과정보다 더 태곳적 단계에 위치시키며 이 도치와 이 과정 자체를 거울에 비친 나를 사회적 나로 전환시키는 시기에서 유래하는 편집증적 소외의 전제조건으로 위치시킨다고 설명한다.
불완전한 개인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라깡은 시간적 변증법으로 체험되며, 거울단계에서 내적압력이 기능부전으로부터 선취로 정체성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낸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내적압력은 어떤 욕구, 움직이고자 하는 욕구라면 욕구대로 움직일 수 없는 신체로부터 우리는 정체성이란 환상의 갑옷을 두르게 되는데, 이르게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해 위해 우리는 조각난 신체이미지로부터 (즉 눈에 보이는 나의 손과 발) 완전한 형태라는 환상을 만들어 낸다.
그럼 이러한 환상에 대면하기 위해 조각난 신체가 드러나게 되는 것일까?
아래 라깡의 글을 일어보면 계속되는 분석 속에서 개인의 공격적 분해가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조각난 신체의 꿈을 꾸게 된다고 말한다. 분석 초기에 조각난 신체의 꿈을 많이 꾸었었다.
생각나는 꿈으로는 아보카도 씨앗 속에 조각난 신체의 조각들이 들어 있어 있는 꿈과 긴 다리, 훼손된 팔루스 등 한동안 흡사 컬트영화같았던 꿈이 많다. 이러한 조각난 신체의 이미지들은 보쉬그림에 많이 나타난다. 재밌게도 이것을 라깡은 허약화의 계보라고 부르고 있다.
나의 이론적 참조 체계 속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든 또 다른 용어인 조각난 신체는 계속되는 분석이 개인의 공격적 분해의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규칙적으로 꿈속에 등장한다. 그런 다음 이 육체는 잘려진 사지 형태의 또는 내적 박해에 맞서 날개가 솟아나고 무장하는 등 외형적으로 제시되는 기고나들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근대인의 상상력이 정점에 달한 15세기의 융성기의 몽상가 보쉬에 의해 회화에서 불후의 모습으로 고정되었다. 하지만 이 형태는 심지어 유기체적 수준에서, 즉 히스테리환자의 환상의 해부학을 정의하는 ‘허약화의 계보’들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 이것은 히스테리환자의 분열증상이나 경련증상에서 나타난다.)
정신분석경험에서 육체의 분해는 어떤 의미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 챕터인 ‘정신분석과 공격성’에 관련언급이 있어 미리 얘기해 보고자 한다.
“명제2. 공격성은 분석 경험 속에서 공격의도로 그리고 육체의 분해라는 이미지로 주어지며, 바로 그러한 방식
으로 공격성은 효과적인 것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
그렇다면, 나는 분석경험시 꾸었던 꿈들이 ‘공격의도’가 있는 꿈이였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럼 무엇을 공격하는 것일까? 분석가를 공격하는 것인가? 이어지는 라깡의 언급을 보면 분석경험은 무의식적 의도의 압력을 느끼게 한다. 그런 압력에 대한 방어로 어쩌면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다. 위의 그림들을 보면 잘라신 신체는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괴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러한 기괴한 꿈을 꾼 주체는 역시 언캐니한 감정에 휩싸인다. 어쩌면 분석가를 겨냥한 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이외에서 분석에서 공격성은 다음과 같은 증상으로 측정할 수 있다고 라깡은 설명한다.
- 요구가 많은 어조, 담화의 중단, 주저함, 굴절, 실언, 이야기의 부정확함, 기본규칙의 적용의 불규칙성, 분석시간에 늦는 것, 계산된 결석에서의 비난, 환상적 공포, 분노한 감정적 반응, 위협하려는 목적을 가진 시위적 행동에서 그것을 거의 측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분석가를 왜 공격하려고 하는가? 실재에 대한 방어가 공격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라깡은 공격의 의도의 효과는 명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갉아먹고, 기반을 약화시키고, 분열시킨다. 거세한다.
죽음으로 이끌고, 타격한다. ”
이어 라깡은 고전적 심리학에서의 이미지로는 정신현상을 해명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반면에 정신분석은 주체 속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한다. 특수한 이미지 중에서는 공격적 의도의 선택적 벡터를 표상하는 것이 있으며, 생식기관 제거, 거세, 훼손, 절단, 분열, 할복, 삼킴, 육체의 개복의 이미지, 파편화된 신체의 이마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신과 할례의식 역시 인간과 육체사이의 특수한 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인간의 공격성이 마치 타고난 것과 같이 보인다.
라깡은 보스의 작품에서 악마의 형태들을 만들어 낸 것은 원초적자기 - 환시 이미지가 지배적이라는 것에 의해 밝혀졌다고 말한다. 원초적 자기-환시란 파편적으로 자기의 몸이 아닌가?
라깡은 심지어 나르시시즘적 구조를 <세족적인 쾌락의 동산/.의 기진맥진한 쌍들이 사로 잡혀있는 유리구 속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의 과정은 의식속에서 특권화된 환상들이 증언해주며 동일화라는 형성적 역할을 하는 이마고를 개념화할 수 있도록 한다.
거울 단계가 완성되는 이 순간은 동류의 이미고와의 동일화와 원초적 질투의 드라마를 통해 이후 나를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상황과 연결시키는 변증법을 개시한다. (이것의 중요성은 전가행위를 관찰한 뷜러학파가 충분히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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