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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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피앙의 나무(문자라는 증서 4장)

“부유하는 두 왕국” 소쉬르의 부유하는 두 왕국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두 왕국이다. 기호의 형성은 부유하는 두 덩어리의 ‘동시적’ 절단으로 묘사" 한다.  이 동시적 절단은  관습적으로 묶인 기호의 단면이다. 라깡에게 부유하는 두 덩어리는 ‘쉼 없이 미끄러지는 것’이 관건이다. 기표도 흐르고, 기의도 흐른다. 소쉬르는 시니피앙 연쇄에 대한 시니피에 연쇄의 공존을 설정하지만, 라깡은 시니피앙의 ‘독립성과 선재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의미화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의미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는 그만 미끄러지고 어딘가 정박해야 한다. 이 정박하는 지점이 누빔점이다.라깡은 에크리에 805쪼과 808쪽 사이의 누빔점의 그래프, 욕망의 그래프를 넣었다. ..

cartel 2024.11.22

욕망의 사후성(5장 언어적 기호의 가치와 라깡의 고정점)

“랑그란 언어 빼기 말” 소쉬르는 언어적 기호 개념을 제시한다. 언어적 기호는 사물과 단어의 결합이라는 전통적 사고와 단절하고, 사물을 이름이 아닌 개념을 청각이미지와 결합시킨다. 청각이미지는 물질로서의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심리적 각인이다. 이는 달리 말해 ‘소리의 대리표상’이고, 감각적이다. 소쉬르는 “랑그란 언어에서 말을 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언어는 랑그와 말이 결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적 기호는“두 측면(개념과 청각이미지)을 가진 심리적 실체”의“결합”관계를 통해 단번에 형성된 것으로 보았다. 개념은 기의로 청각이미지는 기표로 대체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체계는 기호의 자의성, 기호의 불변성, 기호의 변질, 기표의 선형적 성격이라는 특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위에..

cartel 2024.11.21

꿈의 언어

꿈은 우리의 무의식을 상연한다. 많은 꿈을 꾸며 살아왔지만, 최근에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나 낮의 세계에 갑자기 보였다 사라지는 몇 장의 셀로판지는 통편집된 내 꿈의 일부를 보는 것 같다. 정신분석공부를 하기전에도 낮만큼 밤의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은, 꿈이 삶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가야만 하는 길’을 가르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꿈이 ‘압축과 전치’, 중복결정의 위장을 하는데 ‘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겠나 싶다. 예전 보다는 내게 ‘꿈의 위상’은 낮아졌다. 꿈이론에 대한 공부를 통해 알게된 것은 의식의 내가 꿈을 통해서 어떤 ‘진리’의 수준으로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것은 개인의 신화일 수 있다는 것이다. 초기 라캉의 “무의식은 대타자의 담화”라는 언명에 따르면, ..

대학원 담화 2024.11.11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신작영화 '룸 넥스트 도어'는 죽음 옆에 삶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감독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 하나의 기호처럼 다루는 것은 아닌지 물으면서, 죽음은 누구에게 내리는 눈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아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 듯 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옆방에 있지만, 사람들은 죽음을 보지 않기 위해 아래층에 산다. 빨간 도어는 열려있으면 '삶'의 기호였지만 닫혀있으면 '죽음'의 기호가 된다. 그러나 기호는 틀렸고, 죽음은 느닷없이 삶에 포함된다. 느닷없지만, 폭력적이지 않는 죽음을 감독은 그려낸다.  이 영화는 안락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이야기이도 한 것이다. 경찰, 즉 법은 죽음에 대한 권리를 빼앗는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에 대해서는..

각각의 오이디푸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해소되면서 초자아가 발생했다고 생각하는 반면, 멜라니 클라인의 초자아는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아기는 죽음본능을 가지고 태어나면서 자신 안에 있는 공격성을 방어하기 위해 분열의 기제를 사용하게 된다. 이 공격성은 아기에게 좋은 대상과 나쁜 대상을 분열시키고, 특히 나쁜 대상은 죽음욕동을 상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자리는 편집-우울적 자리로 아기가 엄마를 전체 대상으로 통합하기 이전 시기이다. 이 시기에 아기는 구강 가학성이 외부에 투사되기도 하고 내사되기도 한다. 내사된 공격성은 아직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젖떼기 경험을 통하여 아기는 나쁜 젖가슴에 대한 박해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아기는 자기가 엄마를 해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면..

대학원 담화 2024.11.05

무의식의 길(review)

저항보다 무의식       브루스 핑크는 프로이트 이후 정신분석 자체가 일종의 ‘저항’이 걸렸다고 보았다. 정신분석의 저항인 ‘방어기제’를 해석하는 것에 몰두한 점 자체가 ‘정신분석’에 대한 ‘저항’이다. “부정과 전치, 정동의 분리, 타협형성, 생략, 전환, 자기에게로 향한 반감, 반동형성, 정동의 억제, 투사, 취소 등” 이러한 방어전략을 해석하다 무의식에 다다르는 프로이트의 목표를 잊어버린 것이다. 알 수 없는 증상에 대해 이러한 ‘해석’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일종의 향락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꿈해몽을 찾아보듯이, 분석상황에서 방어전략에 네이밍을 붙인 다는 것 자체가 쾌락의 측면이 있다. 증상에 이름을 붙이듯 말이다. 라깡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향락은 주지 않는다. 주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방어기제..

대학원 담화 2024.11.05

프로이트의 숨겨진 환자들

왠지 이 책을 읽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프로이트라는 환상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 했는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이 거대한 환상이고, 그러한 환상이 없이는 우리는 살아가기 힘들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차원의 환상이 내게는 프로이트와 라깡이다. 이 책에 대한 거부는 일차원적인 것으로 ‘정신분석에 대한 나의 믿음’이 흔들리지는 않을까 하는 무의식적 걱정이었을 것이다. 작가가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프로이트의 해석에 대한 ‘해석’이 아니다. 프로이트가 은유했던 이름 대신에 실제의 ‘이름’을 호명하여, 텍스트 바깥의 그들의 삶에 주목했다. 저자는 대신에 프로이트도 텍스트 바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몇 가지 사례를 제외하고는 결국 프로..

대학원 담화 2024.10.30

기호의 발골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은 1957년 발표되고 작성되었다. 이 당시 정신분석 학회들이 단행한 두 차례에 걸친 라깡 제명이 발생했던 시기에 위치한다. 이 시기 라깡은 정신분석 실천과 제도적인 장에서 가장 명백한 단절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절’이라는 기표는 이 글에서 중요하다. 라깡은 정신분석이론을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뽑아낸 기호론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라깡적 언어학을 주창’했다는 점이 반복에서 제시된다.   문자의 심급에서 정신분석의 이론화를 꾀한다. 저자들이 인용한 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문자의 심급은 대학인들에게 제시되었다. 문학은 ‘문자에 대한 라깡의 이론화’에 적합한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2. 문자의 심급은 과학적 담론, 어떤 진리에 관한 담..

cartel 2024.10.24

쥐인간 사례의 정치적 읽기

정치적 역학이 불러오는 변증법적 전개  이 에세이는 분석가의 권위와 이에 순응하는 환자의 정치적 역학과 변증법에 대한 것이며, 저자는 임상에서 해석은 경제적 및 정치적 무의식을 드러낸다고 가정한다. 브루너는 프로이트의 담론이 강박 신경증을 자신의 언어에 대한 권력과 타인에 대한 언어의 권력에 대한 불안정한 관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권력장애로 보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강박신경증을 단어, 사고, 정서적 상태가 강제로 침투하는 것으로 보았다. 히스테리가 신체의 통제의 상실이라면, 강박증의 단어, 사고의 통제의 실패이다. 정신분석에서 정치적 관점을 도입한다는 것은 언어와 권력을 연결wnl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단어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라고 말한다.(1890..

대학원 담화 2024.10.21

무의미의 체포

의미의 덫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의미의 의미라는 연쇄가 아니라, 무의미를 체포해야한다. 어떻게 의미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보자. 그 무중력의 상태를 지루한 반복, 멈춤이 방법이다.  의미의 외부로 돌출 의심과의 쟁투 이미지와의 전쟁지루한 반복의 고된 노동무중력의 하루일단은 그것이 필요하다. 리비도의 회수 내 존재를 어디에 내어줄 것인가? 생명을 어디에 바치고 있는 것인가?  하루하루가 나 자신과의 사투가 되는 것에서 벗어나, 텍스트와 사투를 벌어야 한다. 그것이 고된 길이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