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시니피앙이 환상한다

untold 2023. 3. 1. 10:20

나지오는 ‘환상의 형성에서 타대상이 어떤 기능’하고 있는지 이번 강의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다. 타대상은 정신분석을 다른 과 구별하는데 있어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았다. 타대상은 정신분석실천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분석가 담화에서 분석가는 대상a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빗금친 주체에게 ‘지식을 생산하기’를 요구한다. 그 지식은 주체가 생산하는 새로운 주인기표 S1이다. 대상a는 내담자의 욕망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욕망의 원인이 되는 분석가는 내담자의 이자관계로서의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대상a로써의 분석가는 어떻게 내담자의 욕망의 원인의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인가? 대상a가 내담자의 무의식에 분석가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라깡의 환상의 공식에 따르면 빗금친 주체와 대상a의 관계는 환상을 만드는 기반이다. $◇a 나지오는 주체와 대상a의 동일시를 그 환상의 원리라고 설명한다.

 

라깡은 “분석가는 분석에서 타대상의 표상대리 가능하다”고 말한다. 대상a는 상징화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관계로 분석가는 내담자에 의해 규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무의식이 움직이려면 욕망의 대상이 아닌 욕망의 원인으로써 작용해야 하는 기능이 요구된다. 나지오는 이는 정신분석경험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가의 역할

 

나지오는 정신분석가의 역할을 ‘향락’에 속한다고 말한다.

어떠한 점에서 향락에 속하게 되는 것인가? 나지오는 내담자의 ‘현행진술’이라는 사건이 무의식을 움직인다고 보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니피앙적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분석가의 ‘청취’가 불가피한 전제가 된다. 그러나 또 다른 본질적인 특색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향락에 속한다고 발한다. 정신분석가는 분석이 진행됨에 따라 ‘정신적 삶에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또한 역설적이게도 ‘분석가와 분석수행자를 밀접하게 공동으로 포함시키는 독특한 정신적 장소’가 된다. 그 곳은 두 파트너를 가두고 흡수하는 ‘중간 장소’가 된다. 나지오는 “분석은 분석가와 분석수행자의 정신적 삶을 담아내는 유일한 장소”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분석상황은 외부의 팔루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세팅된 장소로, ‘분석가와 내담자의 정신적 삶을 담아내는 장소’로 나지오는 표현하고 있다. 분석 상황이 어쩌면 ‘다른 세계’에 들어선 것과 같은 낭만주의적 표현도 떠오른다. 시간이 흐를수록 팔루스는 매우 진부하게 여겨지고, 분석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미쳤을 때, 나는 내가 가진 정보들에 인한 기표연쇄가 멈춰지고, 분석가는 분석가는 한 없이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석상황에서 얼굴을 구긴 채 뱉어내던 말들 사이로, 어쩌면 현행진술이 도드라 졌을 것이다. 언어가 존재를 초과하는 순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보다, 생각보다 빠르게 나가는 언술들 속에서 ‘어느 기표’를 분석가가 언급하면 그 ‘기표’가 중요해지면서 그 기표에 매달린 환상들도 딸려 나왔던 듯 싶다.

 

나지오는 분석이 두 사람과의 독특한 정신장치, 내가 보기에 분석가와 내담자의 무의식이 서로 엉켜 어떤 효과를 낸다면, 그러한 효과 이전에 ‘전이’가 소멸하고, 본격적인 분석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나지오는 “정신분석가의 위치는 욕동의 대상에게 마련된 자리에 상응하게”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욕동이란 ‘이드, 충동’과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는 정신분석가 욕망의 대상이 된 것처럼 상상계적 관계가 시작되다가,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가 반복’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때로은 쇼크처럼 깨닫게 된다. 분석에 마치 속은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반복의 구조속에 ‘근본환상’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는 분석경험을 통해 그 증상의 반복을 마주하면서, 환상의 횡단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환상은 쉽게 말하면 ‘개인의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본환상이 무엇이냐를 알아보는 작업은 쉽지 않으며, 분석이 끝이 날 때까지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근본환상에 대해 명확한 구성이 어렵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일부를 알아냈을 뿐이라고 느꼈다. 나지오는 이러한 ‘수수께끼’ 처럼 보이는 시나리오가 환상의 특색이라고 말한다.

 

그 특이한 장소, 그 특이한 사람, 특이한 쾌락

 

특이한 쾌락이라고 말한 것은 그저 ‘향락’이 분석에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 써봤다. 가변적인 분석시간에 한 마디 불평도 없이 3년을 다녔다. 매번의 분석시간 이후는 괴로웠지만, 거기 분명 향락이 있었기에 나는 지치지 않고, 욕망을 욕망할 수 있었다. 그 향락은 도대체 무엇이였을까? 나지오의 말을 들어보자.

 

“ 분석의 기능은 세 가지 향락의 형태(대타자 향락, 팔루스적 향락, 잉여향락) 중에서 잉여향락에 해당됩니다. 그것은 타대상의 범주와 일치해요”

 

분석가가 잉여향락이 된다는 것은 곧 증상이 된다는 것이고, 증상이 된다는 것은 향락이 거기에 있음을 표상대리하는 것이다. 이를 실제적 차원에서 나지오는 ‘분석가의 침묵’에 대해 말한다. 분석가의 침묵은 ‘잉여향락의 밀도를 확인시키는 어떤 농축된 침묵으로, 무의식을 야기하고 재가동시키는 역동적인 침묵’이며,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구멍’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분석가의 침묵은 의미를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그 공백에 부딪치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지오는 이를 '타대상의 외장semblant'이라고 공식화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더 나아가 분석가는 ‘입구의 에너지, 색정적인 입구의 테두리를 누비고 다니는 영원한 향락의 흐름’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처음 읽었을 때, 분석가가 ‘응시’의 부분충동이 된 것으로 보았다. 응시 역시 대상a이므로 분석가의 ‘응시’를 내담자는 대타자의 응시로 변환하여 쾌락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이 들었다. 유사 주이상스로서 정신분석가가 기능을 하여 우리는 ‘근본환상’의 반복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분석가의 침묵이라는 것이 어떻게 잉여향락을 일으키는 것일까? 나지오가 말한 타대상의 외장은 대상a가 기표가 아니므로 분석가의 행동속에서 내담자의 무의식은 더 크게 반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의미가 없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에 속하므로.

 

분석경험에서 환상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정신분석에서 환상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적 차원이 아니다. 환상이란 ‘본래적 환상에서 파생되어 나온 다양한 형태의 환상적 형성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좀 더 상황적이고 치료의 특정 국면과 결부되어 있고, 또 어떤 것은 ‘전이’를 환상의 형성물로 볼 수 있다.

 

나지오가 말하는 환상의 징후들과 분석가의 역할을 알아보자

 

먼저 환상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한다. 어떤 장면, 일반적으로 소수의 인물들, 하나의 행동, 하나의 지배적인 정서 그리고 그 장면에 등장하는 신체의 특정한 부분이다.

- 환상은 분석수행자의 이야기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때로 분석수행자의 행동들, 꿈, 몽상들에도 나타난다.

환상은 반복되면서 대개 잊을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는 이야기나 행동으로 표현된다.

환상은 분석 수행자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수수께끼처럼 생각하는 어떤 시나리오와 관련되어 있으며, 분석수행자는 이를 묘사하고, 감정을 인식하고 있다. 때로는 그 환상은 쾌락의 시동장치이다. 그러나 분석수행자는 자신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지만, 의지와 상관없이 반복되는 것으로 경험한다.

환상은 그것 고유의 장소, 색채, 시간, 빛, 소리의 이미지들이 가득 차 있는 어떤 장면을 표현한 하나의 이야기이다.

행동이 전개되는 장면의 등장인물들을 확인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인-유아, 유아-동물, 치료자-유아 등 등장인물과 본인이 거기에 등장하고 어떤 역할인지 혹은 행동의 주역인지 관람객인지 물어야 한다.

또한 분석수행자가 행동의 묘사를 위해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사용하는 동사를 포착해 냄으로써, 펼쳐지는 주된 행동의 위상을 잘 파악하는 것이 좋다. 환상은 항상 환자의 애기 중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어떤 동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문장으로 꾸며져 있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언급했던 유명한 환상 ”아이가 매를 맞고 있어요“에 나오는 때리다라는 동사, 어린 아이가 개에게 물렸다는 환상에서 물다라는 동사가 그것이다. 그 동사는 색정적 입구의 테두리와 이중의 요구라는 단절의 흔적으로 확인한 시니피앙을 구체화 시킨다. 동사는 주체와 대상의 단절을 나타낸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을 분리시키는 동시에 결합시키는 시니피앙이다.

주체는 시니피앙에 의해 분열되는 동시에 시니피앙으로서 주체가 된다. 나지오는 이 시니피앙의 구체화로서 ‘동사’가 있다고 보았다. 개인적으로 ‘나의 동사’는 무엇이었을까?

또한 나지오는 환상의 주된 행동을 지배하는 등장인물들에게 스며 있는 감정이나 긴장(정동)을 찾아보는 게 좋다로 말한다. 나지오는 잉여향락과 정동, 쾌락이나 고통에 대해 잘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정동은 잉여향락의 등가물은 아니다. 그러나 행동에는 실려있는 향락은 일반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행동에 작용하는 무의식적 향락은 의식적 주체가 느끼는 정동과 다름을 명확히 하면서 행동에 개입하는 신체의 특정부분을 고려해야한다. 나지오는 행동의 줄거리는 ‘도착적인 시나리오’처럼 전개된다. 이것은 하나의 생생한 그림이나 정지화면에 가까운데, 여기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도착적 성격의 몇 가지 동작들로 한정되어 있다. 그러나 환상에 내포된 이 도착성은 임상적 실체로 간주되는 성도착과는 다르다. 환상의 출현과 그것의 도착적인 내용은 분석수행자에게 비밀로 간직해야 할 부끄러운 버릇으로 경험되고, 이런 이유로 분석에서 환상은 일반적으로 뒤늦게 보고된다고 나지오는 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환상이 있었는가 생각해보다가, 나지오가 설명한 대로 몇몇 장면이 내게 있었다는 것이 생각이 났다. 그 중 하나의 시니리오는 나는 ‘어린 소녀의 어머니이고, 그 소녀를 목욕’시키는 장면이다. 이 소녀는 내가 한때 좋아했던 사람의 딸이고, 나는 그에게는 배신을 당하고, 이 어린 소녀를 사랑하게 되는 시나리오다. 이 환상의 원인이 타대상이고 나의 욕망이 대상이자 원인이였던 그 사람이 증상이 되어 나는 환상의 시나리오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타대상으로 작용한 것은 무엇이였기에 어린소녀를 목욕시켰을까? 그리고 그 소녀는 바로 내가 아닌가? 욕망의 대상이기를 바라는 그 소녀와 무의식적 주체의 동일시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환상속에서 주체는 대상이 된다.

 

이제 환상의 문제로 넘어가자보자.

 

나지오는 “환상속에서 주체는 대상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주체는 (...) 젖가슴, 대변, 남근 등의 대상들을 얻거나 잃어버리고 또 그것으로 인해 파괴되거나 그것들을 보존하는데, 특히 본디 환상에서 그 대상들이 기능하는 위치에 따라서 주체가 그 대상들이 되므로...” -자끄 라깡-

 

나지오는 환상적인 구조는 주체가 대상이 되어버리는 주체의 동일시 기제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빗금친 주체와 대상a가 동일시 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후기 라깡으로 가면 증상이 주체라고 말한다고 하니, 이를 의미하는 것일까. 젖가슴에 대한 유아의 향락은 젖가슴 자체가 유아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이것은 이론적 설명이다) 관음증 환상는 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보는 나(대타자)를 환상으로 설정한다.

“실제로 대상의 분리는 욕망 대상에 대한 주체의 동일시와 동시에 일어나요. 사실상 주체가 그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 하는 일이 없다면 진정한 상실도 안 일어나지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 됩니다. ”

 

응시의 감각이 대타자의 응시로 부터 떨어져나온다면 그것은 순전히 주체의 환상에 속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부분 충동을 보완하기 위해 환상을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이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개인의 환상의 구조가 개개인의 고유하기 때문에 우리가 자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예시로 나지오는 배고픈 아기의 논리를 제시한다.

첫번째는 아기는 “나는 배고파요”

두번째는 어머니는 “아가야, 너에게 젖을 먹이게끔 해다오.”

아기 “엄마 나를 먹어줘” 는 동일시 단계로, 젖가슴이 분리되어 욕망의 대상이 되면 주체는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 하면서 환상이 형성된다. 주체는 구강적 대상이 되고, 유아는 차라기 대타자의 포식에 제공되는 젖가슴이라고 할 수 있다.

 

$◇a 주체는 타대상이라는 논리

 

나지오는 “라깡이 환상의 뼈대를 제공하면서 주체가 분리된 대상과 동일시 하는 그 순간을 $◇a 라는 기호로 형식화”한다고 말한다. 주체가 분리된 대상, 즉 대상a와 동일시하는 순간이 환상의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 나지오가 설명한 타대상에 대한 부분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면,

 

상상적 함출성, 색정적인 테두리와 이중의 요구라는 조건 아래 신체의 어떤 부분이 욕망의 대상이 된다. 환각된 대상으로서 욕망이 대상이 생성되는데, 이러한 메커니즘은 환각이란 그 사실 자체에 일어나고, 이러한 환상속에서 주체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체로부터 대상a가 분리되고, 그것의 우리의 욕망의 원인이 되어 환각된 욕망의 대상이 생성한다. 나지오는 환상속에서 주체가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이란 자신을 욕망의 대상과 동일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언뜻 ‘우리가 젖가슴’이다는 이해되기 어렵지만, 젖가슴이라는 대상a가 주체에서 분리된 대상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것의 근원을 망각한 채, 그저 ‘대상a의 외장’을 환상으로 가지게 된다...

 

사실상 주체가 그 상실된 대상과 동일시 하는 일이 없다면 진정한 상실도 안일어 나지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바로 그것이 됩니다.

 

“주체가 대상이라고 확언하는 것은 환상의 요인, 곧 환상적 구조를 조직하는 요소가 유아나 분석수행자라는 그 사람은 아니라는 걸 뜻한다. 환상은 누군가의 작품이 아니라 대상의 활동과 동시에 시니피앙의 단절에서 빚어진 결과이다.”

 

나지오는 환상이라는 것 주체가 아니다.

대상의 활동과 환상은 시니피앙의 단절에서 빚어진 결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먼저 시니피앙의 단절이란 기표연쇄의 단절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S1의 주인기표를 뜻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나지오는 환상의 중핵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환상의 중핵이 주이상스인가? S1인가?

 

또한 “타대상은 환상의 동인이며, ◇로 표상되는 타대상의 작용인”이다. 타대상이 환상의 원인, 즉 욕망의 원인이며, 마름모꼴은 타대상이 주체에 작용함을 뜻한다. 나지오는 환상의 동력은 “향락의 핵”이며, 이 핵을 중심으로 환상이 연출된다고 말한다. 향락의 핵이란 주이상스이다. 나지오에 따르면 주이상스는 기표가 없으므로 우리는 주이상스를 중심. 라깡세미나 7에 따르면 주이상스로부터 떨어져 나온 대상a를 가지고 환상을 만드는데, 이 환상은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타대상을 중심으로 연출된다.

 

그런데, 환상을 만드는 주체는 환자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과 이것의 자리를 표시하는 시니피앙(동사)”라고 보았다.

 

나지오는 환상은 향락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잉여향락주위에 세워진 뼈대이지 잉여향락 자체가 환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분석가에게 “선생님을 먹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환자가 가진 부분향락은 ‘젖가슴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이 “환상 경험의 주체”는 “향락이자 동시에 그 향락을 표현하는 시니피앙”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환상 경험의 주체가 아닌가? 의식적 주체가 환상을 경험하고, 감정을 내비치는 것이 아니라,

나지오는 환상을 경험하는 주체는 향락이자 동시에 향락을 표현하는 시니피앙이라고 말한다.

 

즉 타대상이 향락경험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인가??

 

나지오는 문제의 그 주체는 무의식의 주체로 말하면 환상을 만들어내는 무의식적 경험의 효과로서의 주체이지, 자신이 감정들을 내비치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주체란 하나의 시니피앙이 다른 하나로 대리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효과차원이라고 보았을 때, 자아를 가진 인간이 환상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주체, 시니피앙으로서의 주체가 환상을 경험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어 나지오는 확실히 환상의 구조인 $◇a 는 무의식의 주체와 타대상의 사이의 결합/ 분리를 의미하는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이 구조는 어떤 형식적인 모체로, 분석의 두 파트너를 각각 두 자리에 번갈아 지정함으로써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모체로 가정한다. 따라서 분석수행자가 “선생님을 먹고 싶다”고 말할 때, 이런 상황에서 욕망의 타대상인 젓가슴은 분석가로 표상이 되고, 국소향락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게 된다. 위에서 나지오는 환상은 주체와 대상을 동일시라고 말했다. 분석가가 타대상으로 기능을 하면, 무의식적 주체가 이 분석가를 ‘젖가슴/타대상’으로 동일시 하는 과정속에서 무의식적 환상을 생성하게 된다. 다시말해, ‘선생님을 먹고 싶다’는 환상은 구강충동(젖가슴)과 관련된 타대상이 작용하여 만들었다는 것이다.

 

거꾸로 분석수행자가 분석가에 의해 잡아먹히는 대상의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다고 라깡은 보았다. 라깡이 투영평면이나 크로스캡이라 불리는 위상수학의 표면을 사용하여 환상과 관련된 용어들의 논리적 결합을 특히 위상수합의 틀 안에서 만들어 냈다.

나지오는 위상수학적 물체는 무의식적 주체($)와 대상(a)이라는 두 용어가 분리의 직분을 수행하는 시니피앙의 중개를 통해 어떻게 결합되고 분리되는지 놀라울 정도로 보여주고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일상에서 환상을 말해주는 구체적인 문장의 형태로 특히,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를 위해서 그 시니피앙을 알아 볼 수 있다고 보았다.

 

※ 위상수학은 무엇일까? (출처: Readlight bolg)

라깡의 위상학의 도입에 대해 Readlight블로그의 글을 인용한다. ‘라깡은 1960년대 초보적인 수준에서 수학적 도형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도형들은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의식과 무의식에 동시에 존재하는 실재의 모호함을 표현해 줄 적절한 은유로 사용하였다.’

위상수학은 흔히 ‘머그컵과 도넛은 하나다’ 라는 명제와 뫼비우스띠로 설명된다. 뫼비우스띠는 위상수학적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뿐인 2차원 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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