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cartel

질투의 뿌리

untold 2023. 5. 25. 23:21

타자의 주이상스

  그녀가 정신분석가에게 찾아갔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질투 망상이였다. 그것이 어떻게 촉발했는지 그 기원을 찾아서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정신분석가를 찾아오기전 그녀가 매달렸던 환상은 파트너의 욕망의 대상이 다른 여자이고, 그 욕망은 무의식적 욕망이기에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아무리 파트너가 아니라고 말을 해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고, 그녀는 철저히 속아왔다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이러한 망상이 망상이 아니라 진실이라면' 자신은 정상일 것이므로, 그녀는  진실을 파헤쳐 자신이 정상인지 망상병 환자인지 알기 위해 모든 노력을 쏟았다. 그녀는 할 수 있다면 탐정이라도 고용해서 그의 모든 뒤를 밟아서 자신이 옳았음을 증명하기만 한다면 만족할 것 같다. 더 이상 그가 바람을 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진실만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녀의 일상은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하고, 머리 속에는 ‘진실게임’만 플레이 될 뿐이였다. 정작 의심의 원인인 질투는 그녀는 덮었다. 그것은 질투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수치심이기 때문인 듯 싶다. 

이러한 사고의 반복이 영원히 계속 될 것 같아 두려워진 그녀는 분석가를 찾았고, 이런 이유로 그를 방문했다고는 말하지 않은 채 1년이 흘러갔다. 그녀가 질투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녀는 과거의 애인의 여자친구를 질투한 것일까? 아니면 그를 질투한 것 일까?

그녀가 질투했던 것은 ‘타자의 주이상스’이다. 그녀에게는 없는 주이상스를 타자가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지 않은가.

 그녀는 눈 앞에 파트너를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가 주이상스를 즐기는 꼴을 못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그녀의 파트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라깡이 말하는 상상계적 관계, 즉 거울관계처럼 대상과 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밀착된 관계는 아이와 어머니와 관계 같이 끈적이고,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이다. 의식적으로는 물론 타자는 타자이지만, 무의식적으로는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러다 혹여 그 타자의 욕망을 보게 되면 상대방을 공격하게 된다. 타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러한 관계는 결국 파국을 낳는다. 다시 말해 거울속의 자신은 소외된 '자기'와 '타자'를 동일시하는 실책 속에서 타자의 욕망이라는 이질성은 주체를 미치게 만든다. 그러므로 질투의 대상은 '타자의 욕망'이다. 

나는 나를 질투한다.

한편, 질투는 왜 공격적인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실재가 아니다. 그러나 그 거울속의 ‘나’를 나라고 믿어야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한 자아를 구성하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대타자의 보증이고,  그에 대한 댓가는 근원적 소외이다.

거울 속의 나는 내(실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존재를 규정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실재의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질투하며, 공격한다. 이 거울 같은 존재가 바로  '동기간'에도 적용된다. 그 형제와 같은 동기간은 나의 주이상스를, 나의 팔루스를 호시탐탐 노릴 것이라는 불안감에서 우리는 다른 나와 비슷한 여건의 타자를 만나면 발동한다. 우리는 우리의 처지와 조건이 아주 멀리 떨어진 대상은 질투하지 않는 특성을 보인다. 그것은 우리의 근원적 불안감이 회귀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재는 소외되어 있고, 거울속의 '자기'=이상적 자기자신=소타자/우리의 파트너가 우리와 한덩어리가 아님을 발견할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을 공격하게 된다. 그 상대방은 실제의 파트너라기 보다 자신의 동일시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라깡이 소개하는 거울단계는 다음과 같다. 

침팬지는 거울을 보고 별 흥미가 없어하는데 비해, 아기들은 자신의 모습에 환호한다. 그러나, 이 덩어리가 자신임을 증명해줄 대타자 어머니가 필요하다. 어머니는 아기를 ‘이게 너’라고 말을 함으로써 비로소 ‘자아’라는 허상이 구성된다. 덩어리에 언어가 도입되면서 '자아'가 생긴다. 아기는 엄마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증받는다. 그러므로 존재는 타자에 의해 외부의 장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를 자기자신으로 간주하는 오인속으로 들어간다. 따라서 원초적 불화에 해당한다. (외부의 이미지를 자기자신으로 간주함으로써 소외됨으로 이것은 원초적 불화와 소외로 인한 질투, 공격성의 근원이 된다는 것이다.)  언어가 도입되기 이전의 영아는 자신의 몸을 파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자아와 타자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거울단계를 거치면서 '자기'라는 의식이 생성되지만, 이는 거울을 통한 자기이미지에 불과하므로 실재와는 불일치 한다. 이러한 불일치는 실재의 귀환으로서 공격성을 불러일으킨다. 

 

왜 내 주변을 공격하십니까?

질투는 극복되기 힘든 삶의 한 축이다. 상실에 대한 두려움과 질시가 엉켜 언제든 우리를 고통에 빠트리고, 질투 감정에 대한 수치심은 무의식적으로는 타인의 비참함에 안도감을 가지면서도, 겉으로는 위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내담자의 분석경험 속에서 분석가의 입에서 ‘공격’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그녀의 증상은 폭발했다. 

‘나는 결코 자해할 뿐 그 어느 누구도 공격하지 않았다’고 여겼으나 공격이라는 말을 듣고 그녀는 충격을 받았다. 모든 관계에서 질투는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은폐되었던 것은 타인에 대한 질투를 잘 포장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편한 사람에게만 그것이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측면으로 보면 자해 역시 타자를 공격하기 위함이다. 상상계적 타자건 상징계적 대타자건 말이다. 따라서 타자를 나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타자와 나 사이는 교집합이 존재할 뿐 각자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질투는 극복 가능한가? 우리의 질투의 뿌리가 근원적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그 두려움을 직면한다면 우리의 욕망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도구로 그 감정은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욕망을 지킨다는 것은 욕망의 대상을 빼앗길까봐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의 대한 무심한 관심과 습관적 생각의 사슬은 과감히 녹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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