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일이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헬러윈이 언제 인지도 모르고, 이태원에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몰리는지도 몰랐다. 검은 머리들이 꽉찬 그 현장의 숨막힘이 전해져, 나도 모르게 숨을 쉬지 않으며 몇 개의 영상을 보았다. 이제 막 20대에 들어선 젊은이들, 나의 자녀와 친구의 자녀들의 나이다. 아들의 친구의 친구가 죽거나 중상이라고 한다. 이 참담함을 아들은 견딜 길이 없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였다. 분노를 터트린다. 무능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정부의 모습에 나 역시 화가 치민다. 엎어버리고 싶다. 아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줘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그러다가,,, 애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세월호 때에는 가지 않았던 분향소를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에게도 조용히 애도를 하고 오라고 일렀다. 이 애도는 그들을 떠나 보내는 애도가 아니라 ‘다시는 이렇게 허무하게 잃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애도이다.
많은 이들이 쇼크로 한동안, 말을 잃을 것이고 깊은 우물에 가라앉을 것이다. 몇몇은 평생을 트라우마로 고통받을 것이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공무원 세계에서는 ‘의전’이 중요하다. 그러한 형식주의에 대해 나도 많은 반발이 있었지만, 의전이라는 것이 어떤 질서, 기강과도 연결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정부의 ‘의전실력’이 조직의 누수를 단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생각보다 빨리 이런 사고가 터져 깨진유리창이 어떻게 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사회가 크레바스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불안감이 만연하게 되는 일련의 사고들은 ‘각자도생’을 삶의 지침으로 여기고, 타자에 대한 구분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멜랑꼴리의 검은 우물
멜랑꼴리는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맹정현 선생님이 쓴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을 참조했다]
멜랑꼴리는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일어나는 작용이다. 흔히 우리는 누군가 죽음. 또는 실연을 통해 욕망의 대상 즉 리비도의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우울감 속으로 추락하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상실에 관하여 애도의 과정을 거치게 되지만 정신병적 멜랑꼴리는 나르시시즘으로 퇴행하게 된다. 리비도의 흐름은 대상에서 자아로 옮겨가게 되며, 그렇게 자아로 향한 리비도는 무거워진 존재감에 짓눌리게 되는 것이다. 맹정현은 그것을 ‘신체의 이물감’으로 비롯된 역겨움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현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껍데기 뿐인데, 나의 신체에 흐르는 감각들은 이물감으로 인해 절단해야할 그 무엇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속에서 자존감은 추락하게 되어 자기비난과 파괴로 이어 질 수 있다. 자존감의 추락은 세계에서 자신을 도려냄으로 해서 고통을 중지 시킬 수 있다고 믿게된다. 일반적인 자살이 타자와의 관계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정신병적 멜랑꼴리는 환상이 사라진 핍집성, 피부를 걷어낸 자기살을 봐야하는 고통으로 짓눌리게 된다. 우울증은 그런 의미에서 환상을 잃어버린 세계의 공허 속에서 존재감에 침식당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맹정현저자는 신경증자의 우울증과 정신증적인 우울증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신경증자의 자살은 일종의 메시지다. 그러나 정신증적인 우울로 인한 자살은 공백에 투신이다.
환상에 대한 애도
환상은 우리의 남루한 삶을 죽음으로부터 연기하곤 하지만, 또한 소멸하고 싶다는 환상을 만든다.
환상은 대상을 상정하고 있으며, 대상은 전이관계 속에서 동일시를 통해 환상을 양산하게 된다. 그러한 환상이 지속되면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 망상이 되고, 환상에서 벗어서 주체의 핍진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면 한없이 남루한 현실은 마치 욕망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울증으로 곤두박질 치게 된다. 대상을 상실하였을 때 적절한 애도과정을 통해 다시금 새로운 환상을 만든다면 주체는 리비도는 복원될 것이지만, 대상을 잃어버리고, 욕망이 감소된 상태는 리비도는 자아에게 투자된다.
애도로서 상실감이 극복될 수 있지만, 멜랑꼴리의 경우는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반면에 멜랑꼴리의 특징은 심각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낙심,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모든 행동의 억제, 그리고 자신을 비난하고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을 정도로 자기비하감을 느끼면서 급기야는 누가 처벌해 주었으면 하는 징벌에 대한 망상적 기대를 갖는 것 등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멜랑꼴리의 상황은 우리가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특징들이 다 애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느정도 이해가능한 상황이다. 그런데; 그 한가지 예외란 바로 애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자존감의 추락이다.” < 에도와 멜랑꼴리 > 244-245쪽
철회된 리비도의 처리
대상에게 낙심을 하여 대상을 사랑하고 세계에 관심을 표하는데 제한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멜랑꼴리의 자아는 분열되어 있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이중적 잣대 없이 ‘쓰레기’라고 언표화 했을 때 그 자신을 잔여, 불순물로 간주한다. 언어의 이면이 없는 것이 멜랑꼴리의 특징이라고 한다.
사랑은 대상에게 리비도를 투자하면서 일어나지만, 대상을 상실한 리비도는 길을 잃고 자아에 복귀되면 멜랑꼴리, 슬픈노동이라고 불리는 애도를 겪지 않으면 그대로 고여있게 되어 주체를 짓누르게 될 것이다.
애도는 결국 대상으로부터 리비도를 떼어내는 일이다. “죽은 대상을 다시 죽이는 일이며 당연히 고통스러운 일” 일 수 밖에 없다. 애도는 옛 대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새로운 대상에게 리비도를 투자해야 하는 현실적 요구를 ‘기억’을 통해서 타협한다.
그리고 울어야 한다.
그렇다면 애도없이 상실감을 처리할 요량으로 리비도의 이동이 일어나면 어떤일이 일어날까. 대상의 상실없이 또 다른 대상으로 봉합한다는 것은 상처위에 또 다른 상처를 얹어 놓는 것과 다름이 없으면 그것은 언제가 상처뿐만 아니라 상처 주변까지 썩게 만들 수 있다. 그러한 부패로 인한 갑작스러운 붕괴는 멜랑꼴리를 가속화하게 된다.
“멜랑꼴리에서는 애도와는 달리 무엇을 상실했는지가 분명치 않음을 의미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애도는 대상을 상실을 전제로 한 감정이다. 즉 애도에는 대상이 분명하지만, 멜랑꼴리는 슬픈데,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
무의식적인 상실은 어떤 내적인 작업을 통하여 자기를 비난하고 자기를 처벌하는 망상으로 귀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완만하게 서서히 자신을 집어삼킨다. 아주 조용하게 나르시시즘의 퇴행이라고도 부른다.
멜랑꼴리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멜랑꼴리는 주체의 의식적 노력으로 벗어나기는 힘이 든 것 같다. 주체를 지탱해주는 새로운 환상의 가능성의 공간이라는 측면에서는 공백의 장소에서 머물며 무한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0도의 자리이기도 하다. 꼭 정신분석을 받지 않아도 분석담화를 통해서 시적실천을 통해 멜랑꼴리에서 빠져나오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분석담화란 우울증의 담화로도 불 수 있을 것이다. 대상a로서의 주체를 0도로 이끌고 나아가 새로운 기표를 창안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0도가 된 김에 0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
신경증자의 멜랑꼴리는 이런 면에서 주체에게 주어진 사건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사건은 주체의 한계를 넘는 기회의 장이다. 사랑이 이루어지건 이루지지 않건 간에 자아의 문턱을 넘게 해주는 사건적 장이라는 의미이다. 환상이 없어진 드문 상태를 유지하는 힘. 리비도를 거기에 투자해야 한다.(2022.11.4.)
[참고문헌 : 맹정현 『멜랑꼴리의 검은 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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