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lamelle 라멜르. 박편들

원초적 언표

untold 2023. 6. 2. 17:35

새의 등이 날개 속에 유폐되어 있듯

인간의 영혼은 언어속에 유폐되어 있다.

 

-파스칼 키냐르-

 

 

주인기표가 되어 버린 라깡

 

라깡은 주인기표가 되었다. 그가 던진 기표들은 S2를 생산해내고 있다. 지금 우리는 라깡이 던진기표를 가지고 생산한 백선생님의 S1을 가지고 각자가 S2를 생산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라깡은 17년가 매주 1회 세미나를 진행하였으며, 단 한 번도 똑같은 내용의 세미나를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잉여-주이상스란 무엇인가?

 

세미나17을 관통하는 주요개념은 과도함-잉여주이상스이다.

우리안에는 언제나 과도함 즉 잉여주이상스가 내재해 있다. 이것은 과거 라깡이 주이상스를 외부에 있는 것으로 상정한 것과 다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잉여주이상스를 거론하기 전에 라깡이 왜 담화구조로 무의식의 위상을 변모 시켰는가에 대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라깡의 고유한 루틴 속에서 몇십년의 세월을 내가 어떻게 압축할 수 있겠는가.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라깡의 방법 : 기표뒤집기

라깡은 정신분석의 이면과 거꾸로된 정신분석은 차이가 있다. 아래 인용문을 보면 기표를 뒤집는 실천은 곧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방편이다. 기표를 털어 고정된 배열을 뒤집으면 실재의 언저리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인가 싶다.

 

기표를 뒤집는 실천은 라까니언 정신분석의 핵심이다. 원래 주이상스의 위치를 진리의 위치이기도 한 그것을 표지하는 S1은 S2로 이행하며 상징계-상상계의 공모 속에서 의미화의 권력을 통해 주체를 지배한다. 주인기표는 상징계의 의미화의 작용에 의해 재배열 되면서 세계의 논리를 강화하며, 이에 따라 존재는 은폐된다. 진리의 가능성이 박탈된다. 따라서 기표를 뒤집는 실천, 기표를 거꾸로 실행시키는 실천은 상징계의 의미화하는 권력으로부터 다시금 존재를 드러내는 효과를 가져온다. 여기서 기표를 뒤집는다는 말은 대타자의 권력에 의해 배열된 기표연쇄의 질서를 전복시킨다는 뜻이다. (6)

 

 

원초적 언표 : 원초적 장소의 특수한 지식 S1,S2,$,a

 

라깡은 원초적 언표가 중요하고 언표와 언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발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우리는 말을 통해 소통하고 의미를 전달하고 그것 때문에 감정의 혼란을 겪고 인생을 통째로 대타자에게 저당잡힌다.

 

세미나17에 와서는 주이상스는 잉여-주이상스의 형태로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되어있다 - 무의식은 간극이다 - 무의식은 담화의 구조이다라는 명제로 라깡의 무의식에 대한 규정이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무의식적 담화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정신분석의 임상이라고 보았을 때 분석가는 4개의 담화구조를 염두해 두고 내담자의 말을 아니, 담화구조를 파악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무의식의 담화구조은 원초적 기표 S1, S2, $, a 의 배열구조이다. 이 네가지의 기표배열에 따라 4가지 담화가 구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 임상에서는 내용, 의미가 아닌 ‘구조’를 드러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그럼 이 구조내에서 생산되는 잉여주이상스의 유형을 밝혀내는 것이 임상에서 실천하는 일인가? 잠시 혼란스럽다.

잉여주이상스는 상징계내에서 생산되는 어쩌면 가짜 주이상스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이상스의 흔적을 간직을 간직한 대상a, 곧 잉여주이상스는 뒤에 거론되겠지만 ‘지식은 대타자의 주이상스’라는 명제와 무관하지 않다.

대타자의 장에 개입된 S1(주인)은 S2로 하여금 지식(노동)을 산출하게끔 만든다. 그 과정에서 소외된 주체가 발생한다. 소외된 주체는 주체는 주이상스를 상실한 주체이며, 상실한 주이상스를 보상받기 위한 보상체계가 만들어진다. 그 과정에서 대상a, 즉 잉여주이상스가 발생하게 된다.

나는 그것을 욕망의 구조라고 생각하니, 너무나 어려웠다. 욕망이 어떻게 구조를 갖는가?

그럼 그 욕망의 구조를 담화의 구조로 보아야 하는가?

 

S1과 마주한 대타자의 장은 S2로 가득차 있으며, 대타자의 장은 지식, 이미 존재하는 지식의 장, 시스템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기전부터 언어가 존재하였으며, 사물의 살해자로서의 언어의 세계는 실재를 거세한 세계, 사물로부터 분리된 세계이다. 이 언어적 세계가 허상임은 사물이 아닌 것을 지칭하는 모든 개념이 있다는 사실만 봐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가 나에게는 ‘만화’의 위상을 갖는 것보다 이 모든 것들이 언어적 인간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공백은 생각보다 밀접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S1은 S2가 없이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를 표지할 그 무엇이 없다면 실재 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S1은 주인을 표지하고, 사물을 살해하고 추상적 공간을 펼칠뿐 실재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인기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물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사물을 의미의 세계로 데려가 산물로 만들어 끝없는 욕망의 불쏘시개로 만든다.

욕망의 환유라는 덫을 어떻게 흔들것인가?

저자는 ‘왜상’의 자리로 우리의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한다. 주인기표는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면, 개입자로서 주인기표를 거꾸로 위치시킬 때 존재의 드러남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주체의 장소로서 S1이 순수한 변화가능성을 표지하게되면 S2의 판도가 바뀌게 된다.

 

세계는 언어의 특수한 기능과 권력에 의해 상징화 되어있으며, 극도로 추상적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 S1 단항기표는 개입은 곧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주체는 S1의 거세로 주이상스를 박탈당하게되고, 상실한 주이상스의 흔적은 S2의 세계에서 대상a로 회귀한다. 그리고 반복된다.

대타자의 장에서 이러한 회귀는 ‘대타자의 지식’이 된다.

대상a가 잉여주이이상스라는 것은 주이상스의 기억, 보상으로서의 주이상스, 주이상스의 상실의 흔적으로서 무의식의 지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의식의 지식은 대타자의 주이상스라고 보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주이상스의 보상을 위해 노동하는 무의식의 지식이 대타자의 지식으로서의 주이상스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다.

충동의 만족을 위해 노동하듯이 잉여향유 역시 가짜 만족감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다.

잉여주이상스마저 없을 때에는 주체는 노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잉여주이상스가 필요한 것일까?

 

이제 제법 한가해졌다. 한강을 따라 퇴근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나를 가득 채웠던 타자들의 소음이 차츰 낮아지고, 얼굴에 핀 열꽃들도 사그라졌다.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공허감이 밀려온다.

 

(202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