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과 향락
무의식이 시니피앙의 연쇄라면 이 연쇄 안에는 향락의 요소가 빠져있다고 나지오는 말한다.
“무의식에서 향락은 시니피앙적 표상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구멍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구멍은 “환상들과 증상에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다. 시니피앙의 연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전제로 했을 때, 향락은 빠져있다고 나지오는 말하는 것이다. 향락이 시니피아의 연쇄가 될 수 없고,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구조 내 구멍으로 향락은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향락은 어떻게 표상되는가? 향락 그 자체는 표상될 수 없으며, 향락은 구멍을 덮고 있는 환상, 증상의 베일들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으로 향락이 어떤 자리를 차지 하고 있음을 가정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나지오는 “무의식에서 향락의 자리는 그 주요 형태들인 국소적 형태(잉여향락과 남근적 향락) 또는 전체적 형태(대타자의 향락) 중에 어떤 것으로 보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향락의 자리는 구조 속에 구멍이고, 그것을 상징화할 수는 없지만 잉여향락, 남근적 향락, 대타자의 향락 중 우리가 어떤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자리를 알아 볼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향락은 시니피앙의 연쇄가 아니라고 나지오는 말하였다. 환상, 증상으로서 그 자리에 구멍이 나있음을 알게 되는 방식으로 향락이 어떤 자리는 차지하고는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향락의 자리는 국소적인 형태와 전체적인 형태가 있다고 나지오는 본 것이다. 먼저 국소적으로는 신체의 가두리, 즉 가장자리에서 남근적 향락, 잉여향락이 발생하고, 대타자의 향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무한한 향락으로 주체에게 ‘혼동된 방식’으로 식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먼저 나지오가 말하는 남근적 향락은 부분 충동과 닮아있다. 그리고 대타자의 향락이 무한하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주이상스’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은 우리가 극히 소량의 만족으로 만족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의 행복이란 그러한 소량의 만족 일 뿐이다. 반면 나지오가 말하는 대타자의 향락은 이러한 한계를 넘는 충족감으로 간주된다. 인간의 지고의 선의 추구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실상 이것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매우 줄어든 만족’이라는 구체적 현실일 뿐 절대적인 행복이 아니라는 정신분석의 대답은 “우리는 무한한 향락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나지오는 임상영역의 예시를 들어 설명한다.
나지오는 ‘신경증 환자는 절대적 향락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릴 것이라고 말한다. 신경증 환자는 최대한의 향락, 즉 대타자의 향락을 피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만 향락한다. 그것은 증상(남근적 향락)과 환상(잉여향락)이 그것이다. 증상과 환상은 “사실상 측량할 수 없는 향락에 맞서고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신경증 환자가 사용하는 것”이며, 히스테리 환자는 이에 부합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현실’을 만드는 사람으로 향락을 환상으로 은폐한다. 히스테리자의 욕망이 언제나 충족되지 못하는 것은 향락, 주이상스에 대한 방어라는 것이다. 나지오는 라깡이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격언은 최상의 향락을 포기하지 말라는 선언이며 그러한 향락으로 가는 길에 대한 욕망을 포기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컨대, 욕망함에도 불구하고 대타자의 향락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고 증상과 환상이란 대리물과 차폐물로 만족하는 것이다.
대타자의 향락. 나지오는 대타자의 향락을 우리가 정신분석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으로 간주된 주이상스를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는 이 향락을 방어하기 위해 증상과 환상을 이용하고 있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히스테리 신경증자라는 것이다.
나지오는 “왜 우리는 대타자의 향락을 피하고 싶은가?"에 대한 대답으로 나지오는 신경증 환자에게는 모순된 방식으로 이 쾌락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 것은 대타자의 향락이 실현된다면 존재가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존재의 소멸에 이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주체의 쾌락원칙을 초과하여 출몰하는 주이상스는 주체를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 죽음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신경증자는 주이상스를 욕망하는 대신에 증상과 환상으로 방어하면서 주체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듯하다.
말이 실패하는 그곳에서 향락이 출현한다.
나지오는 우리는 말하는 존재 일뿐만 아니라, 언어가 거주하는 존재이며, 언어가 추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시니피앙이 주체보다 먼저라는 것이다. 나지오는 말하는 존재인 우리가 ‘시니피앙’이 추월하여 나도 모르게 내뱉어진 ‘현행진술’의 형태를 취할 때, 보충적인 것이 하나 첨가되는 데 그것은 바로 ‘신체가 영향받는 것’이다. 그 신체는 ‘향락으로서의 신체’이며 ‘유기체적인 신체는 향락의 울림을 담아내는 공명상자’라고 비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체를 실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언어에 의해 종속되어 있다.
나지오는 “신체가 향락한다는 것은 고통이나, 쾌락을 넘어 ‘무의식이 발현되는 순간에 에너지의 이중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 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에너지가 방출되고,(남근적 향락) 또 한편으로는 동시에 내부의 정신적인 긴장이 재활성화 된다.(잉여향락)
말실수, 재담 등과 같은 언어가 우리를 초과하는 무의식적인 순간을 에너지의 방출과 긴장의 재활성화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농담은 쾌락을 가져다준다. 팔루스의 방향을 비틀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정신이 긴장한다는 것은 일종의 에너지가 사용되는 것이고, 정신의 활성화 자체가 쾌락일 것이다.
욕망은 어째서 충족되지 못하는가?
나지오는 욕망이 실패하는 그곳에서 긍정적인 창조성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욕구가 요구로 변환되었을 때 욕망이 잔여로 남듯이, 인간의 욕구는 요구와 일치할 수 없으므로 욕망은 언제나 완전한 충족에 이를 수 없다. 나지오는 우리의 가장 순수한 행위들도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행위가 언어로 표현되는 이상, 또 다른 말의 출현을 결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단 그 말이 발설되고 그 행위가 행해지면 충족으로 가는 길은 다시 새로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욕망의 노선이 정확히 분석의 여정을 만들어 내는데, 분석경험이 일어나, 한점으로 새겨지면 이 지점으로부터 새로운 구간이 열리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지오는 칸토르의 한계로의 이행에 빗대어 다시 설명한다. ‘문턱에 도달하고 나면 그 즉시 무한수열이 열린다. ’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잉여향유의 무한한 환유로도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것은 일상적 차원에서도 끊임없는 욕망의 환유 속에서 소소한 만족감으로 스스로를 자위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죽어야 끝난다. 그러나 실제적인 죽음이 아니라, 두 번째 죽음 즉 상징적 죽음은 새로운 탄생의 분기점이 될 수 있다. 나지오는 이런 측면에서 욕망의 한계에 부딪힐 때 우리는 다른 욕망의 대상을 찾게 되는 동인으로서 긍정적 창조성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쾌락과 향락은 등가적인 것인가? 다른 세계인가?
나지오는 쾌락과 향락이 정신적 에너지 표현의 서로 다른 두 형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그것은 물리학에서의 에너지의 정의를 설명하는 어려움과 비슷하다. 에너지를 설명하려면 여러가지 맥락 속에 위치시켜야지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지오는 쾌락과 향락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한다. 쾌락은 의식, 뚜렷한 느낌, 긴장의 완화를 고려하고, 향락은 보다 무의식적이고 긴장의 증가와 일치하며 뚜렷한 느낌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라고 신체적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쾌락은 의식적, 전의식적인 것에 속하고 향락은 무의식적인 것에 속한다.
쾌락이 긴장의 감소라면 이것은 기분 좋은 감각이다. 그리고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원칙에 속한다. 그러나 향락은 긴장의 극적인 증가와 관련되고, 주체가 ‘신체와 정신을 동원해서 최고의 시련을 통과할 때 간접적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향락은 고통과 가깝다. 향락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려는 긴장과 고통의 순간을 경험할 때 두드러진다. 이는 “타대상의 전형”이라고 나지오는 말한다. 주체가 느끼는 향락이 아닌 대타자가 느끼는 향락이므로 우리는 향락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지오는 향락은 그 정점에서 즉각 느껴지지 않고 다만 사후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겨우 사고를 모면할 정도의 해리상태를 예시로 든다. 죽음충동으로 살인적인 긴장상태에서 자기 파괴적인 충동을 경험 할 때 자신의 행동을 몰아가는 어떤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럼 향락에서는 신체가 모든 것을 인수하는가?
나지오는 선명하게 이렇게 말한다. “향락은 말과 생각을 무시하고 다만 행동으로 말할 뿐”이라고.
이렇게 말하면 주체는 향락에 있어 노예상태이다. 이러한 발언은 마치 무의식의 주체가 있다는 낭만주의로빠지기 쉬울 듯한데, 나지오는 이에 대해 다시 반박한다.
“무의식의 주체가 있는 것처럼 향락의 주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의 주체는 항상 시니피앙에 의해 표상되는데 향락은 표상적인 시니피앙이 부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라깡은 주체없는 시니피앙은 존재하지 않고, 또 시니피앙 없이 주체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향락이 존재할 때 누가 향락하는가? 머리없는 기관이라는 표현도 연상된다.
나지오는 “아무도 향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향락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넘어 향락한다는 것이다. 그럼 대타자가 향락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지오는 대타자 역시 향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타자는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향락의 파급효과를 경험할 뿐 향락을 소유할 수 없고, 대타자 역시 향락하지 않는다. 향락이 상징화될 수 없는 실재다. 그럼 향락은 그 자체의 운동일까? 부재하는 구멍으로서 향락은 그저 행위의 원인일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된다. 세미나 7에서 큰사물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향락이 아닐까.
향락을 욕망을 초과한다. 주체 없는 향락, 시니피앙 없는 향락은 즉 공백으로서의 향락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라면, 이 향락은 비윤리적인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지오는 이 향락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인이라고 말한다. 삶을 살아가게 하는 동인으로 향락을 보고 있다. 쾌락은 일시적인 반면 향락은 근본적으로 영구적이며 무시간적이라고 나지오는 말한다. 향락의 시간성이 없다는 말은 반복을 보증하는 생명 사건들의 불가피한 연속을 보증하는 힘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반복강박’과 향락을 동일시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것이 삶의 힘이라는 결론도 함께 내린다.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은 죽음충동에 이끌리는 반복이다.
향락과 성도착의 관계
성도착은 향락에 가깝지만 가장 거짓되게 가깝다. 성도착자는 대타자의 욕망을 부인한다. 대타자의 욕망대신에 거세되지 않은 어머니 팔루스를 물신화하는 구조이다. 나지오는 도착증 환자는 ‘향락의 몸짓’을 모방하는 사람으로 본다.
분석치료에서 향락의 위치
나지오는 분석상황에서 발생하는 향락을 잉여향락이라고 보았다.
이를 다시 에너지 차원에서 내가 보기에는 일상적 차원으로 설명하기 위함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는 “높은 수준의 내적 긴장을 끊임없이 유지시키는 이 잉여가 치료의 원동력이고 분석을 이끌어가는 핵심부로 보았다. 나지오는 분석에서 핵심은 ‘말이 아니라 지배하고 유인하는 향락의 기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향락의 기둥은 젖가슴, 대변, 시선 등 다양한 신체적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분석수행자에 의해 구성된 다양한 환상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우리는 ‘응시’ 등의 부분충동 분석 내부에 도입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분석가 담화에서 분석가의 위치는 대상a로 일컬어 진다. 이 대상a는 나지오가 말하는 잉여향락으로 분석가 동일시 되었을때, 분석가가 가장 적절히 행동하기에 유리한 위치로 보았다.
왜 나지오는 에너지를 끌어들였는가?
나지오는 라깡의 향락 개념이 프로이트의 메타심리학을 풍요롭게 혁신한 것이라고 보고, 프로이트의 역동학과 정신에너지에 대한 삼분할(방출된 에너지, 보존된 에너지, 불가능한 이상적 목표)을 존중하면서도 라깡은 마치 향락이란 단어 덕분에 정신작용에 대한 기계적인 설명과 경제학적 설명으로부터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나지오가 찾아낸 연결점은 이를 설명하는데 적절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라깡은 향락이라는 단어로 두 가지 기본개념을 도입하는데, 하나는 ‘남근’이고 또 하나는 ‘불가능한 성적관계’이다. 전자는 에너지의 방출을 여닫는 경계로서 기능하고, 후자는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적인 목표의 기능을 한다. 하지만 한계로서 남근이건 절대 신기루로서의 불가능한 성적 관계건, 라깡은 향락이란 단어로 중대한 문제를 하나 해결한다. 그것은 에너지 개념으로 해결하지 못한 문제인데, 에너지가 억압에 의해 봉쇄될 때는 무의식적 긴장에서 오는 불쾌를 경험하고, 또한 이 동일한 에너지가 방출될 때는 무의식적 상대적 소강상태를 경험하는 주체의 속성에 관한 문제이다. 실제로 라깡의 사유논리는 파악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라깡이 주체와 향락을 연결할 때 모순되는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초기에 부분적으로 정신적 에너지를 주체화하기 위해 향락이라는 단어를 도입했다. 이는 프로이트가 ‘이드의 자가-지각’에 대해 말하면 1938년에 직감했던 현상을 잘 보여주기 위한 것이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드의 내부에서 에너지 긴장의 변화는 이드 자체 의해 지각됩니다. 프로이트처럼 욕동의 저장소인 이드가 그 자신의 에너지 변화를 자각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라깡은 무의식이 작업한다고 제안하는데, 작업함으로써, 다시 말해 반복을 보증함으로써 무의식은 향락하게 된다고 보았다. 무의식이 향락한다고 언술하는 것은 우선 무의식을 주체화하는 것이고, 인격화하는 것이며 무의식을 한 주체로 가정하고 알가주의 여러모습 중 하나로 설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장 라깡은 주체성에 대한 모든 참조를 철회하고 도리어 무의식이 향락한다고 향락하는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요컨데 라깡은 향락이란 단어로 주체를 도입하는데, 이건 주체를 더 잘 끌어내리기 위해서지요.
후기 라깡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주체라는 가정을 후기에서는 스스로 무너트린 들어보긴 했다. 증상을 주체로 가정했던 것에서 이후 라깡에게 주체란 무엇이였을까?
알랭바디우는 주체는 진리의 절차를 수행하는 과정속에서 효과라고 보았다. 주체라는 환상은 우리가 인식하고 의식하는 ‘자아’일 뿐이다. 인간은 단지 주이상스와 우발적이고 가혹한 ‘각인’(S1)에 불과할 뿐인가?
향락은 무의식 안에 있고, 우리의 동인, 욕망의 원인이 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 볼 수 없다. 그저 증상으로서 향락의 자리가 있음을 알아볼 뿐이다. 향락은 언어의 거세 속에서 생겨난 또 하나의 환상 아닌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그 주이상스’는 언제나 회귀한다. 그러므로 향락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둘러싼 시니피앙의 연쇄가 미친 반복으로 이끌고 있다면, 이를 멈출 방법은 없는가?
정신분석은 욕망의 구조의 변화, 증상을 이용할 것을 제안한다. 욕망의 구조가 바뀌는 것은 거의 불가하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새로운 욕망을 발명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의 새로운 욕망은 무엇일까. 글쓰기일까.
무의식의 주체는 어쩌면 타자이다. 실재의 언저리에 가지 않으면 우리는 타자성에 잡아먹히고 마는 상상계적 세상에서 산다. 증상과 함께 말이다. 우리 안의 타자성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법을 욕망하는 것. 그것은 낡은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욕망이 아닌가.
그리고 나지오는 욕망의 실패 속에서 긍정적 창조성이 발휘된다고 보았다. 언제나 욕망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향락은 욕망과 간극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패 속에서 또 다른 것이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을 욕망하게 된다. 소량의 만족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욕망의 한계에 부딪히는 실패가 낫다. 실패 속에서 새로운 곳으로 나는 조금씩 옮겨가지 않았는가.(202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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