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은 1957년 발표되고 작성되었다. 이 당시 정신분석 학회들이 단행한 두 차례에 걸친 라깡 제명이 발생했던 시기에 위치한다. 이 시기 라깡은 정신분석 실천과 제도적인 장에서 가장 명백한 단절의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단절’이라는 기표는 이 글에서 중요하다. 라깡은 정신분석이론을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뽑아낸 기호론의 단절을 통해 새로운 라깡적 언어학을 주창’했다는 점이 반복에서 제시된다.
문자의 심급에서 정신분석의 이론화를 꾀한다. 저자들이 인용한 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문자의 심급은 대학인들에게 제시되었다. 문학은 ‘문자에 대한 라깡의 이론화’에 적합한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2. 문자의 심급은 과학적 담론, 어떤 진리에 관한 담론, 진실성에 관한 담론이기 위해 ‘지식의 영역’에서 지탱되는 담론이다.
3. 결과적으로 이 담론의 현장은 문학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 소통되는 학문적인 보편성이 프로이트가 분석가들에게 불가결한 과정으로 간주한 그러한 장소이다. 이 장소로부터 정신분석에 대한 진정한 정체성을 생산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요 목표는 과학과 보편성의 요구에 부응하는 하나의 담론이다. 다시 말해, 그동안 정신분석에 대한 이론화에 대한 응답으로 이 글이 작성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이 글 또한 이론적인 글이 될 것이며, 학문적 주해가 뒤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 문자의 이론을 정신분석자체에 연결하는 것 > 소쉬르와 프로이트의 연결이다
저자들은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 또는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제목의 중복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프로이트 이후라는 것은 프로이트 이후 단절되었다는 의미이다. 이 텍스트는 무의식이 겨냥하는 어떤 것, 무의식 속을 지배하는 문자를 고려하는 것이, 의미작용과 로고스로 알려진 이성의 정의를 건드린다.
<문자의 과학 – 주체의 문자화>
저자들은 문자가 주체를 함축하는 것은, 언어가 주체보다 선행하는 구조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주체가 문자화된다는 것은 주체가 화자로서 언어의 구조로부터 ‘자기담론의 물질적 매체’를 차용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담론이란 언어와 말이이며, 물질적 매체란 시니피앙의 물질성이다. 그런데, 이 물질적 매체의 위치는 어디인가? 소쉬르의 언어학은 “객관화된 현실에 있는 한 장소와 그것의 분할 불가능한 특징’이라면 (물질적 매체의) 위치화는 자기자리의 결여”이다. 자기자리의 결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질적 매체(문자)라도 실체가 아니라는 의미인가. 문자는 주체를 미리 세계에 등록한다. 이 점에서 주체는 이미 출생하는 순간 명명됨으로 자리가 정해진다. 무의식의 주체는 이 근본적 타율성 속에서 빼내려할 때, 라깡의 헤겔의 변증법에 따르면서도 교묘히 비튼다. 그 결과 인정의 말은 ‘말의 인정’이고, 이것은 대타자를 하나의 기원이 아니라 언어의 기능에 대한 규칙, 즉 상징계처럼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언어는 ‘진리와 거짓’이라는 이중의 기능 속에서 규정될 수 있다. 즉, 언어는 거짓이라 할지라도 주체가 하는 말의 진리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주체의 이론이 언어의 이론을 통해야 한다고 한다면, 문자의 과학은 결국 언어학과 연관된다
“언어학이 이 모든 과학을 흩트리고 재배치하는 한에서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어떤 인류학이나 심리학과 관계없는 주체의 이론을 접목해야 하는 곳은 바로 하나의 ‘지식 혁명’인 언어학의 ‘출현’이다.”
<대수학과 작용>
캉길렘은 바슐라르의 영향을 받아 과학이 점진적인 누적과정이 아닌 단절과 혁신을 통해 발전된다고 보았다. 캉길렘의 인식론적 의미의 대수학은 무엇인가. 캉킬렘은 대수학을 수학적 도구가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새로운 구조로 보았으며, 이것은 물리적 세계와 그 관계들을 기호화하고, 이 기호들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더 높은 추상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기호개념이 언어학을 과학으로 만들었다면, 라깡의 기호표기법, 즉 대수학은 은 일종의 ‘형식화’이며, 은유와 환유의 정식을 서술할 때는 외형적인 계산법이다
소쉬르의 기호론에 라깡은 어떤 수정을 가하는가. 바로 ‘기호를 대수학화’하는 것이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기호를 대수학화 한다면, 기호처럼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면서, 기호를 파괴하는 것이다.
다음은 네 가지 주요한 특징이 라깡의 대수학을 구별해준다.
1. 횡선의 양쪽 편에 등록된 용어들 사이의 어떤 병행성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라캉이 제시한 것처럼 이것을 단지 “시니피에 위에 있는 시니피앙”이라고만 읽어서는 안 되고 “소문자 S위에 '‘대문자 S”라고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2. 소쉬르 기호의 구조적 통일성을 상징하며 절대로 생략되지 않는 타원의 소멸
3. 기호의 두 '면'에 대한 소쉬르의 정식을 대수학의 두 ‘층’에 대한 지시로 바꾼 것
4. 마지막으로 강조점은 S와 s를 분리하는 횡선에 가 있는 것
"이 과학(언어학)의 핵심사상은 이제 의미화에 저항하는 하나의 가로 선에 의해 구분되고, 최초로 분리된 질서로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근본적 위치에 의존한다"(E, 497).
라깡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시니피앙에 고유한 연결들과 시니피에의 발생 속에서 그 연결들의 기능을 확장하는 것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가능한 것이 바로 이것에 있다.”
라깡이 강조하듯이 <의미화에 저항하는 횡선>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연결>에 대한 확장을 연구하게 만든다. 소쉬르에게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구별이 분리불가능성에 기반하여 수정되지만, 라깡은 횡선을 의미의 저항으로 획정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쉬르가 관계(상호성, 혹은 연합) 강조한다면, 라깡은 여기에 ‘저항을 도입’한다. 의미화 생산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쉬르에 가한 수정이 시니피앙의 자율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저항 자체가 일차적인 것이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기호의 단절’이다. 결국 ‘문자의 과학이란 이러한 기호에 도입된 단절’인 것이다.
문자의 과학이 기호의 단절, 의미화의 저항하는 횡선은 실상 새로운 언어학의 창설을 불가능한 과업으로 만든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저자는 “문자의 과학이란 이러한 불가능성, 즉 기호론 없는 언어학이라고 규정하면 어떻게 이것이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지” 묻는다. 답은 “실제로 이것은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이다.
라깡의 ‘텍스트는 꼬이고, 난해한 진행과정에서 증명을 지연시키고, 중단시키는 괄호’가 지천이다. 저자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단절’이며그래서 저자들은 <단절의 정확한 범위>를 주목해보자고 말한다. 그것은 한편 ‘기호에 관한 모든 철학적인 문제, 즉, 자의성의 관한 질문들의 폐쇄와 단죄’이다. 다시 말해, 라깡의 텍스트는 언어의 자의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질문을 멈추자는 의도라는 것이다. 라깡은 ‘언어의 자의성’이 언어의 본성이라면, 이 토론은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의 자의성’ 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자의성의 어떤 위치를 강제하는 언어의 대한 취급“이다.
기호가 자의적이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의 이 필연적 연결을 넘어서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자의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에 언어학은 사로잡혀있다는 것이다. 언어학 혹은 논리실증주의 둘 다 말이다.
라깡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다. 먼저 이 책의 번역이다. "시니피에의 장을 덮는 데서 나타나는 그 불충분 함의 문제가 그것에 대해 제기되면서 존재하는 언어는 없는데 시니피에의 장은 모든 필요에 응답하는 언어로 존재하는 그러한 효과이기 때문이다”(E. 498p)*** 이 번역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수가 없다.***
에크리 한국어 원전 594p를 보면 “이것은 현존 언어 중 시니피에의 장을 포괄하기에는 불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언어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에 이르고 마는데, 그것이 언어로 존재하는 효과 중의 하나는 모든 요구에 응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버전 역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나마 원전을 보면, 언어는 요구의 응답이라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시니피에(요구)의 장을 모두 포괄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요구를 위한 도구로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요구를 100% 담을 수 있는 언어는 없다.
기호의 대수학화
라깡은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를 재현하는 기능에 부응한다는 망상에서 벗어나야” 언어의 본성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보는 듯 하다. 기호에서 모든 재현기능을 빼면 무엇이 남는가? 기호에서 시니피에를 빼면 시니피앙만 남는다. 문자의 과학은 ‘기호의 철학’이 아니다. “모든 재현기능, 의미화 자체를 파괴하는 지점까지 기호를 가공”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바로 라깡이 생각하는 대수학의 역할이자 기능이라고 제시한다. 이러한 과정을 달리말하면, 대수학은 ‘의미를 제거한 기호’, ‘X 표시한 기호’이므로 작동하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는 기호의 효과는 무엇일까.
이것은 기호에서 모든 재현적 기능, 즉 의미화 자체라는 관계를 파괴하는 지점까지 기호를 가공하 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엄밀하게 말해 대수학의 역할이자 기능이다. 대수학은 기호가 아니다. 혹은 다음처럼 말할 수도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대수학이란 그것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호이다. 아마 다음처럼 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파괴된 기호라기보다는 X 표시한 기호이다. 그러므로 작동하지 않는다. 기호론의 다음과 같은 개념들의 어떠한 것도 사라지지는 않는다. 시니피앙, 시니피에. 의미화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들의 체계는 뒤흔들리고 변질되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기호체계의 변질은 곧 시니피앙의 수정이다. 더 이상 시니피앙을 기호로서 취급할 수 없으며, 의미가 없는 시피니앙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검토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라깡의 문자의 과학은 기호라는 망상에서 벗어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찢고, 의미를 제거하는 알고리듬(절차)인 것이다. 이것은 언어속에서 구성된 주체의 선규정성을 무화시키는 것과 연관지어 본다면 주체는 자신과 달라붙은 이름표를 뗄 수 있다.
저자는 소쉬르와 라깡의 도식의 비교을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라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 속에서 관계하는 시니피앙의 범위를 많이 확대할 필요 없이, 즉 그 보충적인 의미가 그것들을 견고하게 해주 는 것처럼 보이는 두 용어를 단지 나란히 병렬시키는 일종의 명사적인 이 중 배열만으로도 예기치 않은 의미의 갑작스러운 출현에서 발생하는 놀라움을 볼 것이다. 서구인들이 집 밖에서 용변을 보고자 할 때 찾는 자신만 의 공간을 상징하는 이 나란히 배치된 두 문의 이미지 속에 원시적인 공동체 다수가 공유했을 것이고, 사회생활을 화장실의 분리법칙에 종속되게 만드는 이 강제성이 있다”(E . 500P)
번역의 난감함과 원전사이에서 이해력이 떨어지는 자신을 항상 탓하곤 했는데, 이번 글을 읽으면서 번역이 엉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라깡의 의도적인 의미화의 불가능성에 무의식적으로 기댄 게으른 번역이 아닐까.
짧은 소회로 정리하면, 라깡적 언어학의 탄생에 대해 저자들은 ‘문자의 과학’이라고 말하고, 소쉬르의 언어학에 라깡이 가한 수정은 바로 기호론의 해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깡이 시니피에를 아래에 깔고, 시니피앙의 우위를 강조한 것은 문자화 된 주체에 ‘다른 존재로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체의 선등록은 우리의 이름이자, 무의식에서는 대타자의 말의 인정이다. 주체에게 붙은 이름은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필연적이고 강제적인 이름이라는 것을 라깡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저항의 횡선’을 중심으로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라깡은 대수학을 도입했다. 기호의 대수학화는 ‘형식’만 남기는 것이다. 대수학을 도입해야만 기호에서 상징을 뺀 기호, X표시의 기호만 남아, 의미의 공백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니피앙은 형식이고, 형식은 내용보다 중요한 것이 되는 전복이 이루어진다. 이 같은 관점은 더 나아가 진리 그 자체보다 진리추구의 형식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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