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하는 두 왕국”
소쉬르의 부유하는 두 왕국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두 왕국이다.
기호의 형성은 부유하는 두 덩어리의 ‘동시적’ 절단으로 묘사" 한다. 이 동시적 절단은 관습적으로 묶인 기호의 단면이다.
라깡에게 부유하는 두 덩어리는 ‘쉼 없이 미끄러지는 것’이 관건이다. 기표도 흐르고, 기의도 흐른다.
소쉬르는 시니피앙 연쇄에 대한 시니피에 연쇄의 공존을 설정하지만, 라깡은 시니피앙의 ‘독립성과 선재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의미화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의미화를 생산하기 위해서 시니피앙이 시니피에는 그만 미끄러지고 어딘가 정박해야 한다. 이 정박하는 지점이 누빔점이다.
라깡은 에크리에 805쪼과 808쪽 사이의 누빔점의 그래프, 욕망의 그래프를 넣었다.
이 욕망의 그래프에서 누빔점은 시니피앙의 의미작용을 멈추는 기능을 한다. “시니피앙에 의한 분절화에 의해 규정되는 주체와 관련해 욕망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지 제시”하기 위한 그래프이다. 욕망의 그래프는 시니피앙의 연쇄를 통과하는 우리의 원초적욕구는 사후적으로 의미를 생산하고, 주체를 양산한다.
라깡에 의하면 누빔점 자체는 신화적이다. 고유한 의미의 정박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깡은 한 시니피앙에 한 시니피앙에 하나의 의미만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에 누빔점은 신화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시니피앙을 또 하나의 시니피앙에 고정시키는 것이고 이로 인해 “새로운 의미화”가 출현한다고 보았다. 은유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비록 잠정적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끝없는 시니피에의 미끄러짐 속에 의미화가 되지 않는 어려움을 피한다. 시니피앙의 사슬로 의미는 생산되기는 하지만, 담론의 선형성은 변질된다.
소쉬르의 선형성은 “실질적인 항이 없는 차이들의 체계”로서 언어의 원리를 구성하는 것이 선형성이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선형성이 문자들의 물질적인 표기인 “비교되는 항”을 제공한다. 그런데 이 선형성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라깡은 말한다. 소쉬르의 선형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다.
소쉬르 언어학 이론에 이론에 따르면 “언어기호는 선형적”이다. 단어들은 연쇄되고, 이 연쇄 속에서 비교되는 항을 제공하게 된다. 이 선형성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가? 저자는 “약간이라도 선형성을 거부”하자고 말한다. 선형성, 즉 라깡은 소쉬르의 선형성이 실증주의로 본 것 같다. 그리고 기호가 문제시 되는 순간부터 결합을 이해하는 이론을 위해 이 실증주의는 순수한 차이를 변경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실제적인 용어인 기호들을 서로 비교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차이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떄문”에 순수한 차이를 변경한다고 말한다. 소쉬르의 언어 속에 차이는 기호의 형상적인 측면인 기호표현(시니피앙)의 차이를 통해 언어가 가치를 얻는다는 뜻이다.
선형성은 시간상의 방향성을 통해서 정의된다. 시간의 방향성을 통해 정의되어, 마지막에 가서야 그 의미를 완결짓게 된다. 언어 속에서 “대상과 주체를 주체를 문법상으로 구별하는 것은 명제의 항들을 뒤집는 가운데 시간적 전복이 생겨나는 것을 허용한다.” “피에르가 폴을 때린다 대신 폴이 피에르를 때린다”로 바꾸면 시간적 전복이 일어난다.
본질적으로는 ‘담론은 통사론적인 수평성이 아니라 계열적이고 체계적인 깊이, 의미적이고 어휘적인 상호관계 작용’이다. ‘선형성이 문제를 일으킬수록 수직성은 분명’해지는데, 그것은 ‘하나의 은유’가 된다.
저자는 결국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맒한다. 선형성과 연관되고 의미작용을 보장하려 누빔점과 구두점을 찍기를 강요한다. 그런데 이 어려움은 이제 언어의 시적 목적을 허용하고 창설한다는 것이다.
“결국 시니피앙 단위들 각각에 대한 ‘구두점찍기’에 의존하여 그리고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구두점에 수직으로 매달린 그러한 문맥으로부터 연결되는 모든 것을 지탱하지 않는 시니피앙의 사슬은 절대로 없다.”
시니피에의 미끄러짐을 정박하는 것은 구두점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의미화, 새로운 기표사슬을 만드는 것 밖에 없다. 선형적인 구두점찍기가 아니라 수직적인 구두점찍기는 새로운 은유의 탄생의 가능성이다. 라깡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선형성을 전복하는 것이 어쩌면 새로운 ‘시’의 탄생의 실천으로 보았다. 특수성과 보편성, 공시성과 통시성의 교차 속에서 ‘머리와 폭풍우의 압축이라는 식별할 수 없는 불꽃’이 다시 말해 은유를 통한 새로운 의미화의 생산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문단에서 횡단을 넘는 것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횡선을 넘는 것이라는 은유로 생각된다. 그리고 ‘의미는 여전히 말해져야 한다’는 것은 의미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미끄러지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라깡은 시니피에의 미끄러짐을 정박하는 누빔점보다, 시니피앙의 새로운 연쇄, 은유의 기능을 강조하여 소쉬르의 언어이론에 변형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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