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두 얼굴

프로이트

정신분석과 과학 (프로이트 패러다임 밑줄 긋기)

untold 2023. 7. 3. 13:50
프로이트가 위대하다면, 
과학이 만들어내는 지식들, 인간을 하나의 대상의 접근하면서 인간에 대해 밝혀낸 지식들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지만, 우리 자신의 주체로서의 삶이라는 수준에서 볼 때 우리의 내면을 바꾸지 못한다. 심지어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지식, 요컨대 객관적 지식들은 프로이트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어기제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적지않다. 

 

인간에 대한 지식. 객관적 지식은 인간의 방어기제. 무엇으로부터의 방어기제 인가.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 속의 분열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과학의 발달에 의해 이뤄진 지식의 확장은 역설적이게도 더 많은 정신적인 나르시시즘을 생산해 낸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나르시시즘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과거에 비해 더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있다. 예컨대 진화심리학자가 학문의 차원에서 아무리 인간을 털 없는 원숭이 정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하더라도, 정작 그 개인의 삶에서까지 그 스스로를 털없는 원숭이로 겪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한 명의 개별자로서 그는 자신은 이성을 가진 존재, 생각하는 주체라고 굳게 믿을 것이며, 스스로가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자신의 주인이라는 믿음을 소위 로고스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일반에 대한 지식 속에서 정작 자신의 삶은 예외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혁명에 대해 꿈꾸는 것보다 주체로서의 자신의 삶의 작은 변화에 대해 꿈꾸는 것이 더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대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공적인 지식들과는 쉽게 타협할 수 있지만, 우리가 우리 삶 속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사적인 이론들, 우리 삶의 내밀한 속살을 이루고 있는 환영들, 믿음들을 포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이 더 많이 쌓여갈 수록 오히려 그러한 포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이며, 그럴수록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존재하는 바 사이의 간극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나'의 환영들을 지키기 위해 나의 반쪽을 희생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소외될 수 밖에 없다. 과학의 발달이 정신적으로 더 많은 증상들을 발생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최초로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적인 이론들의 허상을 폭로하면서 인간의 분열을 우리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우리안에 타자, 우리 안에 있는 버려진 땅인 무의식이라는 영역에 제 목소리를 돌려주고, 우리 안에 있는 우리 반쪽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것이다. 

우리 인간을 털없는 원숭이라고 진화심리학에서 간주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생각하는 원숭이도 아닐 것이며, 말하는 원숭이라고 스스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의 분열에 대해 진화심리학은 눈을 감는다. 더 이상 해명하기를 멈추고, 신체의 물질성이 마음을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려고 한다. 정신분석은 언어라는 물질성, 즉 기표가 우리의 심리적 현실을 낳았다고 본다. 프로이트는 단순히 무의식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과학이 발달할 수 록 인간이 소외되는 것은 우리의 증상이 인간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를 과학적, 객관적 지식의 반열로 대상화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과학이 정신분석을 부인하는 것 역시 증상적 태도의 일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