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이제 반복이란 '증상의 반복'이다.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반복된다. 인생 자체가 증상의 변주된 반복이다. 그것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을 뿐, 그런데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 '어떤 것이 반복'된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 패턴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그리고 찾아낸 패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몰하면서,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대타자'를 찾는다. 증상의 의미를 찾는다고 뭐가 달라질까? 증상의 원인을 찾는다고 해서 뭐가 또 달라질까? 그렇다면 우리는 포악한 증상에 사로잡혀 끝, 죽을 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우리의 고통의 삭제를 위해 증상의 해석을 타자에게 구한다면, 그 해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라깡정신분석에서는 내담자 스스로가 그 증상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윤리'로 본다. 비록 상징계의 기표들을 사용하겠지만, 그 조합은 스스로 해보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증상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변주된다. 주체는 증상을 주체적으로 운용하는 법을 발명하는 것이다. 일종의 승화와 비슷할수도 있겠지만, 억압된 것을 사회적으로 용인된 것으로 해소한다는 것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증상은 억압이 아니라 억압을 이미 뚫고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증상은 곧 주체다. 일반적인 말로는 개성, 고유성이다. 우리가 포괄적인 증상의 이름, 가령 '우울증'같은 것으로 진단내려진 증상의 이름은 별 힘이 없다. 자신의 증상에 새로운 이름붙이기, 그것이 시작이다. 복사 붙여넣기가 아니라, 덮어쓰기. 그것이 증상이 전개되어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