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담화

전이의 역사

untold 2025. 6. 4. 12:08

 

 

전이의 시작 전이와 역전이 파트를 읽으면서, 분석 속에서 전이의 역사가 주마등 같이 지나갔다. 교육분석을 받은 분석가는 이미 강의나 책을 통해서 알고 있던 터라, 전이는 분석이 시작하기도 전에 시작되었다. 유튜브 등 온라인 강의도 활발한 현대에서는 ‘미디어 전이’라는 말도 많이 쓰는 듯 하다. 내담자에게 이미 그는 라캉이 말하는 “안다고 가정된 주체”였다. 라깡은 분석가를 알 것으로 가정된 주체, 대타자의 위치로 상정한다. 브루스 핑크는 분석가한테서 찾기 바라는 지식에 대한 피분석자의 사랑은 거의 종결 때까지 분석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피분석자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어느 순간부터 분석가가 꿈에 등장했다. 보통 분석가는 은폐하여 나타났다고 하는데 그는 은폐하지도 않고 그대로 출현하여 오히려 분석가의 탈을 쓴 다른 인물이지는 않을까 의심을 하기도 했다. 꿈에서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분석가의 모습이 환상이였던 것이다. 내담자는 ‘전이를 전이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저자가 말했듯이, 전이를 의식하지 않고, 분석가에게서 엄마, 아빠, 동생, 남편 등 갖은 인물들의 특성을 찾아내곤 했다. 모든 인물을 연관시켰다는 얘기다. 그가 실제 그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이로 인해 “집중된 투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투사는 강렬한 전이의 신호이기도 했다. 분석가에 대해 생각하면 의식적으로 긍정적이지만, 종종 어떤 역겨움이 올라왔다. 역겨움과 함께 이것이 사랑이 아닌지 분석가에게 말하지 않은 채로 전이에 관한 이론들을 찾아봤던 기억이 난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느 순간 역겨움도, 분석가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 대신 무의식의 논리를 규명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전이는 소멸되었는가? 글쎄 긍정적 전이에서 부정 전이로 나아가진 않았지만, 분석가에 대해서 대타자의 위치에서 대상a의 위치로의 변화는 약간의 충격 속에서 이루어졌다. 분석상황에서 전이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은 인간에 대한 다른 시각을 부여하는 사건이 되었다. 나와 연루되어 있긴 하지만, 완벽한 타자의 감각이라고 할까? 분석의 종말에 되어서는 내가 그동안 분석을 받았던 분석가가 머리가 벗겨진 키가 작은 어떤 남자였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는 분석가의 모습이 환상이였던 것이다. 전이는 왜 저항인가? 정신분석입문 수업의 과제인 논문에서 나온 “저항은 통찰을 방어한다”는 문장을 보면서 어려운 책을 읽자 마자 잠이 쏟아져 지식에 저항하는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전이가 저항이라는 말이 무의식적 통찰을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했던가? 어떤 의미에서 전이는 왜 저항인가? 브루스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이는 저항이 되지 못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외상적인 실재계에 의해 수립된 상징화에 작업에 대한 저항이 전이를 일으켰다. 그것은 피분석자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의 병인적인 핵심이 되면서 그게 분명히 연결되지 않는 어떤 것에 관심을 두는 전환용 술책이다.“ (p.303) 각주에서 저자는 전이는 무의식의 소통을 중단시키는 즉, 무의식을 다시금 폐쇄시키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무의식에게로 권력의 양도를 나타내기는 커녕 그와는 반대로 전이는 무의식의 폐쇄라는 것이다. 상상계적 관계에 매몰되어 분석은 뒷전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이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말이고, 전이사랑이 그 수단인 것이다. 라캉의 ‘성관계는 없다’라는 테제는 이자관계는 성적관계가 불가능함을 뜻한다. 이 성적 관계의 불가능성을 보충하기 위해 사랑이 기능하는 것처럼, 전이사랑은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를 지탱하는 환상의 일부로 기능한다. ‘전이는 저항의 생산물’로써 우리를 상상적 관계에 매몰시키기 때문에 라캉은 전이를 해석하는데는 반대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신분석에서 전이에 대한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엄격히 말해 어떤 것이 무의식이라면 그것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감정이 되어본 일이 없고, 그것이 느껴질 때에만 감정이 될 수 있을 뿐”이기에 전이를 감정으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옳지 않다.(P.274) 브루스 핑크는 전이는 분석가에게 가지는 감정, 정동이 아니라 훨씬 더 복잡한 문제이며, 전이 해석은 악순환이라고 까지 말한다. 전이 자체가 해석되어야 할 무엇이라기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전이가 재현하는 구조이다. 브루스 핑크는 증상이 전반적인 가족구조를 반영하듯이 전이도 동일한 종류의 극히 복잡한 구조를 반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사례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래 끈 침묵, 불편해하면서도 성실한 분석에 임하고, 몇 개의 조각난 꿈들, 빈약한 연상들을 가지고 작업한 한 내담자는 분석 중에 마침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 그녀의 아버지가 성추행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머니에게 말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브루스 핑크는 내담자가 분석에서도 과거의 복잡한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오랜 끈 침묵은 아버지한테 충실함을 보이면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자, 겁이 질린 그녀의 상태를 되풀이하는 방식이며, 아버지의 관심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당황스러운 자신의 승리를 어머니/분석가에게 비밀로 해두는 방식이고, 아버지의 배신과 딸의 공모라는 두 배의 충격을 어머니/분석가한테 나눠주는 방식이며,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것들도 성취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구조를 밝혀낸 것은 브루스 핑크와 내담자의 합작품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는 내담자의 복잡한 상황과 심리를 밝혀내기보다 “사람들은 복잡한 전이를 찾아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정동사냥에 몰두”하는 것에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침묵, 연상의 결여, 꿈의 망각, 지각, 예약 취소 등 치료자의 저항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인은 이것이 이전에 표명된 적이 없으며, 매우 복잡해서 밝혀내기 어려운 초기상황의 반복, 분석가가 하고 있거나, 하고 있지 않은 어떤 것으로부터 발생한다. 초기상황을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애쓰지 않는 분석가의 게으름인 것이다. 이것이 “분석가 자신의 저항 이외는 다른 분석에 대한 다른 저항이 없다”고 라캉이 말했던 의미이다. 전이의 종말 무의식을 폐쇄시키는 전이 저항을 극복하면 실재에 접근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일은 사랑이라는 기표에 무한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일 정신분석이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 자체를 사랑의 자리에 위치시키게 된다.” 이성이던, 동성이던 정신분석가에게 긍정적 전이는 사랑의 감정을 포함하게 되는 것 같다. 그때 내담자는 “자신의 전이를 전이로 경험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는 그것을 바로 지금 여기서 이처럼 특별한 사람에 대한 강렬한 감정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이가 아니라 이건 진짜 사랑인가?? 의아한 순간이 도래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한 내담자에게 분석가는 응할 필요가 없다. 분석가는 내담자의 말에 응답하지 않으면서, 차츰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다. 브루스 핑크는 분석가는 자신이 항상 전이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상상적 차원으로 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담자는 분석가의 달라진 태도를 경험하면서 ‘이것이 전이의 추락을 위한 장치인가? 아니면 진짜 내담자에 대한 역전이로 이렇게 반응하는 것인가?’ 생각한다. 정신분석의 사랑은 곧 상상계적 사랑을 요구하게 되어 있지만, 분석가의 ‘전이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 태도’로 인해 내담자의 실재는 흔들린다. 내담자의 시뮬레이션된 환상은 단절되고, 이제 내담자는 자신의 환상의 회로에 대한 연구로 진입하여 자신의 근본환상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분석가는 안다고 가정된 주체의 위치에서 내려와 내담자의 대상a로 기능하면서 내담자를 자신만의 고유한 지식를 생산하도록 함께 한다. 전이의 종말이 분석의 종말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은 내담자 각자의 고유성과 같이 분석가 각자의 고유함이 작동하는 일이므로, 지식으로 전수불가한 문제이다. 따라서 분석가의 숫자만큼 전이를 다루는 정신분석의 테크닉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