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마지노선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욕망한다. 마지노선이란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이 선만 넘으면, 이 선에 가까이가면 그 욕망이 해소되고, 안정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 욕망이 큰 것이던 작은 것이던 한 번 원하기 시작하면 그 것을 포기하기 전까지 계속에서 그 욕망에 매달리게 된다. 그 욕망이 사람이건 물질이건 건에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리다가 종결된다. 죽음으로써 종결되면 그 동안의 그 욕망들은 부질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욕망에 대한 욕망을 멈출 수가 없다. 왜 욕망은 포기되지 못하는가? 그리고 하나의 욕망은 언제나 다른 욕망을 앞지른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 그러한 것 같다. 우리의 욕망은 멀티인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다. 우리의 욕망은 하나의 구덩이를 채우기 위해 여러 질의 토양을 들이 부울 뿐 결국은 하나의 욕망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바로 존재감의 확보이다.
우리는 살아있는데 왜 또 존재감이 필요한 것인가?
존재감은 살아있음의 연장이다. 죽지 않은 이상에야 굳이 살아있음을 확인받을 필요가 없는데도 우리는 타자, 혹은 대타자의 관계를 복원시키면서 다시한번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한다. 정신분석은 인간이 '존재'를 부여받음으로 해서 '존재'가 소외되는 숙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태어나 존재를 지정당한다. 지시대상으로서 존재는 욕망 또한 지정받는다.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임을 믿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말을 하고,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명 속에 던져진 '아기'에게는 욕망은 언제나 새롭다. 우리로서는 그 욕망이 자신에게는 처음이기 때문에 새로운 자신의 욕망이라고 믿게 된다. 만약 차에 대해 관심이 없던 내가 '차를 소유하고 싶다'다는 욕망이 생겨났다면 그 욕망은 새로운 욕망처럼 여기고 몹시 희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차'라는 것이 없던 문명이전에는 그것을 욕망하겠는가? 핸드폰이 없을 때는 핸드폰을 욕망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없는 것을 욕망할 수 없다.
그런데, 추상적인 개념인 '사랑' 이라는 기표는 없는 것을 욕망하게 만든다. 즉 공백을 소환한다.
그런데 그러한 기표가 없었던 언어 이전의 시대에 시대에서는 '사랑'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기표가 생겨나기도 전에 '인간의 조산성' 때문에 인간은 '보살핌'이 있어야 생존이 가능했기에, 생존과 즉결된 문제로서 인간이 현재와 같이 느끼는 상실감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를 가지고 '사랑'을 발명하고, 사랑을 팔루스화 해버렸다.
팔루스가 된 사랑은 폭력적이다. 쟁취해야 하는 사물과 같이 폭력성을 띠게 된다. 그러나 사물로서의 사랑은 없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의 흔적만이 있을 뿐 우리는 그 흔적으로 다시 사랑이라는 기표를 세운다.
아무리 그 사랑이라는 기표를 세워도 우리의 흔적과 기표는 일치할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이 일치한다면 망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사랑을 팔루스적 기표가 아닌 진리의 기표로서 간직해야 한다.
팔루스적 기표로서의 사랑은 세상사람들이 한마디씩 적어놓고 간 포스잇이 붙어있는 벽일 뿐이다. 거기에 내 한마디를 보태도 좋고, 보태지 않아도 좋은.
사랑을 의미도, 기표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팔루스를 포기하고, 즉,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비록 욕망에 마지노선에 다다르지 못했더라도 나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욕망이 아니므로, 포기하는 것이다.
사랑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