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 사랑, 분석의 시작
프로이트는 환자를 해석하는 것보다 진짜 어려움은 전이를 다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전이사랑에 대한 소견> 이라는 프로이트의 논문은 '전이 사랑'을 다루고 있다. 전이사랑은 의사를 이성으로 대하며 상상계적 관계를 맺고자하는 환자의 욕망(의지)다. 다시 말해 환자가 의사를 사랑하는 것이다. 안나. O의 사례처럼 그녀는 브로이어를 사랑하게 되고, 브로이어는 역전이를 일으켜 도망가고 만다. 프로이트는 이 다루기 어려운 문제를 전면에 등장시켜 분해하고, 최적의 답을 찾아가고자 한다. 이 상상계적 관계를 의사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프로이트답게 디테일하고 심도 있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의사의 확고한 윤리관, 분석을 완결하고자하는 욕망이 관건인 듯 한다.
“애정사건,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쓰여질 수 없는 특별한 페이지에 있어야만 한다. ”
프로이트는 환자가 사랑에 빠졌다고 할 때 의사는 의사와 환자는 결합하거나, 치료를 포기하고 헤어지거나, 아니면 일시적 사랑에 빠지는 뻔한 결론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환자는 의사에 대한 사랑에 빠짐으로써 무의식적으로는 치료에 저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는 의사에게 사랑을 요구함으로써 치료는 뒷전이 되고 그의 사랑을 얻기 위한 분투가 시작된다. 이러한 저항은 무의식이 알려지기를 거부하는 주이상스의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한다. (라깡은 이 증상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는 내담자를 관찰하면서, 우리의 무의식에 해석되지 않는 측면, 즉 해석되기를 거부하는 이 저항이 주이상스의 측면이라고 보았다.) 만약 파트너가 있는 내담자이거나, 분석가가 전이사랑에 흔들리는 전이, 역전이의 민감한 상황이 혹시 벌어지지 않을까? 동성이 아닌 이성관계에 있는 분석가과 내담자 사이에 벌어지는 이 ‘은밀한 페이지’를 다들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 사랑으로 규정하고 노골적인 내담자도 있을 것이고, 그 욕망을 숨긴 채 분석가를 열망하는 내담자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사랑의 요구를 거절한 분석가의 따귀를 때리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경우는 이론적으로는 전이를 분석에 활용해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이인가 진정한 사랑인가 사이에서 내담자의 혼란에 빠져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분석가를 분석한다는 환상에 빠져 있을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대환장 파티는 진정한 분석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되었든 환자의 방황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프로이트는 사랑의 문제에서 치료의 저항이라는 문제로 이동시켜서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분석가의 간지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오래 전부터 사랑에 빠진 상태”이므로, 분석가는 환자는 치료를 저지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또는 그녀는 사랑에 빠짐으로해서 ‘사랑의 충족’이라는 부수적 이익을 얻으며, 한편으로는 분석가에 대한 테스트일 수도 있다. 또한 이미 사랑에 빠져있다는 것은 다른 분석가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사랑의 요구를 들어준다면, 환자의 무의식은 닫히고, 치료와 증상은 뒷전이 될 것이며, 환자는 의사와 사랑에 몰두함으로써 치료에 대한 저항을 시전하게 되는 것이다.
분석가는 이 ‘사랑 전이’이라는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환자의 집요한 욕망을 어떻게 포기시킬 것인가? 프로이트는 환자의 이 요구를 윤리와 도덕적 잣대로 거절하거나, 승화를 강요하는 무분별함을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환자에게 적당히 응답하면서,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 프로이트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한다. “환자의 갈망이 분석의 추진력으로서 존재하고, 대용물에 의해 달래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이다. 환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으로서 환자를 결핍의 상태로 놔두는 것이다. ‘결핍’이라는 것은 차가운 거절도 아니며, 응답도 아닌 모호한 방법이기는 하다. 분석가는 치료라는 대의를 향해, 환자의 욕망을 치료로 다시 이끌어야 한다. 분석의 수준에서 끌어내리려는 환자에게 자신의 무의식의 심리적 현실을 볼 수 있게 하는 기회의 창을 열어줘야만 한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전이를 틀어쥐고, 무의식의 원천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떻게 신경증의 소질과 사랑에 대한 불굴의 욕구가 결합될 수 있는가 문제를 제기하는 정도”일 것이라고 말한다. 신경증과 사랑의 욕구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 구조에 대해, 저항에 대해 환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저항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분석가는 유아기의 대상관계와 환상들을 함께 탐색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은 논조에서 다시 한번 고찰한다. “전이 사랑은 진짜가 아닌가?” 이 물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전이 사랑은 ‘저항’이 오히려 ‘사랑’을 발견한 편에 속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그 사랑이 가짜라고 말할 수도 없으며, 가짜라고 부인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분석상황에서 특수하게 유발되었다는 점, 저항에 의해 격화된 점, 현실적 고려를 결여한다는 점에서 정상성을 벗어난다. 프로이트는 이 비정상의 특성들이 사랑의 본질을 형성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소시지가 상으로 주어지는 개 경주에 어떤 장난꾼이 소시를 하나 던짐으로써 망치면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 개들은 그 소시지 하나에 덤벼들 것이며, 경주도 승자를 위한 소시지 화환도 모두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분석가는 이 어려운 과업을 잊어버릴 위험, 즉 던져진 소시지인 환자들의 소원충동에도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그녀의 삶을 고양시켜는 기회를 더 중요시 해야 할 것을 주장한다. 분석가로부터 쾌락원리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어쩌면 쾌락원칙 내의 일인 것이다. 안전한 방법만으로 우리는 무의식에 다가갈 수 없다. 프로이트는 “약 옆에 철과 불을 위한 자리”가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위험하지만 환자의 건강을 위해 정신분석을 희석하여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라깡은 세미나11 정신분석 근본개념에서 전이를 한 파트로 다룬다. 전이는 정신분석에서 속임수의 사랑이지만, 내담자가 분서가를 통해 ‘대상a’를 발견하고 자신의 구조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주장은 프로이트의 ‘결핍의 상태을 보존해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분석에서 사랑의 대상이였던 분석가는 이제 커다란 대상a가 된다. 내담자의 욕망의 원인으로서 상징화되지 않는 분석가가 자신의 무의식의 지식에 대한 발명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된다.
프로이트가 구체적으로 환자에게 대응하는 원칙은 “결핍”의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실한 주이상스를 복기하는 이 가공된 이 상실은 라깡이 말하는 분석가가 욕망의 대상에서 원인의 자리에 이동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테크닉이다. 분석가는 이 실천의 영역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을까? 고도의 계산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전이의 대상인 분석가는 소실되고, 내담자의 공백을 비추는 거울로 남아야 할 것이다.